편집실에서

뫼비우스의 띠

- 성현

1960년 런던 한 재판정에서 야유와 박수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피고는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시작되는 로런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었다. 피고 쪽은 육체와 인생에 대한 참다운 성찰이 배어 있는 수작이라 호소했고, 원고 쪽은 수치심을 극도로 자극하는 타락한 외설의 맹독성이 여전히 반사회적인 위험요소라 쏘아댔다. 작가의 사후 30년이 지나 벌어진 ‘채털리 사건’ 재판은 결국 무삭제판 판금 해제로 판결나면서, 19세기의 법이 20세기의 내면을 구속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일전에 그 소설 원작의 영화 상영이 있었는데, 내심 상영 직후 관객들의 표정이 얼마나 달뜰까 궁금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얼굴엔 홍조 대신 얕은 수위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45년 전 한 여가수의 미니스커트에 전국이 들썩였지만, 지금은 교복 치마가 그보다 더 짧아진 시절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표현의 자유는 항상 당대의 도덕과 전쟁을 벌여왔다. 근데 이것이 어찌 보면 무의미한 전쟁처럼 느껴지는 게, 결국 이 논쟁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표현의 자유에 더 높은 위상을 부여하는 걸로 끝났기 때문이다.

영화 <박쥐>의 원작 <테레즈 라캥>도 너무 큰 비난에 에밀 졸라가 서문에 해명까지 달아야 했다. 성도착의 화신으로 오해된 사드의 <소돔 120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조이스의 <율리시스>, 밀러의 <북회귀선> 등 수많은 고전이 판금됐다. 영화 <감각의 제국>은 정작 일본에선 개봉도 못했고, 여배우는 비난을 못 견뎌 은퇴해버렸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도 음란 시비 끝에 결국 감독이 투옥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작품들은 판금해제 되었기에 지금의 우리는 그것들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최근에 표현의 자유가 또 문제가 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문제 삼는 건 역사가 증명하듯이 결국 무의미한 일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겠지만, 최근에 벌어진 두 개의 사건은 우리의 판단에 약간의 혼란을 준다. 하나는 막말의 표현력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베이고 다른 하나는 근친상간이라는 자극적 표현 때문에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이다.

<뫼비우스>가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자 한국영화감독조합이 들고 일어났다. 예술적 표현의 자유는 신성한 것이라는 근거를 바탕으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일베가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는 것을 아니꼬워하고 있다. 일베는 거의 파시즘적인 광기에 가까운데, 이것까지 표현의 자유로 인정해주면 도대체 하지 말아야할 것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도대체 어디까지 ‘인정’해주어야 하는가. 근데 잠깐! 프레임을 한 번 바꿔보자. 표현은 정말 ‘인정’받아야 하는 건가?

세상 모든 양태는 실체를 표현한다고 말한 스피노자의 말마따나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표현은 실체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즉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이 세계라는 관계망만을 우리는 표현할 수 있다. 또 우리의 표현은 절대 우리 바깥의 세계(초월적인 영역)를 표현할 수도 없다. 고로 우리의 표현은 바로 우리를 구성하는 세계의(실체의) 본질이다. 우리의 표현의 근거는 절대 개인적 자유를 바탕으로 다른 모든 타자와 구분되는 ‘나만의 생각’ 혹은 ‘나만의 의도’가 아니다. ‘순수한 나’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지만 표현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을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성찰할 수 있게 된다.

표현의 문제를 개인들의 자유냐 집단의 도덕성이냐 라는 프레임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결국 해결은 치킨게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개인의 자유에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함을 부여하던가 아니면 집단적 도덕성에 보편성을 부여하던가. 특히나 개인들의 자유가 집단의 도덕성에 비해 훨씬 왜소할 때, 근데 그 개인들이 수적으로는 나름 다수를 이루고 있을 때, 그들의 순교자 코스프레는 더욱 증폭된다. 그럼 개인윤리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개인윤리로 환원하는 것도 결국은 집단적 보편성에 손을 들어주는 행위에 불과하다. 헤겔을 들먹거리면서 표현의 자유는 대자적 자기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자기절제 속에서 완성된다는 얘기를 아무리 멋있게 포장해도, 그것은 결국 집단적 도덕성에 우선권을 부여해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은 그들의 표현이, 우리를 구성하는 세계의 어떤 본질을 겨냥하고 있는가이다. 집단적 도덕성을 뒤흔드는 표현도 결국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본질의 일부이다. 황망한 막장 배설처를 폐쇄한다고 해서 분명 그 열패감에서 피어난 익명의 광기로서의 본질이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제한상영가를 때려서 억지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해도, 거세된 표현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실체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뜨거운 감자로 되돌아 올 것이다. 분명 역사는 대부분의 경우 자유로운 표현에 손을 들어주었고, 분명 표현은 그 어떤 것보다 근본적인 것이지만, 중요한 건 표현 그 자체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표현과 연관된 본질을 파악하는 것. 많은 표현의 문제들이 해결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그 표현이 담지했던 본질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이 해결되었거나 혹은 이제 더 이상 이 세계 내에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게다. 그렇다면 역사가 증명하듯이 일베도 결국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가 보다 개인윤리에 방점을 찍어 문제해결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부분을 고치려고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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