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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출산율이 낮아진다고 한다. 레알? 내 주변에는 결혼과 출산이 넘쳐나는데?

- 말자 2

어느 결혼 이야기 – 3. 결혼, 식

“스드메는 결정했어?”
“스드메만 끝내도 끝난 거지!”
“야. 스드메 혼자 하는 게 나아? 아님 플래너 끼고 해?”

듣보잡, 이뭐병, 여병추 등의 줄임말을 열심히 배우던 몇 년 전, 결혼을 앞둔 학교 동창이 주선한 모임에 나갔다. 그것이 아마도 내가 경험한 첫 청첩장 증정식이었을 것이다. 동기 여섯이 모였다. 파스타를 먹으며 두 시간 동안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한 뒷담화를 실컷 했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시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부터의 대화 주제는 결혼과 남자가 될 차례였다.
그런데, 대화에 따라갈 수 없는 단어가 등장했다. 바로 저 ‘스드메’였다. 결혼하는 친구 포함 넷은 ‘스드메’를 알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스드메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대화의 맥을 되짚으며 옆을 보았을 때, 내심 안도했다. 나 말고도 이 대화에 끼지 못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녀 역시 멍한 얼굴이었다. 4, 5년 후 지금, 그녀와 나만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요즘이라면 슬쩍 스마트 폰을 켜고 검색해 보았겠지만 2G 폴더 피처 폰을 쓰고 있었기에 묻는 수밖에 없었다.

“스드메?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의 줄임말이야!”

그랬다.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결혼식 준비의 반에 해당하는 것, 결혼을 앞둔 이와 친구들의 큰 관심사, 바로 스드메였다.
그날의 청첩장 증정식 이후, 4-5년 동안 수많은 청첩장 증정식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매번 ‘스드메’를 이야기해왔다. 연예인 화보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에게 결혼식 메이크업을 예약한 친구는 자랑스럽게 결혼식에 꼭 올 것을 당부했다. 더 예쁜 드레스를 찾기 위해 수많은 드레스샵을 방문해 이 드레스, 저 드레스를 입은 결과, 그 동네 드레스샵 직원들의 단합으로 보이콧을 당한 친구의 울분도 들었다.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입기 위해 다이어트 주사를 맞은 친구의 경험담을 들으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 친구는 결국 결혼식 날 갑갑하게 조이는 드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주례사 도중에 시원하게 트림을 하고 말았다. 패션지 화보 모델이 된 듯이 찍은 사진으로 결혼식장을 장식한 친구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 여잔 누구지?’

그런데, 나와 친구들은 왜 이렇게 스드메만 이야기한 걸까? 나는 솔직히 친구의 결혼관이 궁금하고, 결혼을 결정한 마음이 궁금한데, 묻지 못한다. 친구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모두 ‘스드메’만 이야기한다. 생활이 될 ‘결혼’이 아닌 한 시간을 위한, 누가 어떤 드레스를 입었는지, 그날의 화장은 어땠는지 기억도 하지 못할 그것에 열을 올리고, 신경 쓴다.

우리의 결혼식 풍경은 어린 시절 보았던 동화의 영향인 것일까? “공주님과 왕자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맺으며 행복한 결혼식 모습을 보여주던 동화책이 우리가 꿈꾸는 결혼식 모습을 결정해 버린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공주가 되는 결혼식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깊은 의미가 담긴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해 버린 동화책 작가와 출판사들을 탓해야 하는 걸까?

정말로, 우리는 왜 스드메만 이야기하고, 스드메에 목을 매는 걸까?

20대 후반부터 30대 여성들이 두루두루 모이는 모 인테리어 카페 게시판에 가 보시라. 그 게시판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생활 이야기, 특히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여자들의 고민 상담이 넘친다. 가만히 읽고 있으면 하루가 지날 것이다. 유용한 정보도 있고, 복장 터지는 글도 있다. 때로는 댓글을 통해 남녀의 갈등을 부추기기도 한다. 결혼에 관한 게시글을 보면 스드메에 대한 질문과 답변 역시 자주 업데이트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이야기도 많다. 신혼여행, 혼수, 예단 비용 상담, 전세 시세, 집 마련, 그리고 다수의 남친 부모님과 예비 신랑을 향한 불만 글을 무수히 볼 수 있다. 결혼 게시판 카테고리 뒤에는 임신과 출산, 육아 고민 카데고리가 있다.

그렇다. 결혼식 반이 스드메라면, 나머지 반은 예단과 혼수 준비, 집 마련, 부모와의 갈등, 고민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관계, 임신과 출산, 육아 등이 식 이후 기다리고 있다.

2년 전, 육체적 결합에 힘써야 했을 나이에, 내적 통합을 이루어 ‘나’를 완성하겠다는 덜떨어진 생각을 했다. 후회 중이다.
남자 안의 여성성 아니마와 여자 안의 남성성 아니무스 개념에 깊이 다가가려 칼 구스타브 융과 그의 후계자들의 책을 읽었다. 로버트 A. 존슨의 책도 그때 알게 되었다. 로버트 A. 존슨은 신화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성숙, 사랑을 통찰한다. 그의 저서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은 프쉬케 이야기를 통해 여성을 설명한다.
공주 프시케가 태어났다. 그 미모에 반한 사람들은 프시케의 미모를 칭송하느라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것을 잊는다. 이에 분노한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죽음과 결혼해야 할 운명이라는 신탁을 내린다. 죽음과 결혼할 운명인 기구한 프시케! 로버트 A. 존슨은 이 기구한 프시케가 우리 모든 여성임을 상기시킨다.

“사실 모든 신부는 결혼식 날 죽게 된다. 결혼이 바로 장례인 것이다. 이 사실은 큰 교훈을 담고 있다. 우리들의 결혼 풍속은 실제 장례 풍속이다. 결혼은 곧 장례로 일생을 통해 거쳐 가는 최대의 변형이며, 또 기쁜 탄생이란 의미로 의례를 거행하고 축복한다. 현재 우리의 의례 형식은 원시 부족의 의례에서 기원하였다.”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 28쪽)

하지만 현대인들의 결혼식에서는 이런 의미를 떠올리지 않는다. 우리의 결혼식은 밝고 행복하고 긍정적인 면만을 보여주려 한다. 저자는 결혼식 자체를 핑크 빛으로, 기쁨만으로 가득한 것처럼 만들려고 애쓰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어느 관점이나 비판의 여지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결혼식에서 내가 느끼는 의문을 짚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친구들 역시 결혼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어떠한 ‘죽음’에 대해서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죽음을 향한 불안을 감추기 위해 더 반짝이는 모습만 보여주려는 것 같다. 불안을 감추고 아름다운 연극 장면을 연출해 줄 스튜디오와 드레스, 가면과도 같은 메이크업에 그토록 신경 쓰는 것은 아닐지.

‘혼기’라는 것이 차면 ‘결혼! 결혼! 결혼!’을 외치며 노처녀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만 준 채 결혼이 의미하는 죽음에 대해서도 그 가치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이 세상이나 탓해야겠다.

아. 프시케는 ‘죽음’과 결혼해야 한다는 신탁을 받았지만 그녀의 외모에 반한 ‘에로스’를 남편으로 맞았다. 이후에 자신의 실수로 우여곡절을 겪게 되고 지하 세계(죽음)에 내려가게 되지만 결국 에로스와 결혼하게 된다. 에로스는 생명의 에너지, 삶이다. 그리고 에로스는 뭐, 에로스다. 그러니 결혼을 앞둔 나의 친구들이여, 펑펑 울고 자신의 죽음을 애도한 뒤, 에로스와 에로에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즐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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