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무의식과 융의 심리학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5. 무의식과 융의 심리학

뇌 신경학자 다마지오는 인간의 의식은 몸이 뇌를 매개로 하여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거랬어. 이 의식 개념에서 몸은 본능 즉 무의식적인 무조건반사체계를 가리키고 뇌는 의식적인 조건 반사체계를 가리키지. 그래서 다마지오의 말을 융의 용어로 바꾸자면 의식은 무의식적인 자기(self)가 자의식적인 자아(ego)를 매개로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거지. 이 말의 뜻은 무의식적인 자기가 자의식적인 자아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이라는 뜻이야.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무조건반사체계 즉 자기(self)가 생식과 생장과 생리 등 보다 기본적인 생명활동을 하고 있잖니. 진화과정으로 보아도 무의식에서 자의식 쪽으로 진화된 것이지 그 역은 아니잖아.

그래서 의사들은 조건반사체계의 자의식이 아니라 무조건반사체계의 무의식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사망을 판단하지. 그러니까 조건반사체계만 멈춰 있는 식물인간은 당연히 살아있는 거야. 우리의 상식으로도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목에서 숨소리가 나고 맥박이 뛰는 등의 무의식적인 생리 활동을 하고 있는 거야. 이 무의식마저 아주 잃고 모든 생리 활동이 아주 멈춘 것을 우리는 죽었다고 말해.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인간의 경험을 의식이 아주 없을 것 같은 양자 수준의 미립자에도 적용하지. 미립자들도 그것이 생성되는 그 순간 동안은 의식이 있는 살아있는 존재였다는 거야. 물론 그 때의 의식은 무의식 수준이지만.

차하위 단위존재들을 자신의 구성요소로 가질 수 있는 조건과 기회가 생겨서 어떤 차상위 단위존재가 생성될 가능성이 형성된 것을 화이트헤드는 현실적인 계기라고 말했어. 그 현실적인 계기가 구성요소들의 관계 도식인 설계도, 즉 가능성 즉 차상위 단위존재의 개념을 파악하게 되면 그 계기는 의식을 가지고 구성요소를 통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생성하고 그 계기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실현한 한 후에 죽어서 다시 차상위 단위존재의 구성요소로 주어진다는 거야. 그래서 생성되는 그 순간 동안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있다는 거지.

다만 양자 단위의 궁극적인 실재들이 가진 의식은 고등동물들이 가진 자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지. 그러나 우리가 변함없는 동일성을 지니고 있어서 실체라고 부르는 것들 이를테면 주기율표 속의 원소라고 불리는 것들은 사실은 이미 생성이 완결된 계기라서 의식이 없는 죽어있는 계기들이래.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궁극적인 실재들인 양자 단위의 미립자들의 생성은 현실화된 계기가 구성요소들의 작용인과 계기의 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는 느낌을 가지고 있대. 생성은 계기의 느낌 즉 의식에 따른 계기의 선택의 결과라는 거야.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느낌 또는 의식은 자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야. 인간은 자신의 의식을 의식하므로 의식된 의식과 그에 따른 행동을 교정할 수 있지. 그러한 자의식은 학습 능력을 가지고 조건에 맞추어 반사할 수 있는 고등 동물에게만 주어졌대. 생성과정에 있는 살아있는 양자 수준에서는 스스로의 의식을 되돌아보고 이를 교정할 수 있는 자의식은 없지만, 그 모든 생성 활동은 ‘피동적이고 기계적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선택적이라는 활동이래.

이를 확대하면 우주는 절대정신의 몸이고 우주의 질서는 절대정신의 의식이랄 수도 있어. 자연의 질서 또는 법칙들, 원리들이 절대정신의 의식이라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복잡계의 움직임은 빅뱅에서 생긴 에너지를 그렇게 움직이도록 규정한 절대정신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일 거야. 이는 마치 자율신경계의 무의식적인 무조건반사체계가 외부의 자극에 알맞은 선택으로 우리 몸을 만들어 생리작용을 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거지. 이런 추론을 확대하면 우주는 절대정신의 몸이고 우주의 모든 움직임은 절대정신의 자의식이 아니면 무의식적에 따른 움직임일 거야.

절대정신의 자의식은 자연의 질서나 법칙 또는 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신이 반사했던 진선미를 경험하여 진화하고 발달하고 성숙하도록 피조물을 설득하는 데에 온통 쏠려있을 거야. 그리고 신 자신도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새로운 진선미를 경험하는 데에 그의 자의식이 쏠려 있을 거야. 그가 우리 우주에서는 절대정신이겠지만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도 진화하고 발달하고 성숙하려 할 테니까. 그 방법이 이미 경험한 진선미를 반사하여 피조물의 진화와 발달과 성숙을 설득하는 거지. 그러기 위해서 그는 무한한 질량의 어떤 블랙홀에서 빅뱅을 일으켜 우리우주를 만들고 진화를 시험하고 있는지도 몰라. 다른 우주에서는 다른 차원에서 다른 진화과정으로 다른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인간은 신이 얼마나 진화된 존재인지 알아볼 수는 없지만 신의 몸인 우주의 진화만큼 진화했으리라고 짐작해볼 수는 있을 거야.

그리고 지구에서 그의 자의식은 모든 존재가 경험의 가능성을 실현하여 생물이 진화하고 문명이 발달하고 모든 개체가 성숙해서 더 잘 살도록 진선미로 설득하는 데에 온통 쏠려있을 거야. 신의 자의식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지. 지구에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의 자의식에서 큰 부분일 거라는 생각을 인간 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어. 신의 설득과 격려와 사랑이 아니었다면 인간이 우주에서 그의 정신 또는 의식인 진선미를 더 많이 깨달아 그에게 더 가까이 갈 수는 없었을 테니까.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진선미에 대한 인간의 경험 가능성을 실현하여 행복해지도록 인간을 진화·발달·성숙시키려는 신의 자의식에 있을 거야.

인간의 뇌의 진화는 신이 만물에게 진선미로 설득했던 것을 더 많이 경험하여 더 잘 살려고 더 많이 노력한 결과일 거야. 이는 거꾸로 신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인간을 설득하고 격려한 결과야. 그러니까 서로 도운 결과지. 인간의 노력과 신의 설득은 자율신경계 즉 무조건반사체계의 질서 즉 항상성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어. 그래서 더 많은 가능성을 실현하여 더 잘 살려고 그리고 더 잘 살리려고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적절하게 선택하여 반사(반응)할 수 있는 조건반사체계를 발전시켰어. 더 유능한 조건반사체계를 가지기 위해서 구피질 위에 신피질을 진화시킨 거지. 즉 의식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뇌가 진화한 거지 거꾸로 뇌가 진화·발달했기 때문에 의식이 이를 뒤따른 것은 아니야.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외부의 자극은 자꾸 바뀌게 마련이야. 그러므로 피동적인 무조건반사체계만으로는 이전보다 더 나은 반사활동으로 더 잘 살기는커녕 환경에 적응하여 생명체 내부 질서인 항상성을 지키는 것도 어려워져.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생리활동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무조건반사체계를 가진 척수를 연장하여 차례로 연수와 뇌교와 중뇌를 만들고 거기에 좀 더 복잡한 반사 활동을 맡겼어. 그러나 이들 뇌간 이하는 파충류의 뇌라고 하는 1층 뇌로 아직도 무조건반사 활동만을 할 뿐, 거기에서 자의식을 가진 조건반사는 불가능하지.

환경에 맞추어 선택적인 반사를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더 연장된 2층 뇌가 구피질인 변연계인데 포유동물의 뇌라고 하며 감정을 담당한대. 개가 주인을 보면 꼬리를 흔들며 얼마나 반가워하니. 그러나 야단맞은 개는 반가워서 가까이 오지 못하고 무서워서 도망가거나 숨어버리잖니. 이로 보아 구피질인 변연계에서 감정체계의 작동은 무조건반사체계의 기계적 작동이 아니라 신피질인 대뇌의 지령을 받는 조건반사적 활동이야.

어떤 뇌과학자들은 감정이 묻어있지 않은 순수한 이성적인 사고나 행동은 없다며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체계는 타고나는 본능 즉 무조건반사체계의 일부라는 거야. 그래서 변연계는 무조건반사활동을 하는 무의식적인 뇌라고 주장하지. 그러나 상황에 대한 대뇌의 해석에 따라 감정이 조절되는 것으로 보아 대뇌와의 관계를 중시한다면 감정은 조건반사체계에 속한다고 보는데 잘은 모르겠어. 다마지오는 정서 자체는 무의식이나 느낌으로 의식화되면 자의식이라고 말했어. 그 말대로라면 기본적인 감정체계는 타고난 것이나 느낌으로 대뇌에까지 올라가면 조건반사체계의 영향을 받아서 조절되므로 무의식적이나 때로 의식적일 수도 있다는 게 정확할 수도 있겠지.

변연계에서 더 연장한 뇌가 3층인 신피질의 뇌라는데 거기에 경험을 체계지어 저장하고 그 체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적절한 행동을 추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조건반사체계가 들어있는 곳이지. 드디어 포유동물에게 학습 능력이 생겨서 조건에 맞추어 반사할 수 있는 같은 범주의 경험들의 선택지들을 체계적으로 유전자가 아니라 신피질에 축적할 수 있게 된 거야. 지금은 이러한 3층 뇌 이론은 층계 구분의 경계나 각 층계의 기능이 뚜렷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많이 발견된대. 그래도 크게 보면 뇌 기능의 발달과정이 발생학적인 과정이나 진화 과정과 비슷할 거라고 예측해볼 수 있어.

이렇게 보면 피조물의 무조건반사든 조건반사든 모든 반사 능력, 반응 행동 능력은 의식의 능력이야. 그리고 이 의식 능력은 내부의 질서를 만들어서 자라고 그 질서를 유지하는 생식·생장·생리 활동과 외부의 자극에 알맞은 행동을 반사체계에서 선택하여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고. 그리고 이러한 선택 능력은 경험 능력이야. 그러니까 의식은 선택 능력이고 경험 능력이고 적응 능력이고 나아가 생존 능력 이지.

우리의 무의식에 잠겨 있는 타고난 가능성인 본능적 자아 즉 무조건반사체계에는 단세포 시절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진화과정에서 얻은 필요한 모든 경험이 체계적으로 축적되어 있대. 그래서 이 무의식이 우리가 엄마의 뱃속에서 단세포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진화 과정을 발생학적 과정으로 되풀이하도록 이끌었고 태어나서도 항상성 즉 신체의 내부 질서를 유지하도록 생리작용을 계속하고 있어. 모든 인간에게 또는 한 문화권에 공통되는 이 본래적인 무조건반사능력을 융은 집단무의식이라 하지. 그리고 가라앉아 자의식 위로 떠올릴 수 없는 개인적인 경험을 개인 무의식이라 하고. 그러니까 인간의 자아는 무조건반사체계인 무의식과 조건반사체계인 자의식의 변증법적인 지양과 역동적인 통합으로 이루어져 있어.

집단무의식은 진화과정에서 얻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경험 정보들이 우리의 유전자에 무조건반사체계로 축적되어 있댔어. 그러나 모든 유전정보가 다 발현되는 건 아니야. 파충류 시절에 얻은 경험 정보와 포유류 시절에 얻은 경험 정보가 인간에게 한꺼번에 다 실현되면 우리는 두 종류의 특징이 뒤섞인 괴물들이 되겠지만 그렇지는 않잖아. 진화의 질서는 전 단계를 포함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하므로, 포함하며 초월하는 포월적이고, 또 위계적이야. 가능성은 있으나 현실성이 없다는 것은 차상위 단위존재가 필요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실현한다는 뜻이야.

형질이 어떻게 발현되고 생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환경의 자극에 따라 선택된 유전 정보끼리의 조합으로 결정된대. 그래서 단 하나의 유전 정보가 단 하나의 형질이나 생리와 1: 1로 대응되는 경우는 거의 없대. 어떤 형질이나 어떤 생리든 환경의 자극을 받아 선택된 유전정보의 조합으로 그 형질이나 생리의 관계 도식이 결정된대. 그런데도 하나의 형질을 발현하는데 어떤 경우는 수백 가지의 유전정보가 조합을 이룬다면 그 경우의 수는 얼마나 많겠어. 그래도 계통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고 인간은 인간으로 원숭이는 원숭이로 태어나므로 뒤섞이지는 않잖아. 위계적인 진화의 질서가 신비하잖아. 그래도 같은 종 안에서 일란성 쌍둥이 말고는 같은 유전자를 공유한 경우가 없대. 쌍둥이마저도 다른 경험에 따라 성격도 소질도 취미도 다른 개성화가 이루어지더라. ‘나’는 수많은 가능성이 모여 딱 이거 하나로 결정된 존재이니 얼마나 귀중하니.

심리학자 융(C.G. Jung)은 이 ‘나’를 자기(self)와 자아(ego)로 나누어서 보았어. 자기(self)를 자기원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조건반사와 조건 반사 즉 나의 모든 구성요소를 하나의 전체로 통합시키는 주체래. 이에 비하면 조건반사체계만을 통합하는 주체인 자아(ego)는 자기에 포함되는 개념이지. 인간의 성격이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로써, 융의 자기 원형은 우리가 흔히 쓰는 영혼이라는 말에 대응될 만한 개념이야. 이는 인간의 생리 기능과 성격 구조의 기초가 된대. 이는 또 개성화 과정에서 어떤 사물·인간·사태에 대하여 한 인간이 생득적으로 보이는 모든 반응 양식을 만들어내는 관계 도식이래.

융은 자기 또는 자기원형을 인류의 진화적인 경험이 축적된 거랬어. 그러나 하버지는 화이트헤드나 윌버의 주장대로 자기 원형을 인간 종으로서의 경험만이 아니라 빅뱅에서부터 단세포시절과 인간의 경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진화적인 경험이 축적된 거라고 그 개념을 확대해서 사용한단다.

융은 자기실현의 최종 단계인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이 온전하게 통합된 것인데 완성된 자기원형의 궁극적인 모습은 기독교의 신과 비슷하다고 말해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대. 그의 말대로라면 예수는 신을 닮았으니 신의 아들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기독교 교리를 뒷받침하는 것 같아. 그러나 동시에 가능성으로만 말한다면 예수만이 아니라 누구나 신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 거니까 독생자 교리를 부정하는 셈이지.

1944년에 융은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심근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대. 그 때 그는 임사체험을 경험했으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차라리 그 상태로 세상을 하직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황홀감을 느꼈대. 언젠가 인터뷰에서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자, 융은 이렇게 대답했대. “나는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을 압니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라고 적혀 있대. 이로보아 융은 생전에 신과 인간의 종교적인 본성과 종교적인 경험을 믿고 이를 학문적으로 밝히려고 애썼던 사람이야.

그리고 그의 회고록의 첫 문장이 나의 생애는 “나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라고 쓰여 있대. 이 문장 속에서 ‘무의식’을 무의식을 이루는 그의 여러 원형 상징들 중에 하나로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 또는 ‘자기원형’일 거야. 융의 말대로라면 하버지나 너도 타고난 가능성 즉 본능이라는 무조건반사체계인 자기 또는 자기 원형이 조건반사체계인 자아를 만들어 이 4차원의 환경에 적응하며 살았던 흔적일 거야. 그러니까 자기는 조건반사체계인 자아를 낳고 길러서 그 자아까지를 하나의 전체로 통합시키는 보다 근원적인 생명이라는 뜻이야.

이렇게 본다면 무의식에 대한 융의 관점은 프로이드의 그것과 크게 달라. 프로이트는 억압 때문에 분출하지 못하는 무의식을 부정적인 요소로만 보았으므로 무의식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정신병의 치료 목적으로 삼았어. 프로이트는 억압된 무의식적 충동이 인간의 행동의 동기를 결정한다면 인간은 동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본 거야. 그러면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반문화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본 거야. 그러므로 인간은 무의식에 휩쓸리지 말고 행동의 동기를 보다 고상한 이성적·도덕적·문화적인 목표로 승화시켜야 된다는 가지. 이러한 프로이드의 인간관은 무의식은 악한 거라는 성악설에 바탕을 두었던 것 같아.

그런데 거꾸로 융은 환자들을 그들의 무의식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어. 융은 무의식이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력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에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어. 융은 무의식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생명 에너지이기 때문에 이 에너지를 선하게 사용해야 된다고 믿었던 거야. 무의식을 선하게 사용하여 심신이 건강해지려면 이를 억압할 게 아니라 화해해야 된다고 믿은 거지. 융은 프로이드에 비하면 성선설에 가까운 인간관에 바탕을 두었어.

융의 상담 목표는 내담자의 성격발달이고 그래서 그의 상담은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을 돕는 거였대. 그러기 위해서 융은 내담자에게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정신 원리를 의식화시켜서 행동의 동기로 삼음으로써 개성화 과정을 촉진시키려 하지. 개성화는 인생 전반기에는 분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인생 후반기에는 통합을 통해 달성된대. 따라서 내담자는 무의식적인 자기와의 분화와 통합 과정을 통해 성격발달이 이루어지는 단계적인 특징을 이해하고 타고난 자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대. 그래서 자신의 무의식적 주인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위해서 융은 꿈의 해석을 중시했대.

인간을 프로이드와는 다르게 보는 융이 말했대. “나는 프로이트처럼 어린 시절의 성적 외상(트라우마)에 유일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또 프로이트처럼 성을 과도하게 전면에 부각시키지도, 성이 심리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범성욕주의라고 비난을 받았듯이, 융의 이론도 비과학적이라고 비난을 받았지만 하버지는 당연히 융의 이론을 더 많이 따르는 편이야.

융에 대한 비판은 아직도 현대 과학이나 심리학이 융의 초월적인 경험을 따라잡지 못하는 거라고 봐. 하버지도 스무 살 때 초월적인 경험을 했었어. 네가 원한다면 지금도 생생한 그 체험을 언제든 들려주마. 그래서 앞의 뇌신경학자의 임사체험을 같은 체험을 한 융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하버지에게는 이해가 훨씬 쉬워져. 뇌신경학자 이븐 알렉산더와 C.G.융과 그리고 하버지도 자신의 체험을 결코 버리거나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버릴 수밖에 없었어. 특히 융의 자기원형 개념으로 다른 차원에 가 있는 임사체험 속의 주체인 초월적인 자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어. 물론 융이 말하는 원형들은 실재가 아닌 상징이라지만 하버지는 임사체험의 주체가 바로 이 ‘자기’ 또는 ‘자기원형’의 이미지를 가진 실재가 아닐까라고 잠시 생각해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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