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내 걱정 좀 덜어주라! –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를 보며 –

- 오항녕

세종 31년의 기억

만약 사관(史官)이 자기에게 관계되는 사건을 싫어하거나 친척과 친구의 청탁을 듣고 관련 사실을 없애고자 하여 파일을 훔친 자는 ‘제서(制書 국서)를 도둑질한 법률’로써 논죄하여 목을 베고, 사초를 도려내거나 긁어 없애거나 먹으로 지우는 자는 ‘제서를 찢어 버린 법률’로 논죄하여 목을 베며, 동료 관원으로서 알면서도 고하지 아니하는 자는 법률에 의하여 한 등급을 줄이고, 사초의 내용을 외인에게 누설하는 자는 ‘근시관(近侍官)이 중요한 기밀을 남에게 누설한 법률’로써 논죄하여 참해야 할 것입니다.

1449년 3월 2일, 조선시대 실록을 편찬했던 사관들이 근무하던 춘추관(春秋館)에서 세종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는 세종의 윤허를 얻어 조선의 기록관리를 기초 법령이 되었다.
이후 연산군 4년 성종시대 실록을 편찬하던 과정에서 이극돈(李克墩)이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 적힌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빗댄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고자질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 경험으로부터 중종 2년에는 사초를 작성하는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초를 누설해도 마찬가지로 목을 베는 규정이 추가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류 역사상 거의 독보적인 역사자료의 지위를 가진 조선실록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다.

몇 달만에

실은 작년 11월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느니 어쩌니 하면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유무(정확히 말하면 비밀 정상회담의 유무. 결론! 비밀정상회담은 없었다.)를 놓고, 또 공개를 놓고 새누리당이 한창 선거전략으로 써먹고 있을 때 위클리 지면에 이 논란의 성격에 대해 쓴 적이 있었다.
그때 원세훈은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고, 나는 “‘공개할 수 없다’고 답변한 것을 보면 대통령 선거에 이용하여 트집을 잡을 내용이 없기는 한가보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총리실에서 자행된 민간인 사찰 관련 기록들이 담겨 있던 컴퓨터의 파일을 삭제, 포맷하여 인멸했던 이명박 정부’가 ‘대통령 재직 기간에 제대로 기록을 남겼는지, 남긴 기록을 이관하는지’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명박의 행적이 궁금해서가 아니다. 근대국가의 행정을 담은 기록은 곧 그 국가가 영토로 규정하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나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들이 청와대에서 반드시 생산되어야했을 기록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김무성과 국가정보원이 한 짓

그런데 국가정보원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진짜 ‘까’ 버렸다.(날 것 그대로의 언어가 남재준 국정원장 같은 높은 분들의 입에서 수시로 나오나보다. 마치 나라를 날로 잡수려는 듯.) 그리고 김무성은 부산에서 있었던 대선 지원유세 때 회의록 내용과 동일한(연합뉴스, 2013.6.26) 내용을 인용하면서 노무현 정부의 ‘종북성’을 들추어냈다. 이미 회의록을 보았다는 뜻.
자, 별안간(우리는 다 안다. 왜 새삼 다시 NLL 발언을 들고 나오는지.) 불거져 나온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관련 발언이 어떠했느냐는 것은 이번 논제가 아니다. 그건 다음 문제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국가정보원에서 공개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성격과, 그것을 국정원에서 공개하고 서상기 등이 열람하는 것이, 김무성이 열람하는 것이 적법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은 대통령기록물이다. 대통령기록이란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산하거나 받은 기록을 말한다. 정상회담은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직무이다. 국정원 소속 공무원이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해 회의록을 작성했어도 대통령 국정행위를 지원하는 업무를 수행한 것이므로 회의록은 대통령 기록물인 것이다. 국정원에서는 마치 자신들이 작성했으므로 국정원기록이지 대통령기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양인데, 법률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실제로 국정원 소속 공무원이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하여 「회의록」을 작성했어도, 국정원은 작성이 끝난 「회의록」을 대통령비서실에 접수시켜 대통령비서실에서 관리하는 것이 적법한 관리 방식이다. 나아가 대통령비서실 소속 공무원이 회담에 배석하여 녹음한 녹음기록을 국정원에서 녹취하도록 지원한 것이라면, 역시 그 「회의록」은 대통령기록물이다.
만일 국정원이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확정한 「회의록」이 아닌 다른 판본을 보관해왔다면 국정원이 보유한 판본은 회담의 내용을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기록한 기록물이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증거로서의 효력을 지닐 수 없다.(진본성(Authenticity 원본성)의 원칙)

정보기관이 비밀을 누설한 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업무상 활용을 위하여 “국정원에서 관리하라”고 했다면, 국정원은 대통령기록물 사본을 접수하여 관리한 것이며 대통령기록물의 사본으로서 관리되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전 「회의록」을 지정기록물로 지정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이란, 군사, 외교, 안보 등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록의 공개를 일정 기간(최대 15년) 유보하여 불필요한 국익의 손상이나 정치적 쟁점화를 피하기 위해 대통령이 비공개로 지정한 기록을 말한다.
이는 「대통령기록물법」을 만들 때, 대통령기록이 바로 공개될 경우 퇴임 후를 걱정한 대통령이 오히려 기록의 생산을 주저하거나 심지어 폐기할 수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보호장치였다. 물론 법률이 제정되었으니, 이런 취지에 여야 모두 동의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2012년 12월 17일 국정원이 「회의록」 발췌본을 제작, 제출하고, 2013년 1월 16일 검찰이 열람한 것 모두 「대통령기록물법」에 위배된다

검찰이 수사상 대통령지정기록물의 열람이 필요했다면 「대통령기록물법」 제17조 제4항 제3호에 근거하여 관할 고등법원장이 영장을 발부하여 대통령지정기록물 관리기관인 대통령기록관을 통하여 「회의록」을 열람했어야 했다.
특히 2013년 6월 20일, 국회 정보위 소속 국회의원이 국정원이 제출한 「회의록」 발췌본을 열람한 것 역시 위법이다. 우선 기록관리전문가협회가 정확히 지적하였듯이, 국회법 제37조에 의하면, 국회 정보위원회는 국정원 소관에 속하는 사항을 논의해야 하며, 남북정상회담 「회의록」과 관련된 사항을 논의해야 하는 상임위원회는 외교부와 통일부를 소관하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이다.
그리고 국회에서 「회의록」 열람이 필요하다면, 외통위에서 대통령기록물법 제17조 제4항 제1호에 근거하여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의결을 통하여 대통령지정기록물 관리기관인 대통령기록관을 통하여 「회의록」을 열람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절차가 문제란다

이번에도 정문헌, 서상기 등은 문제의 본질이 NLL에 대한 견해인데 자꾸 절차를 문제 삼는다고 불평을 한다. 이들은 법에서 왜 절차를 만들어놓았는지 정말 모르나보다. 법에서 담을 넘어가서 몰래 남의 물건을 가지고 나오지 못하도록 한 이유는, 그 절차가 시민들의 편안한 삶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 절차를 어기면 범법(犯法)이 되는 것이다. 바로 대통령 기록을 무단으로 열람한 것이 그와 같은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국정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국회 정보위 서상기 의원 등 회의록을 열람한 사람들에 대한 고발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이나 서상기 의원의 변명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대통령기록물이 아닌 일반 공공기록물이라고 우기면서 위법, 범법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다. 아마 정치논리에 휘둘리기 십상인 검찰이나 법원 역시 이들 손을 들어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고민은 거기에 있지 않다. 진정 나라가 나라다운 모습을 갖추기 위해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대통령기록을 대해야 하고, 나아가 공공기록물을 관리, 보존해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세종대 춘추관 수준, 조선왕조실록을 만들었던 사관들의 수준까지는 요구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국익이 무엇인가

정권은 바뀌게 되어 있다. 5년 뒤가 될지, 10년 뒤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바뀐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뒤로도 정권 교체는 또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이 나라가 경험을 쌓아가는 나라, 역사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는 나라가 되기 위해, 더 가깝게는 지금 주변 나라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품격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중국을 방문하고 있는 대통령에게 이런 불법이 과연 무슨 도움이 될까, 정도는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정략에 따라 법으로 보호하게 되어 있는 한중 정상회담 회의록도 여차하면 까버릴 분들과 참 진지하고 깊은 말씀들을 나눌 수 있겠다, 그지요? 참, 하다하다 내가 이런 걱정까지 하고 살아야 하는 세상인가 보다. 갑자기 내 정체성이 혼란스럽다.

며칠 전, 나는 우리나라의 공공기록물, 대통령기록물 관리를 책임지는 국가기록원의 공개분류 심의회에 참석하였다. 비공개로 분류되어 있는 기록은 30년이 지나면 재분류하여 국민의 알권리에 부응하는 한편 개인정보는 보호하는 민감한 업무 중의 하나이다. 비공개, 비밀 기록 하나를 공개하기 위해 국가기록원 실무자들은 토론을 반복하고, 기록 생산기관, 유관기관과 협의하며, 또 최종적으로 필자가 참석한 심의회의 논의를 거친다.
올해도 이 분들, 21세기의 사관들은 18만 건의 기록을 재분류해야 한다. 이들이 나라의 기록을 대하는 자세만큼, 아니 그 반만이라도 국회의원, 국가정보원, 검찰, 법원에서 배울 수는 없을까. 정말 이 나라의 보수(保守)들, 정신차리기 간곡히 바란다.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걸 오래 누리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이래가지고야 어디 얼마나 가겠나? 농담이 아니라, 정말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다. 또 불쑥 떠오르는 생각, “내가 왜 이런 걱정까지 하고 살아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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