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코리안드림

- 들깨

“이제 남은 것은, 추방되었지만 아직 여기 남아 있는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이다. 추방되었지만 결코 추방할 수 없었던 그의 유령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 유령을 다시 가시화하고, 그 유령과 더불어 다시 싸우는 것이다.”(<미노드 목탄, 혹은 이주노동자의 정치학>, 이진경, 2009)

미누를 인터뷰 하기 전에 미리 머릿속에 그려놓은 구상에선, 이진경 선생님이 쓴 글의 마지막 구절을 비판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려 했다. 네팔에서 직접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유령’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있는 실체이며 그와 함께 여전히 어떤 연대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유령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가 죽은 사람도 아니고 엄연히 네팔에 살아있는데 그를 ‘유령’이라 부르는 것이 강제추방이라는 것을 어떤 끝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네팔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했던 여행은 그래서, (강제)추방당한 사람들이 여전히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할 일이 그들의 유령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 다른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어떤 기획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네팔에서 내가 만난 미누는, 어떤 의미에서 유령이었다.

<그림 1> 카트만두에 있는 미누가 차린 한국어학원. 고용허가제를 위한 한국어능력시험이 1-2년에 한번꼴로 치뤄진다. 네팔 뿐 아니라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인력을 보내는 15개 국가에서 이 시기엔 한국어 열풍이 분다. (네팔에서 내가 만난 네팔사람중에 한국말을 제일 잘했던)미누는 꽤 이름이 알려진 학원강사인데 한국에 갈 사람들에게 한국의 현실과 문화나 사고방식등도 더불어 알려주고 싶다고 한다.

내가 한국을 떠나온지도 어느덧, 구 개월이 넘었다. 간혹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을 상상해보기도 하는데 마치 꿈만 같다. 여기서 꿈은, 이상향 같은 것이 아니라 실감이 나지 않는 의미로서의 꿈이다. 말하자면, 느낌이 피부로 부딪혀 오지 않는 어떤 장면을 보는 듯하게, 나는 한국을 상상하게 된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한국의 모습은 지금 인도에 있는 나의 감각으로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미누는 한국에 18년을 살았다. 그 18년은 시간의 길이로만은 표현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공간적으로는 아무리 오래 외국에 살아도 본국의 사회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어를 익혔고, 한국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미누는 한국 사회와 어우러져 그 세월을 보냈다. 한국에서 그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을 했고 네팔로 돌아가는 것은 그에게 막연한 어떤 미래의 일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해방촌의 어느 골목에서 그는 체포당했다. 그렇게 준비 없이 귀국은 그에게 찾아왔다. 잡힐 때의 느낌, 출입국관리소에 갇혀있을 때, 그곳 창문 밖으로 보였던 강제추방 금지를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 화성 외국인 보호소에서 ‘보호’당하고 있었을 때, 사람들이 찾아와 잔뜩 먹을 것을 넣어줬던 기억, 무뚝뚝해보였던 고미숙 선생님이 자신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 그 모습 앞에서 ‘웃는 미누’는 돌아서서 울었던 기억, 그리고 네팔로 돌아와 별로 변한 게 없는 네팔의 길거리를 걸으면서 미누는 마치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가위눌린 기분이었다고도 했다.

사람이 어떤 경우의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영화처럼 느낄까. 며칠 전, 내 한 달 여행경비가 넘게 든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고 멘붕한 다음날, 거리에서 100원을 아끼려고 흥정하는 내 모습이 3인칭처럼 느껴진 적이 있었다. 현실감이 나지 않았다. 현지 물가에 맞춰 진 내 감각, 즉 100원에 느끼는 무게감과 잃어버린 돈 35만원 사이의 괴리감 때문이었을까. 그 괴리감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개입할 수 없는 무력감 때문이었을까. 주머니에서 10루피를 꺼내면서 나는 알 수 없는 비현실감을 느꼈다. 돈을 잃은 지 2주가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이 느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미누가 쫓겨날 때 더했을 것이다. 그가 갑작스레 네팔에 왔을 때, 그의 일상의 감각은 한국의 그것이었고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던 것은 없었다. 18년 만에 돌아온 곳에서 마치 낮잠을 자며 꿈을 꾸다 깨어난 기분이었다. 젊은 아가씨였던 누나는 애 엄마가 돼 있었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대로인 듯 한 자신만 제외하고는 많은 것들이 갑자기 십 수년의 세월이 지나 있었다. 네팔에 돌아온 지3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은 한국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몸에 배인 습관들, 말투에서 묻어나는 뉘앙스들을 그는 갖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일종의 유령과 같았다.

<그림 2> 그가 읽고 있는 한국어 책들. 자서전, 시집, 소설, 에세이 등 여러 장르의 책들이 보인다. 책 뿐만 아니라 네팔의 일상에서 살아갈 때도 그는 한국에서 배운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간다고, 그게 살아가면서 힘든 점 중 하나라고 말한다. 네팔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에게 네팔 생활에 대해 물어보면 각기 저마다의 차이가 있지만 몸에 깊이 박혀 어찌할 수 없는 네팔 사람들과의 차이, 그로 인한 불편과 괴로움을 듣게 되는데 미누 또한 어느 정도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국어 학원을 운영한다. 또한 여행자거리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사장님이다. 또 아름다운 커피라는 공정무역커피의 현지 코디네이터이기도 하다. 이제는 ‘이주노동자’라는 정체성이 어색할테지만 노동자 콘서트나 노동절 행사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내게 한국에서 스탑크랙다운 밴드 활동을 할 때나 이주노동자 방송에서 일할 때, 빈집에서 살며 수유너머 공간을 왔다갔다 할 때와 같은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때는 정말 하고 싶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하며 이 사회에서 내가 꼭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네팔에서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왜일까.

<그림 3> 여행자 거리인 타멜에서 그는 '와라와라'라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일의 술집을 열었다. 사장님으로서, 선생님으로서, NGO코디네이터로서, 가수로서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네팔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지는 못해보였다. 처음 네팔에 돌아왔을 때는 쓰는 말부터 잘 적응이 안됐었다고 하고 여러가지 일들을 벌였지만 만족스럽게 잘 진행이 되고 있진 않은 듯 했다.

샤말 타파가 떠올랐다. 한국의 이주노동자 운동의 분기점이라고 할 만한 명동성당 농성 때 샤말은 농성단 대표였다. 그 시기는 미누가 이주노동 운동에 막 발을 들여 놓던 때이기도 했다. 성공회대 농성장에서 그가 밴드활동을 시작하고 이주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샤말은 농성장에 앉아 추방 이후의, 네팔에서의 이주노동자 운동을 구상했다. 미누가 밴드를 하고 방송을 하면서 ‘친구’들을 만들어갔다면 샤말은 노조를 조직하고 커뮤니티를 다지며 ‘동지’들을 만들었다. 강제추방된 후 샤말은 네팔에서 그의 운동을 이어나갔다. 네팔의 노조에서 이주노동자 운동을 만들어나가면서 한국을 비롯한 노조 운동과 연대를 만들었다. 그 후로 7년의 시간동안 그는 탄탄한 노조조직을 만들었고, 협동조합운동과 귀국한 이주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센터도 시작하는 등 운동으로서의 삶을 보람차게 살고 있었다.

시기의 차이일까, 둘의 가치관이나 성향의 차이일까, 우연일까. 샤말과 미누는 같은 이주노동자 운동으로 묵기엔 너무도 다른 방식으로 사는 듯 했다. 미누는 티비에, 동네 행사에, 술집에서 자주 보이는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샤말은 스스로 노동자로 자각하고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동지들을, 노동조합을 조직했다. 한국사회에서 미누의 존재는,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운동이 됐지만 네팔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네팔에서의 미누의 삶에 대해서 들으면서 나는 ‘지금 여기’에서 어떤 방식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내야 할지 고민스러워졌다.

<그림 4>작년 12월 18일 이주노동자의 날 집회에서 만났던 샤말. 네팔 최대의 노동조합중 하나인 쥐폰(Gefont)에서 이주노동운동섹터를 맡고 있는 그는 노조활동 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한국에서 운동을 할때든 지금 네팔에든 그는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활발한 활동가라는 평을 듣는다.

미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국가의 주권, 법이 얼마나 위대하길래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만들어놓는지 그 당위와 그것이 가진 힘이 쉽사리 납득되지 않았다. 스무살 까지의 인생을 네팔에서, 그 이후 18년을 한국에서, 그리고 다시 네팔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가 한국인인지 네팔인인지 난 함부로 규정지을 수도, 규정지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한국에서의 그의 시간과 관계, 그가 쏟았던 열정을 불법으로 쉽게 규정지었다. 그리고 그를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어버렸고 그가 한국에 가기 전 가졌던 ‘코리안 드림’을 그에게 한나절의 꿈으로 만들어버렸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인권의식이 상승해서 법과 제도가 바뀌면 좋을까. 카트만두에서 난 도시 어디에서나 바라보이는 비행기의 이착륙을 네팔사람들과 함께 지켜보며 그들과 내가 비행기에 대해 가질 느낌의 차이를 생각해보았다. 비행기 가격이라는 것은 여전히 내게 비싼 것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일년에 한두번은 비행기를 타고 움직일 수 있었다. 비행기는 내게 운송수단이지만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가는 네팔인들에게는 인생의 어떤 전환점이자 통과의례일수도 있다. 시선의 불평등도 경계지어져 있다. 한국인이라는 국적으로 네팔에 가면 (심지어 여행 중반 이후엔 내가 언급하기 전까진 티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나는 특별히 우대해야 할 외국인이 됐다. 네팔에서 3개월을 머물고 인도로 넘어온 지금 나는 네팔인들이 겪는 인도에서의 차별을 몸소 겪는다. 내가 쓰는 어설픈 힌디(인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공용어)에 네팔말이 섞이고, 네팔 억양이 묻어날 때 사람들은 내게 무시하는 듯한 눈빛과 말투를 보낸다. 네팔리라고 대놓고 무시하고 욕하는 사람도 있다. 종종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그들의 인식을 정정하는 순간 많은 것들은 변해버린다.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주문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그림 5> 인터뷰를 마치고 미누와 함께 한국식당에 있는 노래방을 찾았다. 나는 미누의 노래를 거기서 처음 들었다. 그 전까지 스탑크랙다운이라는 그룹이 그들의 신분때문에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미누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의 노래실력에 놀라게 됐다.

여행을 계속 해 나가면서, 여권에 찍힌 도장으로, 비자로 내 행동의 영역이 제한되면서, 나는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친구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빈집에서 일상적으로 부대끼면서도 친구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단체활동을 하면서 같은 뜻을 가지고 활동하며 ‘동지’가 되면서도 친구되기는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본이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시대다. 말로는 국제적인 연대를 말하기는 쉽다. 당위도 있다. 돈만 있으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그들과 만나서 악수하고 대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미누의 드러내기, 혹은 친구되기가 어떤 정치적 운동이었다면 단순히 그와 만나고 악수하고 대화하는 것 이상의 정치적 운동으로서 관계 맺고 가시화 하는 것도 가능하고 필요하지 않을까. 돌아오지 않는 울림으로서 미누를 부르는 것, 즉 유령이 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를 실체로서 호명할 수 있을까, 일방적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서로 부르며 관계를 일상화하고 구체화 시켜나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게 국제화 시대라는 이 드넓은 땅덩어리를 궁상맞게 돌아다니며, 내부와 외부라는 말을 물리적으로 흐려가며, 내 안에 한국스러운 것들을 조금이나마 지워가는 한편 낯선 감각들을 쌓아가면서 계속해서 하게 되는 고민이다.

미누를 한국으로 이끈 것은 ‘코리안 드림’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서의 삶은 그에게 ‘드림’처럼만 남았다. 나를 여행으로 이끈 것도 어떤 ‘드림’이 아닐지, 여행이 내게 그저 ‘드림’으로만 남게 되는 건 아닌지, 요즘 들어 조금씩 하고 있는 걱정을 풀어놓으며 글을 마친다. 꿈은, 이루어지나?

오, 한강이여 넌 날 꿈꾸게 해
난 항상 이 자리에 해매이고 있어
난 괜찮아 꿈을 버리진 않아
– 스탑크랙다운의 노래 ‘한강에서’

p.s. 인터뷰의 말미에 미누는 혹시라도 결혼소식을 전하게 되면 직접 올 필요 없이 축의금을 송금해달라고 덧붙였다(물론 농담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그리운 것이 평소에 걷던 해방촌의 골목 풍경이라고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골목 풍경을 사진에 담아 미누에게 보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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