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일본 정치인의 <위안소는 필요했다>발언에 대해서, 나는 왜 화를 내는가?

- 가게모토 츠요시

2013년5월 일본의 어떤 정치인이 <위안부> 제도는 필요했으며, 이러한 제도는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들도 가지고 있었다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것이기도 하고, 한국정부나 여러 사람들이 이 발언에 대해 직접 비판하기에 나섰으며,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내가 거듭 논의할 것은,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내가 해야 할 비판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 자리를 빌려서 약간의 의견을 제시하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이 어이없는 발언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이것저것 써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는 포괄적인 비판이아니라, 나라고 하는 한 명의 의견표명에 지나지 않다.

아마 내가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한 10년쯤 전에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의 <종군위한부>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어서, <위안부>문제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기는 있다는 수준이었던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나>는 대학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너무 약하게나마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에 참여했었다. 참여했다고 하면 너무 열심히 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리 열심히 했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었으며, 단지 같은 지역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분들과 함께 적으마나 무언가를 했었다는 정도이다.

그런데 왜 그런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가는 것이 나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지금은 사기꾼 같이 미끄러운 말투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이만, 그런 미끄러운 설명을 지금에 이르러서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읽기 쉬운 구성을 가질 수는 없겠을 것이다. 복잡하게 얽힌 내 심정을 왔다갔다 하면서 기술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기에 쓰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많지 않아, 어떤 의미에서 고백을 통한 자기 내면 만들기(푸코<성의 역사 1권>에서의 그것)에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에 처음 참여하게 된 계기는 <피해 여성을 모셔서 증언집회를 하니까 같이 하자>는 권유가 있어서 따라간 것이었다. 그 때 무엇을 생각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한번만의 일이 아니었으며, 그 때부터 지속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 내가 이 운동을 하고 있는가는 것은 항상 물음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잘 기억에 안 나온다. 그런데 나는 그 시민운동에 참여해서 사상적으로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내 속에 어떤 것들이 바뀌면서, 나는 계속 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운동에 참여하면서 항상 자기가 바뀌고 있기에 항상 운동에 참여할 이유도 바꾸었다고 보는 게 적당할 것 같다.

처음은 역사적인 문제라든가, 전쟁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일본정부라든가, 그러한 것에 대해 항의를 해야 한다는 정의감도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내가 운동에 참여한 동기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는 피해여성과 직접 만났다는 것도 운동에서 빠지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역시 운동에 계속 참여한 이유로서는 모자랄 것 같다. 그러면 왜 <위안부>문제를 다루는 운동에 참여했던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운동을 하면서 밖에 자기 스스로의 폭력성과 사귈 수 없었다>는 것이 지금 깔끔하지 않는 이 글에서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이에 대해 지금부터 설명을 하겠다.

<자기 스스로의 폭력성>이라고 썼지만, 그리 어렵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이것은 <해석>이라기보다는 <체험>을 통해 알았다고 하는 게 설명으로는 적당할 것이다. 내가 들어간 대학교는 페미니스트가 많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고전적인 학생운동 스타일을 가지며, 몇 살쯤 먹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전공투 스타일 활동가들도 살아남고 있었지만, 어쨌든 간에 내가 다니던 학교는 페미니스트가 많았다. 그런데 내가 학생운동 주변에 다가가면서 처음 페미니스트 활동가한테 들었던 말은 <남자는 설거지를 해라>는 말이었다. 당시 새내기였던 나로서는 무순 뜻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위안부>문제에 관한 책 한 권 정도는 봤고, 그리고 <공산당선언>아나 맑스의 책 몇 가지 정도는 읽어본 적 있었던 나였지만, 페미니스트 활동가한테 많은 비판을 받았다는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나는 전혀 젠더나 그런 것을 몰랐던 바보였다고 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지만, <바보였다>는 말로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설명으로서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왜 나는 바보가 되었으며, 그러면서 왜 자기 자신이 바보였다고 깨달을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 어떻게 내적 변화를 겪었는지에 대해서 써보는 것이야, 아마 설명이 될 것이다. 나는 이론이나 그런 방식으로 교육 받던 게 아니라 <설거지해라>는 말로 무언가를 얻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자세히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미담인 것 같은 설명이 되어버렸지만, 어쨌거나 <설거지를 해라>는 말은 나에게는 힘든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일본 사회에서 보통 남자로서 산다는 것은,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성폭력을 하면서 산다는 것일 수도 있다(물론 한국에서도 그렇겠지만 여기에서는 일본의 이야기만을 하겠다). 내가 보기에는 성폭력은 악질한 사람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취급되는 사람도 항상 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별로 큰 문제도 없이 일본인 남자로 성장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설거지>를 들을 때까지 몰랐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일본인 남자로서의 입장에서 빠져나갔다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입장에 있으며, 혹은 자유롭고 성폭력을 가하지 않는 입장에 썼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말할 수 없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이 문제는 나의 옆에 수반할 것이다. 그러니까 억지로 극복하거나 외면하거나 할 수 없는 문제이며, <사귀다>는 말이 적합한 표현일 것 같다.

혹시나 내가 이론으로서 페미니즘에 접했었다면, 이렇게 페미니즘에 대한 힘들음이 없었을 수도 있다. 왜냐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피하면서 <공부>로서 체득할 수 있었을 터이니까. 그런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에게는 페미니즘은 압도적으로 <체험>으로 다가온 것이며, 처음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내가 다니던 운동권 주변에서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려는 분위기가 많았고, 남/여 라는 틀을 가지고 논의할 것은 공격의 대상이 되는 일이었다. 일본어의 일인칭은 남녀로 쓰는 말이 다르단 것을 아실 분도 많이 있겠지만, 내가 다니던 데의 분위기로는 그런 것도 별로 교과서대로 쓰지 않았으며, 어떻게 해서 기존의 질서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 일상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의미에서 대학 생활에서 내가 배운 것은 일상의 운동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는 물론 페미니즘이 들어있었다.

나는 <보통 일본인 남성>이라는 입장을 별 의문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대학 시절 생활 측면에서 많은 비판들을 받았다. 설거지도 그 중에 하나였지만, 어쨌든 간에 1학년 때는 많은 야단들을 맞았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른 애매한 학교 친구관계 같은 것보다, 확실하게 무언가가 있어보았으며, 강력한 의지를 갖고나, 실천을 해온 사람들과 나는 가까이에 있었으며 멀어지는 일은 없었다. 가장 나에 대해 야단들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나에게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친구들 사이에 있어서야, 겨우 나는 페미니즘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기 시작했다는 그런 기억을 갖고 있다.

나는 동경에 없었기에 내 주변에는 큰 운동이 없었으며, 그러하기 때문에 각종각양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 중에 하나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운동이었다. 나는 조끔씩 페미니즘(이즘이라고 할 정도의 지식이 나에게는 없었지만)을 체험하며, 배우면서 동시에 <왜 내가 이런 운동을 하고 있는가, 하고 있어도 되는가>는 의문을 거듭 안아본 적이 있다. 친구한테도 <남자로서 그런 운동에 참여하기가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도 몇 번 받았다. 사실 위안부제도를 공부하면 할수록, 혹은 페미니즘 책을 보면 볼수록, <위안부>문제 에 관한 운동에 참여하기가 힘들기 시작했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남자로서의 전체성을 파괴당할 일이었다. 현재의 나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쓸모없는 남자 전체성이었다고 강하게 그리고 확실히 말할 수 있으며, 파과당하서 오히려 좋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때는 오로지 힘들었다. 그리고 위안부제도를 공부하면 할수록 피해 여성을 강간한 자의 대부분은 별로 악질하지 않는 남자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피해여성의 증언을 듣거나 증언기록을 읽을 때는 아주 끔찍한 병사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반면 가해 당사인 일본인 병사들의 기록을 보면, 가해자는 아무렇지도 않는 보통사람이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공포였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여기에 내가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했었던 이유가 있었다. 물론 일본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수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지만, 개인적인 과제는 이러한 것이었다.

힘든 일이었다고 지금 생각하면 말할 수 있다. 왜냐면 스스로가 가해자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 드는 게 당연할 것이었다. 그 운동은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운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나(같이 해온 사람들은 과거 자기희생 운동을 진심으로 반성해온 분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힘든, 어떻게 생각할 수 도 없는 그런 시절이 나에게는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도망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선언을 해버리면 다시 남자로서의 삶에 돌아가서 소위 <보통 일본인 남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다른 친구들한테 사상을 개조 당했던 것 같다.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보통 일본인 남자>입장에 썬다는 것은 위안소의 줄에 서는 남자의 줄에, 나 역시 선다는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해자 입장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않기에는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계속 상각했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는 너무 깔끔하게 썼다고 느끼지만.

너무 길어져서 정리를 이제 해야겠지만, 첫 부분에서 말하던 어떤 일본 정치인의 말, <위안부제도는 필요했다>는 말은 나에게도 역시 너무 뻔뻔스러운 말이라고 느껴졌다. 왜냐하면, 내가 힘든 과정으로 겪으면서 가지게 된 무엇인가를 완전히 부정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순간, <나도 위안소에 줄 설 터이니, 너도 같이 줄 서라>는 말이 포함된다는 의미다. <할 수밖에 없다>는 말 자체가, <해라>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몰론 이 발언에 대해서는 여성들이 항의한 내용에 동의하면서도 남자 입장에서 무엇이 화가 나느냐에 대해 써보고 싶어서 이런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는 <보통 일본인 남자>는 일본인 남자의 대부부일 것이다. 이는 우익이든 좌익이든 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있거나 상관없다. 자기 스스로의 남자임에 대해서 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나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너는 남자를 버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보통 일본인 남자>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벗어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자신의 남자임을 부정하면서, 계속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일이 없으면, <보통 일본인 남자>의 강한 인력(引力)에 말려 버릴 것이다. 마치 이번에 <위안부제도는 할 수밖에 없다>는 정치인의 말이 그것이다. 그런 말이야 말로, <보통 일본인 남자>들을 위안소에 줄 서게 만든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산다는 의지가 어떤 회로를 통해야 했는지에 대해서, 여기에서는 쓰려고 했다. 물론 이런 내 견해에 대해, 그 때 <설거지를 해라>고 했던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같은 내용의 글을 일본어로 쓸 자신이 없다. 이 의미에서 한국어로 쓴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도망인데, 일단 이 글을 던져보겠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