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6호] 우리 동네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육아일기: 매이데이

우리 동네

“그런데, 아이 키우기에는 위험하지 않을까?” 매이 낳고 얼마 안 돼 아내의 친구가 집에 놀러와 함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동네 자랑을 한참 하는 아내의 말에 그 친구가 대뜸 저렇게 대꾸했다. 나는 “글쎄요”, 하고 얼버무렸지만, 똑 부러지게 반박해 줄 걸 그랬다.

용산구 후암동 종점 옆의 지금 집으로 이사온 건 임신 7개월 무렵이었다.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면서 아내 옆에 있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고 또 출산 후에도 아내와 함께 육아를 책임지려면 연구실 옆으로 이사 오는 게 좋을 성싶었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기동성’은 물론, ‘서식지’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생태계를 이룬 곳이었다.

강남으로 치자면 ‘골목’에 해당할 자그마한 삼거리에는 은행, 약국이 세 곳, 가정의학과의원, 치과의원, 문방구 세 곳, 보습학원 세 곳, 어린이집, 철물점, 전파사, 핸드폰 대리점, 사진관, 상당히 큰 규모의 마트 세 개, 싸고 맛있는 횟집, 기막히게 맛있는 떡볶이와 튀김을 파는 분식집, 김밥천국, 가격 대비 훌륭한 동네 치킨집, 숯불갈비집, 떡집, 정육점, 80년대 양품점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옷가게, 화장품 가게, 몇개인지 알 수 없는 미용실 등등 없는 게 없다. 과연 저런 가게들이 모두 장사가 될까 싶은데도, 해방 후 자리잡은 토박이들과 미군부대 관련 외국인들과 군무원, 거기에 우리처럼 도심에서 가까운 적당한 가격의 빌라를 찾아 깃든 이주민들이 꽤 탄탄한 내수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거미줄처럼 형성된 좁디좁은 골목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차가 없는 집이 많아서, 왠만한 것은 다 동네에서 해결하기 때문이리라. 최근에도 이 골목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솜씨 좋은 맛집과 작고 예쁜 원두커피집 등이 새로 생겼다. 거기에 서울에서 가장 경치 좋은 도서관인 남산도서관과 가장 시설 좋은 어린이실을 갖춘 용산도서관이 걸어서 10분 거리이니, 강남 도곡동인들 이보다 더 좋을 쏘냐. 

아내 친구의 말은 버스 종점에다가 소월길로 이어진 후암동길을 이용하는 택시와 승용차가 많고 신호등도 없어서 아이한테 위험할 것 같다는 얘기였는데, 내 생각엔 길이 좁고 신호등도 없고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게 오히려 자동차 속도를 줄이고 인명사고도 줄이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예전에 베트남에 여행간 적이 있었는데, 아직 개발이 안돼서 자동차, 자전거, 시클로, 오토바이, 행인들이 뒤섞여 있는 하노이의 혼잡한 거리에서는 인명사고가 거의 없다고 한다. 하긴 자동차 속도가 시속 40Km를 넘지 못하는 길에서 무리지은 행인들이 차에 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서울 도심처럼 도로가 정비된 호치민시의 거리는 자전거도 없고 신호체계도 완비되어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인명사고가 급증했다고 한다.

놀이터와 주차장과 도로가 금과 벽과 CCTV로 구획된 아파트 단지와, 사람들의 시선과 이질적인 유체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느린 흐름을 만들어낸 우리 동네 중 어느 쪽이 안전할까? 그건 서로 다른 종들이 복잡계를 이룬 숲과 잔디뿐인 골프장 중 어떤 생태계가 더 안전할까, 라는 질문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 동네엔 유독 노인들이 눈에 많이 띤다. 담벼락에 작은 천막을 치고 자기네들끼리 반찬거리를 다듬어 파는 할머니들도 있고, 마트 옆에서 상주하며 박스를 모우는 할아버지도 있다. 이 동네에서 노인들은 아직 비가시적으로 추방된 존재가 아니라, 미생물처럼 마을 생태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삼거리에는 호떡노점 일을 돕는 다운증후군 청년도 눈에 띈다. 가끔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씩씩한 표정으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제 할일을 한다. 마트 배달원 중에는 필리핀 신부와 결혼했다가 신부가 도망갔다며 보는 사람마다 투덜거리는 썩 ‘명민하지’ 못한 아저씨도 있다. 어쩌냐고 했지만 다 잊고 돈 벌어 또 얻으면 된다며 오늘도 오토바이를 달린다.

매이는 생후 한 달 반 지나자마자 집밖에 나왔다. 매이를 슬링에 넣어 품에 안은 채, 책가방은 등에 지고 연구실 가려고 백팔 계단을 올라갈라치면 어김없이 계단 중간쯤에 앉아 있던 할머니들이 “그거 뭐냐”며, “에쿠 강아지인 줄 알았네”, “애 모가지 아프겠다”, “애 엄마는 어쩌구”, 하며 품속의 매이를 얼르곤 했다. 그렇게 가방 매고 매이 안고 집과 연구실을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마을 사람들한테는 캥거루 아빠로 알려졌다. 혼자 걸어가면 꼭 “애는” 하고 물어 보고, 지금도 매이 손을 잡고 나서면 “아이구, 그 원숭이처럼 매달려 다니던 게 이렇게 컸다”며 아는 채를 한다. 특히, 박스 줍는 할아버지는 매이만 보면 “어디가?”라고 큰 소리로 묻는다. 좀 험하고 남루한 인상이라 처음엔 무서워하더니 이제는 “아빠랑 가게 간다~” 라고 꼬박꼬박 말대답을 한다.

가끔씩 주말에는 몽이 운동도 시킬 겸 유모차에 개 끈을 묶어서 끌게 하고 남산공원에 산책가곤 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개가 밥 값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개 학대한다” 라며 ‘개마차’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며 신기해 했다. 연구실에서는 범보 의자라고 바퀴달린 유아용 의자에 끈을 묶어 끌고 다녔는데 사람들은 꼭 개 끌고 다니는 것 같다며 놀렸는데, 매이는 그 스피드를 꽤나 즐겼다. 공부방이며 까페며 복도를 이리 저리 끌고 다니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책을 읽고 있으면 매이는 허깨비처럼 어깨를 들썩이고 손을 휘저으며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느라 분주했다.

나는 매이가 살균 처리된 청정구역이 아니라 이질적인 존재들의 공동체 속에 있을 때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어제는 ‘빈집’에 사는 (인도 아빠와 한국 엄마 사이의) 뚜리랑 놀다 왔다. 집에 와서는 연신 “뚜리는 눈이 똥그래” 한다. 3년제인 지금의 어린이집을 수료하는 내년에는 중중장애아시설과 고아원과 한 울타리에 있는 어린이집(현재 고추장의 딸 유나가 다닌다) 보낼 생각이다.

– 매이 아빠

응답 7개

  1. 돌석말하길

    인터넷 검색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본 후암동에 대해서 쓴 글 중에 가장 좋은 글이라 감히(!) 스크랩해봅니다.

    이 동네에서 몇 년은 살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아서 벌써 아쉽네요.

    매이 예쁘게 잘 크길 바랍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2. 매이엄마말하길

    고미숙 선생님 팔 물고 있는 매이의 사진은 정말….강아지 같군요. 범보의자 타고 다닐 때 매이는 낮은 포복 상태로 기어다는 상태라 강아지랑 눈높이도 같고, 뭐든 입으로 가져가 빨고 핥고…사람 먹는 식사랑 전혀 다른 자기만의 식사(이유식, 사료?)먹고…암튼 강아지에 더 가까왔더랬지요.

  3. 박혜숙말하길

    매이는 무지 유연한 감성과 신체를 가진 아이로 쑥쑥 자랄 것 같아요. 이제 제법 숙녀티가 나지만. 무궁무진한 이야기, 앞으로도 쭉 이어주세요!

  4. 둥근머리말하길

    지당한 말씀이고, 절실한 얘기인데요… 읽으면서 왜 자꼬자꼬 웃음이 나오는지요.ㅋㅋㅋ 왜 자꼬 그림이 그려지는지 참..ㅋㅋ

  5. 영은말하길

    저도 이 동네 예전 살전 목동 보다 인간적이라는 데 동의해요! 아랫층에 개가 하도 짖어 따질려 아랫층 주인이 한다는 과일가게 가보니… 그게 바로 오거리 제 단골집이더라구요. 아~ 그 후 그 개 가게에서 기거하는 모양이던데. 과일도 못사먹으로 가겠고… 착하게 살아야해~ 둥굴게 둥굴게 살아야해~ 를 몸소 느끼게 하는 동네란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매이를 안고 약국에 들어선 매이아빠를 보고도 막 손 흔들고 싶은! 다정한 동네입니다요

  6. 동건이형말하길

    안전성을 숲과 골프장에 비유하시다니, 거 참 멋진 비유십니다.^^

  7. 보석말하길

    이질적인 존재들 속에서 오히려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말에 공감이 가네요..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건 아이에게도 주체적인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다양한 이질적인 숨소리들이 공존하는 공동체 안에서 살 때 가능한 것이기도 할 듯..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