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일본 여행기 – 사이보그의 발견

- 이상욱

몇 개의 발견은 지루했던 오사카에서의 일주일을 좋았던 기억으로 남게 해주었다.

발견1. 분라쿠

계획에 없던 여행이라 여행계획도 없었던 나는 무료했던 며칠을 보내고 분라쿠 극장에 갔다. 분라쿠는 주로 무사, 서민, 무용 등을 제재로 삼는 일본식 인형극이다. 내가 본 것은 그중 한 무사와 그의 여인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 했기 때문에 내용에 관해선 자세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무능은 외려 내용에 몰입했다면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극에 설정된 기초적인 요소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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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눈길을 끈 것은 인형을 움직이는 인형술사의 위치였다. 많은 인형극의 인형술사가 무대 뒤에 몸을 숨긴 채, 실이나 끈, 나무막대 따위로 원격조종을 하는 것과 달리 분라쿠의 경우 인형술사들은 인형의 바로 뒤에 붙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옷과 검은 복면으로 제 모습을 은폐했지만 그것은 정말로 은폐에 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은폐되어 있지만 분명 존재하는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한 제스처인 것처럼 보였다. 또, 하나의 인형이 여러 명의 인형술사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것도 분라쿠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인형이 갖게 되는 ‘생기’는, 얼굴의 표정, 팔의 움직임, 다리의 움직임 그리고 목소리를 담당하는 네 명의 인형술사에 의해 부여받는 것이었다. 즉 여러 명의 인형술사의 정교한 협동으로 하나의 인형의 생명과 행동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발견2. 어떤 사이보그, 카메라-인간

“사이보그는 유기체와 기계, 혹은 생명과 기계라는 거대한 균열을 처음부터 가로지르며, 그 균열에 의해 분할된 것들을 ‘하나로 모은다’. 유기체와 기계가 결합되어 ‘하나처럼’ 작동할 때, 그로써 하나의 효과/결과를 산출할 때, 그처럼 ‘하나의 개체로’ 활동할 때, 우리는 하나의 사이보그를 발견한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172쪽)

나는 어떤 사이보그를 발견했다. 그 사이보그는 나인 동시에 그 전의 나와는 다른,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난 어떤 사이보그라 불러야 마땅한 이였다.
그와의 만남 역시 무료함에 의해 성사된 것이었다. 목적지 없이 숙소 주변을 배회하는 중이었지만, 오사카의 풍경에는 어떤 이국적인 정취도, 흥미를 끄는 볼거리도 없었기에 그저 무료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내 옆으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갔다. 별다를 것 없는 그 풍경이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매혹적이었다. 머릿속에선 그것을 촬영하라는 누군지 모를 이의 명령 같은 것이 내려졌다. 그렇게 나는 카메라를 꺼내 자전거 탄 남자의 영상을 촬영했다. 동영상의 내용 또한 특별할 것 없이, 자전거 탄 남자가 프레임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 그리고 뒤따라 다른 몇 명의 행인들이 지나가는 것으로만 구성됐을 뿐이다. 그러나 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내용을 가진 영상은, 뤼미에르 형제가 찍었던 초단편 영화들을 상기시켜 기분이 좋아지는 계기가 됐다.

짧게는 1분, 길게는 3분에서 5분 정도의 길이를 갖는 이 짧은 영화 촬영에 재미가 들린 나는 그렇게 한 나절을 보냈다. 신호등에 걸려 정지해 있던 자동차들의 출발, 공원 연못의 붕어들, 더위를 식히려 바닥에 물을 뿌리는 경비원 등의 모습은 더 이상 무료한 풍경이 아니었다. 카메라가 선택한 프레임과 앵글 속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법 같은 일이었다.
마법은 카메라와의 결합으로 인한 어떤 사이보그가 된 경험, 어떤 사이보그와의 만남의 경험이었다. 카메라와 인간의 결합이 만든 어느 다른 존재, 즉 결합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을 보는, 인간과는 다른 질을 갖게 된 카메라-인간이라는 사이보그. 무료하기만 했던 일본의 일상적 풍경은 카메라-인간이 선택하고 절취한 프레임과 앵글로 인해, 그의 지각에 의해 일상에서 외면된 어떤 가능성들이 발견되는 비밀의 시공간이 된 것이다. 더 이상 참고 견뎌야 했던 인고의 풍경이 아닌 기대와 설렘으로 충만한 가능성의 풍경. 그것이 카메라-인간이 개방한, 카메라-인간에 의해서만 개방될 수 있었던 풍경이다. 카메라라는 인형술사와의 결합으로 인해, 거기서 개방되는 영화라는 효과로 인해 비로소 나의 눈은 그 풍경에서 기대와 설렘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인형술사들과 인형

하나의 분라쿠 인형은 여러 명의 인형술사에 의해 움직인다. 단일한 제스처로 보이는 것은 은폐된 복수의 요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요인들의 변동과 다른 것으로의 대체에 의해 그것은 변화한다. 즉 인형술사의 다른 움직임 혹은 다른 인형술사로의 대체는 인형에 다른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이다. 인형술사의 변화는, 인형술사의 다른 움직임과의 접속은 곧 인형의 다른 삶을 의미한다. 다른 삶을 살게 된 인형. 그는 이전과는 다른 시청각을 갖게 된 것이기도 하다.
인형은 언제나 인형술사에 의해, 그를 움직이게 하는 그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삶을 살 수 있다. 인형술사 없는 인형의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인형술사 없는 인형의 삶이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인형술사는 인형의 삶의 조건인 것이다. 인형의 삶은 오직 움직임의 변주와 다른 인형술사로의 대체만으로 이뤄질 뿐이다. 즉 그것의 삶은 언제나 다른 것과의 결합으로 구성되는 것, 즉 사이보그의 삶인 것이다. 일본의 무료한 일상이 내게 준 선물, 그것은 사이보그의 발견이며 동시에 사이보그가 발견한 것이었다. 사이보그로서만 살 수 있는 삶. 그것은 다른 사이보그의 변신, 이동만을 통해 기쁨이 될 수 있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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