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NOTE ROUGE (레드 노트)

보미의 레드 노트

- 이보미

음악을 주제로 한 글쓰기는 내가 늘 바라왔던 작업이다. 곡을 쓰는 것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응?) 글을 쓰는 일에 애정을 품고 있다.
보미의 레드 노트. ‘노트’는 ‘음’을 의미하고, ‘레드’는 열정, 앞서 나아감을 나타낸다. ‘레드’라는 형용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지만, 여러 의미를 풍성하게 담아낼 수 있는 적절한 수식어를 찾지 못했다. 소리를 표상하는 음에 색깔이라는 성질을 덧붙이려는 의도는, 공감각을 연상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다.

내게 작곡이란 고2까지만 하더라도 처음에 제시된 주제에 따라 변형과 발전을 거듭하여 예쁜 선율을 뽑아내는 것, 절과 단락에서 적절하게 종지를 맺고, 곡에 진행감을 주면서 감동을 줄 수 있는 화성을 입히는 것. 특징적 선율과 특유의 화성의 조화. 이것이 작곡의 전부였다. 고3 시절엔 소나타 양식이 갖는 형식미에 깊이 빠져들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줄곧 고전 낭만 악곡들을 들으며 형식적으로 분석을 하고, 1주제와 2주제 혹은 심지어는 3주제까지 서로 대립하는 주제들끼리 갈등하고 화합하는 과정을 거듭하며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여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것에 소름 끼치도록 감탄하곤 했다. 음악이 하나의 드라마를 일구어 내는 것. 음악적 감동의 원천은 드라마라고, 그것이 전부라 여겼었다.
물론 드라마가 불러 일으키는 짙은 서정성은, 그 감동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매우 강력하다. 대개 사람들은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는 음악에서 감동을 받는다. 가슴을 후벼 파는 듯이 아려오는 감동은 클라이맥스에서 선율이 최고조를 이루며 포르테시모(ff)로 다이내믹이 가장 크게 터질 때 비로소 절정에 다다른다. 한국 전통음악(민속음악)에서도 밀고 달고 맺고 푸는 구조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으’ 하는 추임새를 넣고 싶게끔 자극한다.

하지만 현대음악은 고전적인 서사구조와 유사한 이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맛과 멋을 제시한다. 소리로 펼쳐지는 세계에서 훨씬 드넓은 영역을 자랑한다. 양식면에서 구조면에서 훨씬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곧바로 현대음악을 부지런히 탐색하지는 않았다. 다른 학문이 점차 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대음악이란 것에 영 흥미가 일지 않았다. 나는 참 특이하게도 음악학 논의들을 접하고 그러한 문제의식을 지니게 되면서, 그리고 탱고 음악과 재즈를 -무려 대중음악을(!), 물론 획일적으로 상품화된 것들과는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거리를 두었다- 즐겨 들으면서 점차 현대음악에 귀가 트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줄곧 음악을 해왔던 내게도 현대음악이란 장벽은 꽤 높았던 모양이다. 정말 듣기에 매력적인, 좋은 곡들은 메인스트림을 중심으로 기술된 음악사 문헌에 가려져 있었고, 음원을 쉽게 접할 수 없었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음악에 대해(about) 기술한 많은 글들에서 음악적인 문제로 철학자와 인문학자를 유혹할 때 주로 음악 외적인 논의들을 많이 끌어온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음악과(with) 결합하게 되는 텍스트, 플롯, 드라마, 재현, 표현 등의 문제를 자주 언급한다. 그리하여 철학자와 인문학자에게도 음악에 대해 논의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언어, 의미, 인식론, 심리철학과 직접 관련돼 있기에 그들이 전문성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끌어내어 음악적 논의의 장을 형성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현대음악에 관심을 갖고 많은 곡을 들어보도록 자극을 줄 수 있을까. 모더니티에 초점을 맞추어 어떠한 시대 상황에서, 어떠한 사회 구조 속에서 어찌하여 그런 음악이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면 적절한 방법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음악을 사회와의 연관성, 타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음악을 사회문화 현상의 하나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음악의 사회성을 간과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쪽은 내가 잘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실은 나의 관심사에서 빗겨나 있다. 내겐 다른 사람들의 수요에 걸맞는 화제로 사람들을 낚는 재주가 없다. 그저 내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 신나서 마구 떠들어대는 수밖에.

나는 음악이 오로지 음악 내적으로 의미(의미론에서 연구대상으로 삼는 ‘의미’가 아닌)를 지니리라 믿는다. 음악은 오로지 음악적 용어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의미론적·재현적 내용이나 의미도 갖지 않으며, 음악 외부의 그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음악의 내용은 정서적 표현이 아니다. 자율적 형식에 내재한 패턴, 질서 또한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음악의 정서적 표현의 가능성을 아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음악도 다른 표현 체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활동이기에,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 그것의 직관적인 느낌, 그로부터 파생되는 정서와 여하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음악을 들으며 몇몇 음악이 특정한 정서를 표현한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지각과 인식능력이 만들어내는 환상일지 모르겠다. 우리 안에 선험적으로 내재된 형식이 소리의 현상을 주조하는 것일지..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 소리의 질과 제스처와 텍스처만으로 충분히 자생성을 갖는다. 이것이 나의 순수음악의 이념이다. 나의 몹시 드센 이 이념에 따라 소리의 가능성, 그 조합의 가능성, 그 구조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곧 작곡 활동의 근본적인 원동력이 된다.
우리가 예술을 찾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일상적 체험에서 벗어나, 무언가 다른 경험을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현대음악은 일상에 억눌려 무뎌진 우리의 감성을 일깨우고, 개개인의 특유의 감성과 길들여지지 않은 새로운 미감을 자극한다.
예술 애호가들이 한 번쯤은 현대음악에 호기심을 갖고 스트라빈스키, 바르톡, 쇤베르크, 쇼스타코비치 등을 들어본다. 그리고 매력적인 작품을 채 접하기도 전에, 더욱 최근으로 거슬러 올라오기도 전에 곧 흥미를 잃고 그만두곤 한다. 엄밀히 말하면 위에 언급된 작곡가들의 곡들은 근대음악이다. 현재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1960년대 이후부터를 본격적인 현대음악으로 본다.

이 연재의 목표는 1960년대 이후의 곡들, 그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곡들을, 그야말로 감상하기에 좋은 곡들을 소개하는 데 있다. 가능하면 2000년 이후에 작곡된 작품도 소개하고 싶다. 모두가 들어볼 수 있도록 YouTube에 음원이 있는 곡 위주로 소개하려고 한다. 작품 소개와 더불어 나의 주관이 강하게(웃음) 담긴 평가와 음악미학·음악철학·음악심리학과 관련한 나의 단상들을 함께 이야기하려고 한다. 음악사조 중심으로 혹은 작곡가 중심으로 연재할 예정이다. 한 곡을 집중적으로 파헤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그러자면 full score를 놓고 낱낱이 분석해야할 텐데 악보에 저작권이 걸려 있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한 사조의 대표곡을 이야기하면서, 어느 한 작곡가의 작품을 언급하면서 스코어의 일부를 약간 제시할 수는 있겠다.

음악 전문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이는 간단한 설명을 각주로 달거나, 쉽게 설명해 놓은 유익한 글의 링크를 거는 것으로 보완하려고 한다. 이 연재를 통해 가치가 높은 작품들을 널리 알리고 사람들을 매혹시켰으면, 사람들이 기존의 한정된 영역에 갇혀 있던 음악적 미감을 한껏 열어 제치고 음악을 새롭게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응답 4개

  1. 묘미말하길

    음악학 세미나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설레던 생각이 나요.

    항상 음악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어요.

    잘 알지 못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그렇지만 호기심이 있던 현대음악을 조금이나마 가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어요.

    지금까지 저에게 음악이란 제가 느끼는 여러 감정+감각+생각등등의 소용돌이를 대신 표현해주는 그런 것이었어요.

    느낌과 감정의 결정체라고 생각했죠. 음악을 들으면 없던 느낌도 살아나고, 있던 느낌도 풀어져나가 다시 내게 들어와 다시 내가 느낄수 있게 해주었으니까요.

    음악을 들으면 언제나 음악이 마약처럼 내 몸에 들어와 핏줄을 타고 내 심장으로 몸으로 퍼져, 느낌이나 움직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어요.

    음악학 세미나는 (저에게)
    저와 한번도 떨어져본적 없는 그 관점을
    제가 잠깐이나마 벗고 다르게 생각해보게된 계기가 되었어요.

    더불어 소개해주신 음악, 평소에 관심이 많지 않거나 듣고 싶어도 알지못해 못들었을 음악들을 좋은 스피커로 (저희집보다 엄청 더 좋죠) 집중해 감상하고,

    거기에 덧붇힌 작곡가나 연주, 음악구조에 관한 지식들.
    그런걸 알게 될때 순간순간 짜릿하기도 했어요.

    알면 알수록 조금씩 맛을 알아나가는 것 같은…

    그리고 저에겐 음악을 감상하거나 음악이야기를 할때 보미님의 표정이나 제스쳐 또한 음악과 함께 큰 기쁨을 주어요.

    그걸 보면 저도 그 음악을 통해 더 많은 걸 느끼고 싶어져요.

    진도도 있고 해서 이야기를 많이 못하는 부분이 아쉬웠는데
    이 칼럼을 통해, 보미님의 방식으로 풀어나갈 음악이야기가
    넘 기대가 되요.

    ^.^ ♥

  2. 이힝말하길

    음악에 관련된 책 찾아보면 너무 어렵거나 음악 이외의 요소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읽기 어렵던데

    음악을 음악 그 자체로! 접근하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현대음악을 접할 수 있게 글을 써주신다니

    기대돼요!ㅎ

  3. menestrello말하길

    절대음악이니 표제음악이니 이론적으론 나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겠지만, 듣는 이의 입장에서 그 순간만큼은 음악은 듣는 이의 것이고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개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모든 음악을 절대음악으로 간주하고 감상해왔습니다.
    어떤 음악에서 감동을 받고 그 곡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싶어지게 되어서 그제서야 가사를 뒤적여 보고 작품 배경도 찾아보고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곡가가 곡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던지간에 실제로 그 느낌이 와닿는 경우는 거의 없더군요.
    그냥 나름대로 상상을 해보지만 그 어떤 연관관계도 찾을 수 없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느낌…
    결국 다시 예전처럼 보컬을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가 포함된 순수한 음악만 감상하게 됩니다.
    오죽하면 한참 푹 빠져서 들었던 곡의 제목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 이건 병인가요? ;

    프로그레시브 락이니 핑거스타일이니 나름 실험적인 음악들을 많이 접해왔다고 생각해왔었는데 막상 접한 현대음악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니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큰가봅니다.
    집중해서 들어도 보고 그냥 틀어놓고 무한반복도 해 보기를 여러번, 그러기에도 지쳐 조금씩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하는 딱 그 단계가 아닌가 한번 생각해 보게 되네요.
    너무 욕심을 낸 탓인가봅니다. 우선 조금씩 귀에 들어오는 음악들을 찾아서 듣다 보면 조금씩 귀가 트이겠죠.

    “그야말로 감상하기에 좋은 곡” 기대가 되네요 ^^

  4. choonghan말하길

    “음악을 음악 그 자체로.”

    오직 소리의 질과 텍스처라는, 그 느낌을 어떻게 글로 전달할 수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기대되는 연재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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