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그리고 싶은 것>(2013) 리뷰

- 권은혜(수유너머N)

그리고 싶은 것

 

권효 감독의 <그리고 싶은 것>은 한·중·일 평화그림책 프로젝트에서 위안부를 소재로 택한 권윤덕 작가 그림책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지난 8월 15일 광복절에 개봉을 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할머니들이 늘어 가는 현실을 알리고 호소하는 데 힘을 싣고 있다.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 문제의 국제사회화를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 의해 1991년 8월 14일 처음으로 가시화 되었다. 이후 할머니들의 투쟁과 삶은 독립 다큐멘터리인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1995~1999) 시리즈, 안해룡 감독의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7) 등과 KBS 다큐멘터리 “수요집회 20년, 끝나지 않은 전쟁”(2012년 방영) 와 같이 독립 다큐멘터리와 방송 다큐멘터리를 넘나들며 꾸준히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올해도 일본 정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어김이 없었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한 시의 수장으로부터의 망언이 나돌망정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묵묵부답은 여전하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는 일베와 같이 극우를 자칭하는 세력들을 제외하고서는 공통적으로 공감하고 동참하는 운동이다. 그런 만큼 <그리고 싶은 것>에 대한 리뷰들도 위안부 문제와 연관한 것들이 많고, 아직까지도 일본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있는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 「꽃할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계속해서 돌아가시고 계신 할머니들에 대한 애도가 대한 것이 많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이를 수용하는 관객이 일차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주요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부분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권윤덕 작가가 심달연 할머니를 거의 100%의 감정이입과 지지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권윤덕 작가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감독의 카메라를 보았고, 이로부터 시작된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권윤덕 작가의 모습에 대한 나의 뒤섞인 감정에 대해 써보려 한다.

 

2007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중일 평화그림책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권윤덕 작가는 과거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를 겪은 심달연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기로 결정한다. 이 같은 결정에 대해 일본 측 그림책 작가들은 그 자리에서 감동을 받았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일본 여성작가는 그 결정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고 고백한다. 까닭은 종군 위안부는 일본 내에서도 여러 운동이 있지만 그럼에도 일본이, 일본 정부가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이 여성 작가는 카메라 쪽을 쳐다보지 못하는데, 이는 평화그림책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공감하는 일본 측 입장에서도 위안부 문제는 결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절반의 지지와 절반의 우려 속에서 권윤덕 작가의 스케치는 시작되고, 수백 개의 꽃잎에 수를 놓으며 색을 입히는 그녀의 그림은 일본 측의 요구에 따라 그려지고 수정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그녀의 스케치가 완성되어 갈수록 평화그림책 프로젝트 일본 측에서는 책의 내용이 국가, 역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이야기로 쓰여지길 하는 바람을 노골화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일본의 우익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의 작가와 출판사 측이 모이는 회의가 잡힌다. 회의를 가는 차 안에서 권윤덕 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를 못하게 하는 거랑 마찬가지잖아. 그건 말이 안 되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주제를 바꿀 순 없잖아. 지금에서. 거기서는 개인사로 처리하려 하는 거고 나는 국가를 다루려고 하는 건데 이게 안 부딪치겠냐고. 당연히 부딪치지. … 근데 어차피 내가 하려고 하는 게 그 할머니들을 위한 책을 하는 거지. 내 감상 무슨 이런 거 아니거든.”

 

권윤덕 작가가 말을 쏟아 내는 동안 카메라는 다른 장면들에서처럼 그녀의 얼굴을 곧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흔들리는 카메라가 바라보는 곳은 그녀의 손, 그녀의 입 같이 파편화된 그녀의 모습이다. 다소 격앙된 그녀를 평소처럼 찍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라 짐작이 가지만 나에게는 영화의 다른 장면에서 권윤덕 작가로부터 듣게 되는 고백과 함께 그 의미가 다시 부여되는 장면이었다. 그녀가 하는 고백은 어릴 적 그녀가 겪은 성폭행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래서 (꽃할머니 그림책을) 잘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예상되었음에도 아니길 바랐던)그녀의 고백은 일순간 나로 하여금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섬세한 붓 터치와 정갈한 집 안 풍경, 붓을 씻어 내는 맑은 소리와 종이에 풀을 먹이는 정성이 무색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과한 까다로움 혹은 윤리적 판단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엇비슷해 보이는 고통을 내가 겪어보았다고 해서 그러한 고통을 안고 사는 다른 누군가의 삶에 대해 ‘더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개가 끄덕여질 말인가. 오히려, 그녀의 개인적 고통과 할머니들의 고통이 겹쳐지면서 그녀가 어느 장면에서 말한 “내가 내 감정에 스케치하는 것이 느껴지고”라는 이야기처럼 그림을 그리는 것은 더 힘겹고 복잡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듯 혼란스럽고 증폭된 감정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더 잘’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 두 장면에서 비롯되는 작가 내면의 문제는 자연스레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국 측과 일본 측의 입장 차이로 전환되고, 이는 한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모니터링의 결과-그림책이 무섭고 끔찍한 면이 있고 성폭력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를 권윤덕 작가가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녀 안에서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된 듯이 보였다. 나에게 이러한 전환과 받아들임은 다소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이는 권윤덕 작가에게는 이 문제가 단순히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그림책을 그리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 본인이 했던 말과는 다르게 그녀가 하려고 했던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녀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 두 가지 일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고, 때문에 그녀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양 측의 입장 차와 동시에 그 간극까지도 메워 가야 했던 것이다.

 

권윤덕 작가의 수정한 스케치를 매번 받아 보았던 한 일본 작가는 그녀의 그림이 날로 유하고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수정해 나갔고 완성된 「꽃할머니」는 2010년 한국에서만 출판이 된다. 출판의 결과를 놓고 본다면 「꽃할머니」에 대한 한국 측과 일본 측의 입장은 결코 좁힐 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서 권윤덕 작가가 밝히고 있는, 「꽃할머니」 작업을 하면서 다음에는 성폭행을 당한 아이들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는 그녀가 그녀 내적으로 메워야 했던 또 다른 간극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을 것 같다. 그녀는 「꽃할머니」를 그리고 출판을 하는 지난한 시간들을 보내고서야, 본인이 진짜 “그리고 싶은 것”을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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