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

- 들깨

“화장실에 가봤어요? 변기 옆에 물도 없더라고요. 전에는 안 믿었는데, 맙소사, 그 사람들이 휴지만 가지고 뒤를 닦는다는 말이 사실이었어요!……” –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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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동해안 뿌리라는 도시에서 난 벵갈만의 일출을 보러 새벽 일찍 바닷가로 나갔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해안가를 걷는데 사람들이 잔뜩 앉아서 나와 같은 동쪽 방향을 보고 있었다. 난 그때 현지인들도 일출을 감상하는구나 하며 신기해 했다. 잔뜩 낀 구름 때문에 일출 장면은 볼 수 없었지만 해는 떴고 주변이 밝아진 덕에 난 사람들이 뭘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바닷물이 밀려오는 해변가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장엄해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올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나왔지만 숙소로 돌아갈 때는 뭔지 모를 꺼림칙함을 감내하며 발밑을 조심하며 해변을 걸어야 했다. 이후 나는 ‘똥’에 대한 느낌의 다름에 대해서 종종 생각하게 됐다.

태국의 한 한인 게스트하우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장에서 쥐 한 마리가 내 앞으로 떨어졌다. 마주 앉아 있던 아저씨부터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도망가셨고 쥐가 한동안 로비를 누비고 화장실로 도망가자 10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다 현관 쪽으로 ‘대피’했다. 나 혼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덩그러니 바닥에 남았다. 쥐가 도망갔으니 사람들이 곧 돌아오리라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한참을 현관 쪽에 모여 어떻게 쥐를 쫓아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전문 인력을 부르자, 남자들이 조를 짜자 등등… 다들 진지하게 쥐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내가 그냥 화장실로 들어갔다. 인도에서 10개월을 지내고 온 터라 사실, 화장실에 쥐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도 신기했고 쥐도 인도에서 일상적으로 보던 덩치 크고, 털도 빠지고, 능글맞게 나를 쳐다보던 쥐들과 달리 작고 겁에 질려 보였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바께쓰에 그 쥐를 담았고 되도록 멀리 쫓아 보내라는 사람들의 요청에 숙소 밖으로 한 스무 걸음 벗어나서 쥐를 풀어줬다. 그날 이후로 난 그 게스트하우스에서 ‘쥐 잡으신 분’, ‘상남자’로 소개가 됐다.

앞에 앉았던 아저씨에게 쥐가 무서워서 피하신거냐고 물으니 더러워서 피했다고 답해 주셨다. 애초에 바퀴벌레도 잘 잡지 못하던 내가 쥐를 잡을 수 있게 된 건 아마도 인도와 네팔에서 10개월을 머물다 와서일 거라고 설명했다. 길이나 화장실은 물론이고 숙소에서든 식당에서나 쥐를 쉽게 접했으니 말이다. 애초에 쥐에 그리 민감한 건 아니었으나 밥 먹을 때 앞에서 쥐가 지나가도 신경 쓰지 않고 밥을 먹게 된 건 적응의 결과일 것이다. 쥐 한 마리 잡은 것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굳이 쓴 건, 더러움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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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성지이자 유명한 관광지인 바라나시의 골목 한켠 쓰레기장. 쓰레기장이라고 해봤자 사는 곳에서 그닥 멀지 않고 관리가 특별히 되고 있진 않다. 사진에서 보듯이 소와 개, 염소 등의 동물들이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한다. 바라나시뿐 아니라 인도의 대도시라면 이런 곳을 종종 마주하고 비라도 내리면 하수구가 죄다 막혀 걸어 다니기 찜찜해지곤 한다.

한국에서 말레이시아와 태국을 거쳐 인도와 네팔로 가는 길은 경제 수준이 낮아지는 것이기도 했고 또 나를 둘러싼 환경의 위생 수준이 계속해서 내려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국을 떠난 지 얼마 안 돼서 봤던 방콕의 풍경은 후줄근하고 거리는 전반적으로 지저분한 느낌이었지만 인도를 지내고 돌아와서 본 방콕은 반짝반짝 빛나고 질서정연한 도시였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었느냐에 따라 같은 도시의 느낌이 그렇게 달랐다.

그러니까 한국인의 위생 관념을 갖고 아시아를 여행하는 일은 계속되는 더러움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레이시아나 태국 같은 비교적 선진국에서도 바퀴벌레나 쥐를 보는 빈도가 늘어나고 거리가 왠지 모르게 지저분해지지만 인도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사람들은 쓰레기가 생기는 즉시 거리로 버린다. 음식이 들어 있어도 마찬가지다. 소도, 개도, 염소도, 코끼리도, 낙타도, 길에 똥을 싼다. 사람 똥도 있다. 피해 다니기도 쉽지 않지만 비라도 오면 한데 섞여 첨벙거리고 다니기도 찜찜하다. 손으로 밥을 먹고, 손으로 밑을 닦는 것도 잘 알려진 얘기다. 문명의 요람, 혹은 성지라는 갠지스강. 바라나시의 가트에 앉으면 더러움은 피부로 와 닿는다. 한켠에선 빨래를 하고, 한켠에선 소들이 떼로 들어가 목욕을 하며(물론 똥과 오줌도), 한켠에선 설거지를 하고 한켠에서는 시체를 태워 흘려보낸다. 이곳을 힌두교에선 성스럽다 여겨 하루에 수천 명 수만 명의 사람들이 들어가 샤워를 하고, 물을 마시고, 물을 떠 간다. 흔히 듣는 얘기지만 새삼, 인도는 더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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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의 강가(갠지스 강의 현지 발음)에서 샤워를 하는 소년 랄뚜(좌) 바라나시에 갈 때마다 같이 어울리곤 하는 랄뚜는 매일 두세 시쯤 샤워를 한다. 내게도 같이 하자고 권하지만 강물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쪽에선 소의 오물이, 한쪽에선 설거지와 빨래, 한쪽에선 시체, 그리고 전 영역에 걸쳐 샤워와 종교 의식이 거행되는 하수구 같은 강에서 사람들이 샤워를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신앙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누의 덕도 클 것이다. 오른쪽 사진에선 도비왈라(빨래를 담당하는 카스트)들이 강에서 빨래를 하고 있고 관광객들이 배를 타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 인도에서 난 더럽다고 혼나기도 했다. 바라나시에서 묵을 때 같이 요리를 해먹던 힌두교 사제 같은 할아버지에게 나는 요리 중간에 간을 보려고 음식을 떠먹었다가 혼났다. 음식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음식에 입을 대지 않는다. 웬만한 인도 사람들은 서로의 접시를 공유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된장찌개 냄비에 숟가락을 섞는 것을 보면 그이들은 더럽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한국에서는 개나 돼지를 먹는다고 하면 그이들은 그 더러운 고기를 어떻게 먹느냐며 눈살을 찌푸린다. 농담을 반 섞자면 인도 사람들이 ‘더러운’ 갠지스 강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신앙 때문이라기보단 비누 덕분이라고 본다. 식당에서 밥 먹기 전과 후에도, 강물에서 빨래든 샤워든 할 때든 그들은 비누를 빡빡 문질러 잔뜩 거품을 낸다. 네팔의 한 가정집에서 살면서 그들의 비누 사용량을 보고는 가끔 집을 방문할 일이 있을 때 비누를 선물로 사기도 했었다. 이곳 사람들도 더럽고 깨끗한 거 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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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에서 난 스스로 힌두교 사제인 척하는 분과 친해져 종종 음식을 같이 만들어 먹곤 했다. 그를 구루지(스승님)이라 부르며 처음 보는 야채를 가져가서 요리법을 배우곤 했다. 사진 속 파랗던 야채(위)는 꺼렐라라고 하는 건데 구루지는 이를 기름에 수십 분을 튀겨 까맣게 태웠다(아래). 피를 맑게 한다며 우리에게 권했지만 마치 숯을 씹는 듯했다. 인도나 네팔의 보통 사람들은 탄 것에 무감각할 때가 많은데 나로서는 탄 것을 먹는 게 매우 꺼림칙한 일이었다.

 

더럽다고 느끼는 것은 때론 시각의 차이기도 하다. 힌두교에선 나름의 독특한 정/부정(淨/不淨)개념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가령, 다른 사람들과 돌아가며 쓰는 수저보다 자신의 손이 더 깨끗하다든지, 기름에 튀긴 음식이 물로 끓인 음식보다 깨끗하든지 하는 구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의 옥상에 있던 물탱크, 그러니까 우리가 샤워를 하고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던 물을 공급하는 그곳에서 원숭이들이 목욕을 하고 있어도 원숭이는 성스러운 동물이기에 숙소 관리자는 우리의 컴플레인에도 그저 허허 웃으면서 내려갔던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손으로 뒤를 닦는 것이 더럽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휴지로 완벽(?)하지 않게 닦고 똥 묻은 휴지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게 물을 이용해 문질러 닦고 손을 비누로 닦는 것보다 깨끗한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무엇보다 휴지가 없어 볼일을 못 보는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고 나는 여행 내내 화장실에 비치된 물을 이용해 뒤를 해결했다. 거의 대부분의 면에서 이 방법이 더 편하고 깔끔한 것 같아,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이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인도나 네팔 사람들이 유독 신경 쓰는 더러움이 있다. 가령, 네팔에서는 생리 중인 여성을 집 밖으로 격리시키는 전통인 짜우빠디(chhaupadi)가 남아 있다. 도시에선 보기 힘들지만 시골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네팔에서 대안생리대 보급 운동을 하는 비욘드라는 단체의 정성미 씨는 시골에서 그 전통을 직접 접했을 때의 충격에 대해서 얘기를 해 주셨다. 단순히 집 밖에 나가는 것뿐 아니라 이불이나 옷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동사를 하기도 하고, 호랑이 같은 동물에 의한 피해, 그리고 강간과 같은 일들도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했다. 그 상황을 해결해보려고 동물 우리와도 같은 격리 시설을 부쉈더니 더 튼튼하게 격리 시설을 세운 마을의 남성들도 있었다고 한다. 생리는 이들에게 부정(不淨)한 것이다.

가문의 명예도 있다. 도시에서 웬만큼 교육 받은 경우가 아니면 이들은 보통 부모나 마을에서 정해 주는 같은 카스트의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를 어기는 경우엔 가문이나 피를 더럽힌 것이라 하여 죽이기도 한다. 이른바 명예 살인이다. 빗속에서 춤추는 영상을 유투브에 올렸다고 누이를 죽인 사건을 뉴스에서 접하면서 가문의 명예란 얼마나 깨끗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됐다.

한국은 많이 다를까. 생리 중인 여성을 집 밖으로 격리시키진 않지만 남성들의 생각에선 여전히 여성의 생리는 격리돼 있는 듯하다. ‘깨끗해요’라는 카피가 생리대엔 항상 붙는 것을 보면 생리는 여전히 더럽기 쉬운 것 같은 일인 것 같고 남성들이 ‘생리’를 발음하는 것은 여전히 불편해 보인다. 여성의 절개나 순결을 여성의 제일 가치로 국가적으로 떠받들었던 열녀문이나 열녀비를 아직도 기리는 한 한국 사회도 여성에게 모종의 ‘깨끗함’을 강요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동성애자도, 성매매 여성도 ‘더럽다’고 비난 받는 사회가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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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의 강은 갠지스강의 하류인 꼴까따의 후글리강이다. 한 여성이 강물을 길어 가고 뒤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에선 길가에 있는 수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샤워를 하고 있는데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들이 더러운 강물을 길어 가서 집 안에서 쓰고 길에서 샤워를 하는 것은 대부분의 가정에 제대로 된 수도가 갖춰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러움에 대한 시각 차이를 얘기할 수도 있지만 깨끗하고 안전한 물이라는 기본적 인권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할 것이다.

더러움은 넓게 쓰인다. 거기엔 단순히 위생적인 청결이나 시각적인 단정함 외에도 종교적인 신성성이나 가부장적 질서, 의학적 유해함이 뒤섞여 있다. 더러움에 대한 기준은 개인별로, 사회별로, 문화권별로 다양하다. 그리고 그것은 강력하게 몸과 무의식에 배어 있다. 똑같이 원숭이가 뛰논 물에 몸을 담가도 내 몸엔 두드러기가 나는데 인도인에겐 성스럽게만 느껴지는 것도, 인도인이 마시던 물을 내가 마시면 배탈이 나는 것도, 네팔인이 맛있게 먹던 과일을 내가 받아먹어도 나만 배탈이 나는 것도 우리 몸에 체화된 위생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물론 때론 마음의 문제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술잔도, 찌개 냄비도 섞어 마시던 사람들이, 또 온갖 이상한 물질들이 들었다고 얘기되는 개고기나 요상한 술들도 잘 마시던 사람들이 인도나 네팔에 가서 거의 강박증처럼 청결을 따져도 딱히 정치적 올바름을 들이대긴 애매하다. 더러움에 대한 감각은 몸의 아픔에 대한 공포로 새겨진 것. 여행지에서 하루에 몇 병이고 플라스틱을 버려 가며 지구를 더럽히더라도 당장 내 몸에 들어가는 물 한 방울의 위생이 내겐 당면 과제다. 붐비는 차에서 이상한 냄새를 풍기고 더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건 무의식에 셋팅된 더러움의 기준 때문이겠지만 당장은 불쾌하고 불편한 것이기에 그 앞에서 ‘다름’을 얘기하는 것은 무용하기도 하다. 애초에 더럽다는 인식은 병에 대한 공포에서 그 근원을 찾기도 하지 않는가. 히틀러의 집권 초기 그를 지지했던 ‘평범한’ 사람들은 그 지지 이유로 고용 기회 증가와 깨끗한 거리를 꼽았다고도 한다. 이만큼 더러움에 대한 두려움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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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나 길바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동그란 떡 같은 건 버팔로(물소) 똥으로 만든 것이다. 저렇게 말려서 땔감으로 쓴다. 똥에 대한 인식이 다름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인도 사회는 카스트에 의해 정한 일과 부정한 일이 분리돼 있었고 지금도 그 틀이 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저 똥을 다루는 이들은 하층 카스트일 것이다. ‘더러운’ 일들은 ‘더러운’ 계급이 하도록 분리돼 있는 것이다. 결국 더러움은 계급화 돼서 분업화 돼 있고 더러운 것과 더러운 사람은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더러움의 정도는 계급의 척도이기도 하다.

 

더러움을 피하는 노력이 상류층의 구별짓기처럼 느껴질 때도 종종 있다. 인도 사람들이든, 어느 나라 사람들이든 더 가진 자들이 더러움에 더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도사람이 어느 정도 위생에 신경을 써 봤자 한국인의 눈에는 부족할 때가 많다. 그것은 한국 사회와 인도 사회가 갖고 있는 전반적인 계급 격차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보면 굉장히 잘 사는 나라인데, 그중에서도 위생 수준은 최고를 다투는 것 같다. 얼굴에 난 점 하나도 지저분하게 느껴서 제거하고 싶어 하는, 세계에서 제일 깨끗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지 않은가(불과 100년 전만 해도 ‘서구’의 사람들에게 한국인은 더러운 사람들이었다). 그 사회적 수준이라는 것은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 결단으로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만은 아니다. 가령 나는 물티슈로 내 손을 깨끗하게 하면서 물티슈를 생산/폐기하는 오염을 택하기보다는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오는 편이 나은데 한국에서 살다 보면 여기저기서 물티슈를 자꾸 줘서 그것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부러 물티슈를 써야 할 때도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날 더 깨끗하게 만들어야 하기도 한다.

 

더러움에 대한 한국적 기준을 맞추다 보면, 그리고 이미 내 몸에 체화된 깨끗함의 기준을 만족시키려면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땀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다보니 땀 한 방울이 흐르는 실내 온도를 피하기 위해 에어컨을 튼다. 에어컨을 쬐고 있다 보면 한여름에도 찬물로는 샤워를 할 수 없기에 보일러를 켜서 더운 물을 튼다. 하루에도 여러 번 청소기를 돌리고 세탁기를 돌리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승용차건, 길거리건, 옷이건 조금의 더러움도 서로서로 용납하지 않고 깨끗한 사회를 권하고 요구한다. 에어컨과 뜨거운 물이 부자들만의 것인 나라들을 여행하다 보면 더러움을 피하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것이 자꾸 사치처럼 느껴지곤 했다.

얼마 전 교도소에서 뜨거운 물을 페트병에 담아 주는 것이 문제 제기가 됐고 법무부에서 시정 조치를 내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여행한 곳에서는 뜨거운 차나 커피, 뜨거운 음식들을 거리낌 없이 비닐봉지에 담아서 주고받던 게 떠올랐다. 한국에서는 재소자에게도 지켜지는 어떤 ‘권리’ 같은 위생 관념이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는 일상적으로 용인되는 것 아닌가. 뭐 교도소에서는 결국 뜨거운 물을 부어도 유해 물질이 나오지 않는 병을 재소자가 알아서 구매하도록 했는데, 결국 돈이 있어야 해결되는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럽고 치사한 세상, 더러움에 대한 고민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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