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6호] 자유로운 두 영혼이 빚어낸 금빛 하모니

- 편집자

달맞이의 책꽂이

자유로운 두 영혼이 빚어낸 금빛 하모니
– <부러진 부리> 너새니얼 래첸메이어 지음 / 이상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부러진 부리>는 상처 입은 두 영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원 숲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그 나무에는 참새들이 여럿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꼬마 참새는 친구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입니다. 나는 모습은 물론, 땅으로 내려앉을 때의 모습도 아주 근사하고 멋집니다. 어찌나 잽싸고 날렵한지 바닥에 떨어진 큼직한 빵 부스러기는 늘 그의 차지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부리가 부러진 것입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불운하기 짝이 없는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고약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근사하고 멋지고 날렵했던 꼬마 참새의 신세는, 이제 급속하게 전락하기 시작합니다.

예전처럼 빵 부스러기를 집어들 수 없으니 배는 점점 곯고, 친구들의 무관심에 마음도 점점 허해갑니다. 몸은 날로 야위어가고, 신세가 초라해지니 눈치만 늘어납니다. 자신의 부러진 부리를 두려워하는 친구들 때문에 집에도 가지 못합니다. 깃털은 헝클어지고, 가슴은 움푹 꺼지고, 다리는 삐쩍 말라 갸냘퍼지고……. 볼품없어진 꼬마 참새에게 친구들은 비수까지 꽂습니다. ‘우리하고 다르게 생겼잖아.’ 식당 손님들에게 빵 부스러기를 구걸해 보지만, 손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누구도 꼬마 참새의 불행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작가는 꼬마 참새의 모습을 통해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공원과 숲은 여러 사람들과 여러 생물들이 함께 있는 장소입니다.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그곳에 있던 나무에서 살던 꼬마 참새와 친구들.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이 먹이를 구하러 다녔으니 그들은 식구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꼬마 참새의 부리가 부러진 사건을 계기로 확연이 갈라집니다. 아니, 꼬마 참새를 추방합니다. 꼬마 참새의 부리가 어느 날 갑자기 부러졌듯이, ‘그냥 생긴 그런 일’이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간과하고 꼬마 참새의 불행에 침묵합니다. 부리가 부러진 것이 꼬마 참새의 잘못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야만 꼬마 참새를 외면한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슬프고 두렵고 삶을 뒤흔드는 중차대한 일이, 다른 이들에게는 ‘그냥 그런 일’이 되고 맙니다. 마음이 조금 여린 친구들 몇은 누군가 꼬마 참새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 누군가에 자신들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멀찍하니 뒤로 물러서 있습니다.

“지극히 정상일 때, 그래서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때만 우리 식구야!”라니!

명쾌해 참으로 좋습니다. 그런데 ‘지극히 정상’이라는 기준이 참 구립니다. ‘부리가 부러진’ 것이 추방의 조건이었다면, 억지 좀 써서 다리 좀 짧은 녀석, 머리털 좀 벗겨진 녀석, 재수 없이 돌멩이에 맞아 눈덩이가 시퍼렇게 된 녀석도 모두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게 아닐까요? ‘정상’과 ‘비정상’을 꼭 그렇게 보여지는 것으로만 갈라야 하는 것인가요? 그렇게 하나하나 추방하다 보면, 조만간 그 공동체는 문을 닫고 말겠습니다. 암튼 꼬마 참새는 그렇게 그 위험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갓 구운 빵 한 조각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꼬마 참새는 기쁜 마음에 살며시 다가갑니다. 그러다 빵을 집어 들던 손 하나와 딱 마주칩니다. 형편없이 야위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낡고 더러운 코트 차림의 떠돌이 사내.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도 제멋대도 자란 그는 꼬마 참새를 보자 무어라 중얼거립니다.

외롭고 상처 받은 영혼은 통하는 법, 둘은 서로를 단박에 알아봅니다. 꼬마 참새는 떠돌이 역시 자기처럼 부리가 부러져 있다는 걸 눈치 챕니다. 그의 목소리만으로 그가 얼마나 슬프고 외로워하는지 알아냅니다. 부러진 부리를 고칠 방법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은 나약한 존재라는 걸 꿰뚫어 봅니다. 떠돌이 역시 꼬마 참새의 허기를 알아채고, 주운 빵 반쪽을 나누어 줍니다. 꼬마 참새가 다른 새들에게 빵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주기까지 합니다. 떠돌이가 건넨 빵 반 쪽, 아니 마음 반쪽을 받아먹고 행복해진 꼬마 참새는 다시 날개를 펼칩니다. 그러자 떠돌이가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내밉니다.

집 없고 추레한 떠돌이 사내는 손가락에 부리가 부러진 작은 참새를 앉힌 채 거리를 걸어갑니다. 떠돌이 사내는 참새를 내려다보면서 연신 중얼거리고, 꼬마 참새도 ‘짹짹, 째액!’ 경쾌하게 화답을 합니다. 둘은 공원 작은 벤치 위에 자신들의 집을 만듭니다. 떠돌이가 먼저 무릎을 세워 웅크려 앉자, 꼬마 참새가 부스스한 떠돌이 머리 위에 몸을 눕힙니다. 둘은 그렇게 잠이 듭니다.

배고픈 꼬마 참새와 허기진 떠돌이 사내. 바닥에 떨어진 빵 한 조각은 그들에겐 꼭 필요한 먹을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빵은 떠돌이 사내의 배를 채우기엔 형편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떠돌이 사내는 빵을 똑같은 크기로 나눕니다. 인간과 조류, 덩치 큰 짐승과 작은 새라는 분별은 그에겐 중요치 않습니다. 내가 먼저 집었으니, 내 것이라는 욕심이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습니다. 둘 다 먹을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 그러니 나눠야 마땅하다는 생각만이 가득합니다. 떠돌이 사내의 거친 손은 그의 생각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빵을 더도 덜도 아닌 딱 반으로 나눕니다. 어쩌면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떠돌이의 삶이, 또 다른 떠돌이(참새)를 만나는 순간 그렇게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봄으로써, 행복해 합니다. 친구가 됩니다. 친구였음에도 친구이기를 거부했던 다른 새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꼬마 참새는, 이제 새로운 친구를 만나 둥지를 틉니다. 안온하지만 위험한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꼬마 참새는, 떠돌이 사내와 더불어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새로운 공동체를 만듭니다. 공원 벤치에 웅크리고 앉은 떠돌이 사내와, 그의 머리에 몸을 맡긴 꼬마 참새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지만은 않는 것은, 그들이 서로의 아픔을 교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가족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적이고 세밀한 로버트 잉펜의 그림은 글의 품위를 한껏 높여줍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또르르 떨어질 것만 같은 꼬마 참새의 눈망울, 손톱 끝이 까만 떠돌이 사내의 주름지고 거친 손, 한쪽 손 위에 꼬마 참새를 올려놓고 걸어가는 떠돌이 사내의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길을 인도하듯 앞을 바라보고 있는 꼬마 참새와, 그런 참새를 향해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사내의 약간 벌어진 입, 그것을 바라보는 희미하게 박제되어 있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압권입니다.

그런데 하나 못마땅한 것이 있습니다. 작가는 마지막에 떠돌이 사내와 꼬마 참새가 ‘부리가 반듯한 상태로 살아가는 세상을 꿈꿨단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너진 삶을 다시 꾸리고 싶다는 열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부리가 반듯한 상태로 살아가는 세상’을 도달해야 할 곳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도 없이 예기치 않은 불행과 마주칩니다. 그래서 궤도에서 이탈하기도 하고, 추방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딛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행이 없었던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꼬마 참새의 부러진 부리는 복원되지 않습니다. 설령 복원되어 꼬마 참새가 자신을 추방했던 예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공동체는 여전히 위험한 공동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전으로 회귀하는 대신, 부리가 부러진 채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합니다.

또 하나! 떠돌이 사내는, 정말 부리가 부러진 사내일까요? 외형적으로 보면,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선에서 보면 그는 분명 정상적인 삶의 대열에서 낙오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에서 ‘자유’의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은 왜일까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이야기는 ‘상처 입은 두 영혼’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로운 두 영혼’의 이야기라고 해야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영혼이 빚어낸 아름다운 정경이, 그들의 앙상블이 봄비처럼 마음을 촉촉이 적십니다.

– 달맞이

응답 6개

  1. 부우말하길

    제 주변을 돌아보게 합니다.. 부리가 불어진 친구를 내친 적은 없었는지.. 작은 위안을 바란 벗에게 무심하지는 않았는지.. 꼬마 참새의 부리는 부러졌지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멋진 친구를 만나 참 다행입니다.

    • 박혜숙말하길

      부우님, 우리 두 번째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꼬마 참새가 참 다행스러워요.
      논어에 이런 말이 있대요.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덕이 있으면 따르는 이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는 뜻인대요.
      ‘덕’이라는 말을 ‘상처’로, ‘따르는 사람’을 ‘친구’로 바꾸고 싶어요.
      그렇게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게 바로 우리네 삶일 테니까요.

  2. 둥근머리말하길

    참 촉촉한 이야기입니다. 부리가 부러진 채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향해… 비척비척 가야할 텐데요… 그러면서 친구도 알아채고요.. 가슴이 먼저 머무는 글, 고맙습니다. 열성독자가 될 것 가터요.ㅎㅎ

    • 박혜숙말하길

      살다보면 아주 여러 번 부리가 부러지는 것 같어. 근데 부리가 부러졌을 때의 절실함을 금방 또 잊는다는 게 문제인 것 같어. 멍충이처럼. 얼굴만 가리면서, ‘나 아녀!’라고 발뺌하는 거. 요즘 자주 그 생각 해. 나 비척비척거릴 때 무지 이쁜 누군가 ‘숨 값’ 줬던 거. ‘밥 값’이나 ‘술 값’이 아니라 ‘숨 값’으로 절실히 다가왔던 거. 그 온기로 아주 오래 숨 틔였던 거. 늘, 고마워. 친구.

  3. 쿠카라차말하길

    이번 주도 감동적인 이야기 들려주셔서 고마워요. 그림이 많으면 매이한테 보여주고 싶군요.
    요즘,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해요. 병이 들거나 누가 죽거나 파산하거나 아무튼 지금의 균형이 깨어져 버린다면? 항상성을 지키는 삶도 중요하지만 항상성이 깨어졌을 때 내 마음의 평정심을 회복하는 능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때도 친구를 알아채고 찾아갈 용기와 힘을 길러야겠다는….

    • 박혜숙말하길

      샘, 책 가져갈게요. 저도 요즘 그런 생각해요. 평균대 위에서 노는 법을 익혀야겠구나. 유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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