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벌거숭이들의 내일?

- 최진호

유령의 목소리

이 영화의 첫 이름은 <앙코르와트>였다. 앙코르와트? 박상훈감독이 시나리오를 보여주면서 왜 앙코르와트인가를 설명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앙코르와트가 갖고 있던 어떤 ‘이미지’와 그가 영화에서 말하고자 했던 이미지가 겹쳤던 듯하다. 그러나 앙코르와트는 이미 지워져 버렸다. 이름 없는 이름, 사라져 버린 이름의 자리를 〈벌거숭이〉가 대체했다. 이 벌거벗은 삶이 앙코르와트가 드러내고자 했던 이미지와 등치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벌거숭이>는 <앙코르와트>의 자리를 사산시키고 지워버렸다. 주인공 박일래가 그 가족을 살해하고 떠돌기 시작한 것처럼 <벌거숭이>도 <앙코르와트>를 지워버리고 길 위에 섰다. 그러나 이 과거의 목소리, 살해당한 유령들은 사라지지 않고 <벌거숭이>의 주변을 맴돌며 어떤 응답을 요구한다. 영화는 이 목소리 요구에 대한 ‘벌거숭이’ 박일래의 응답이자 떨림의 기록이다.


도망

“걱정하지마. 다 잘 될 거야. 내가 생각해 놓은 게 있어.”

박일래는 밝은 미래에 사로잡혀 있다. 자신의 설계한 미래에 대한 확신은 현재에 대한 분노와 연결된다. 그의 분노는 가족을 향한다. 아버지는 해 준 것이 없고, 아내는 자신을 동네 똥개처럼 무시하고 있다. 아들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 이들로부터 벗어나는 것, 혹은 이 관계에서 벗어나는 게 밝은 미래의 일부이다. 그러나 그의 밝음을 향한 의지는 빛을 거부했던 아Q를 닮아있다. 루쉰에 의하면 아Q는 현실에서 늘 패배하는 존재다. 가진 것도 없고, 완력도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밝음의 요소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아Q는 이 현실의 패배를 기묘하게 전도시키는 능력이 있다.

“(건달들에게 구타를 당한 후) 그러나 10초도 지나지 않아 아큐도 역시 만족하여 의기양양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자신을 경멸할 수 있는 제1인자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경멸할 수 있다’는 말을 생략하면 남는 것은 ‘제1인자’라는 말이다. 장원급제한 사람도 ‘제1인자’가 아닌가?……아큐는 이러한 갖가지 묘수로 원수들을 굴복시킨 다음 유쾌하게 술집으로 달려가서 술을 몇 잔 마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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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하는 나와 경멸당하는 나를 분리해, 나를 경멸하는 자 곧 승자로 추론해내는 아Q의 방식을 정신승리법이라고 말한다. 찬란한 미래를 그리며, 현재를 부정하는 박일래의 모습도 아Q에 쉽게 겹쳐진다. 둘 모두 벌거벗은 날 것의 삶을 대신해 찬란한 미래의 삶이 몸을 감싸고 있다고 느낀다. 오지 않은 것이 보이게 되고 지금 있는 것이 보이지 않게 된다. 미래 혹은 빛이 현재를 대신한다.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기에 맹목적이다. 이 맹목 앞에 눈 멀어버린 박일래에게 미래의 비극은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 먼 박일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성취되었을 때,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으로 표현될 것이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그렇게 원했던 현재와의 결별, 즉 가족과의 결별은 감당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돌아온다. 죽음이라는 미래조차 그를 배신한다. 가족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가장의 존속 살인으로 변했다. 가족을 스스로 해쳤기에 아파하기도 쉽지 않다. 그가 입힌 상처, 그가 입은 상처. 얽혀들어 온 외상과 내상 앞에 그는 도망친다. 그러나 그의 주위를 배회하는 유령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고난의 행군

처음 봤던 시나리오에 의하면 이 영화는 도망친 박일래의 액션멜로로드무비(?)였다. 삶의 감각을 놓아버린 박일래는 살인마가 되어버리는데, 이 살인마의 삶을 보다 세심하게 따라감으로써 이 맹목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도덕의 관점에서 가장 밑바닥 삶이겠지만, 그것도 역시 내적 정당성을 갖고 있는 하나의 삶이다. 평가 이전에 그 삶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것. 그러나 <벌거숭이>는 이 살인마의 자기구원의 문제로 시선을 돌리고 삶의 소리에 응답한다. 타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삶의 구조에 대한 탐구를 대신해 ‘상처 입힌 자’의 자기반성이라는 도덕적 문제가 자리를 차지한다.

사실 영화에서 상처 입은 자들은 말이 없다. 상처는 어떤 독자적인 사건으로, 말없이 열려 있다. 그리고 어떤 말과 행동을 요청한다. <벌거숭이>는 박일래의 고난의 행군을 통해 이 요청에 답한다. 도망친 박일래는 죄책감 속에서, 고난의 길 위에 선다. 그러나 박일래 스스로 주어진 환경을 바꿀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자신이 살해한 가족들을 다시 되살리지도, 그들의 유령을 떨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손쉬운 죽음의 시기조차 잃었다.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다. 죽는다 한들 상처는 치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야 하고 상처에 응답해야 한다.

주어진 상황을 자유롭게 변경할 힘을 갖고 있지 않는 인간은 그 상황을 자기기만 없이 떠맡을 수는 있다. 박일래는 일종의 만행을 통해,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다. 자신의 고난을 충분히 드러냄으로써, 그리고 그 고난을 아름다운 풍경 속에 배치함으로써 영화에서는 일종의 절망적 영웅주의가 형상화된다. 그러나 박일래가 입힌 상처와 입은 상처를 벗기 위해 상처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가능할까. 그의 도주의 실패, 그리고 자살의 실패는 그 ‘상처’들이 죽음으로의 도피 속에서 해소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벌거숭이의 내일?

그렇다면 상처를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그것도 가해자인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까? 그리고 누가 그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이 대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들뢰즈는 1차 세계 대전에 부상을 입어 평생 침대에 살게 된 조 부스케를 통해 몸에 새겨진 상처의 문제를 다루는데 이 문제에 있어 시사적이다. “내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으며, 나는 그것을 구현하려고 태어났다.” 들뢰즈는 내가 상처를 떠맡는 책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상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때야 비로소 타자의 상처나, 나의 상처에 국한되지 않는 상처의 육화가 가능하다. 상처 되기는 치료를 통해 상처를 벗어나거나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소급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 되기의 순간에, 이 현재는 과거-미래로 분할되고 열린다.

“행위자는 아이온의 시간에 속한다. 즉 가장 심층적이고 충만한 현재, 즉 기름방울을 만드는 [시간을 모으는], 미래와 과거를 포괄하는 현재 대신에, 이제 두께는 얇음도 없는 텅 빈 현재 안에 반사되는 한계지어지지 않는 과거-미래가 나타난다.” (『의미의 논리』, 계열 21, 262)

그래서일까? 두부를 먹는 장면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약간 불편했다. 구원이나 상처의 사라짐에 의해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사건에 대한 정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령 두 번째 자살 시도 이후의 아름다운 풍광의 모습이나 바닷가의 고요한 장면은 자연 혹은 숭고함에 속에서 상처가 치유되는 듯이 느낌을 갖게 만드는 장치같다. 이는 두부 장면을 통해 효과가 극대화된다. 두부 장면을 위해 앞의 모든 장면이 존재하기 까지 한다. 화면의 아름다움 속에서, 치유가 아니라 상처를 함께 가지고 가는 것, 즉 상처-되기의 가능성은 미리 차단된다. 과거의 상처는 현재의 숭고한 장면으로 소급되어 버리고 미래의 삶도 이 무거움에 잡혀 버리는 느낌이다. 따라서 상처는 지금 치유되었고 미래가 이 순결하고 지고한 존재에게 열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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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처는 손쉬운 치료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상처를 안고서도 미래를 만날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책임에 의해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가짐으로써 더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사건을 현재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 하여금 과거와 미래로 흩어지게 하는 것. 이 흩어짐과 가벼움 속에서 벌거벗은 자들의 내일이 열리지 않을까? 고난 받는 벌거숭이의 형상을 그려내고 자연을 통해 감정을 끌어들임으로써 상처-되기의 과정을 생략해 버린 는 대신 자연에 의탁하지도 않고, 숭고함에 의존하지도 않은 채, 상처 되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감독의 서사가 조금 경쾌하게 이 지대를 횡단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래서 그것을 원하고 그로부터 사건을 이끌어내는 것, 그 고유한 사건들의 아들이 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 탄생을 다시 이룩하는 것, 그 살의 탄생과 분리되는 것.”(『의미의 논리』 계열 제 21, 2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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