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부모가 우릴 선택해줄까?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지역아동센터는 요즘 한창 긴장 중이다. 내년부터 전체 초등학생들을 위한 학교 중심의 방과 후 무상 돌봄이 전면화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 ‘돌봄‘이 전적으로 가정과 특히 여성이 부담해야 할 몫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짊어져야 할 몫으로 인정받고, 정책적으로 배려 받는 현실에 대해 쌍수를 들어 환영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지역아동센터들은 스스로가 오랫동안 주장해 왔던 이 정책의 실현에 앞서 고민에 빠져들고 있다.

‘밤 10시까지 초등 방과 후 무상 돌봄’은 대통령의 공약 중 하나였다. 기초노령연금은 날아갔지만 그래도 지킬 건 지킨다는 의지인지 올해 하반기부터 학교는 1~2학년을 대상으로 시범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해부터 그 동안 방과 후 돌봄을 각기 실시해 왔던 여성가족부와 보건복지부 및 교육부는 안전행정부까지 모두 4개의 부처가 모여 서로 협력적으로 일해보자는 뜻으로 ‘협약’까지 체결하고 방과 후 돌봄을 위한 부처간 통합 논의를 계속 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명확한 기준치는 없지만 이를 통해 내놓은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아동들 중에서 방과 후에 어른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홀로 방치되어 있는 아동들이 24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 동안 지역아동센터 등에서 100만 명의 아동들이 방임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던 것과는 사뭇 달라, 거의 2.4배나 더 많다고 하니 입이 벌어질 노릇이다. 100만이건, 240만이건 현재 이런저런 돌봄을 받고 있는 아동들이 지역아동센터에서 약 10만 명, 학교의 방과 후 돌봄에서 약 10만 명 해서 대략 20만 명을 웃도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므로 많이 잡아야 30만 명이 돌봄을 받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과 후 돌봄과 관련한 잠재적 수요층은 넓게 포진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긴 무상보육으로 이미 사회적 돌봄을 받기 시작한 영유아기를 거친 아동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어디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곳도 별로 없이 홀로 학교와 학원과 가정 등등을 전전하며 self-care(자가 보육)가 가능할 것이란 믿음 자체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끔찍한 아동 성폭행 사건 등의 안전사고가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또한 무조건적으로 돌봄을 넓히고 확대하고 연계해야 하는 것이 옮다. 그러나 그럼에도 고민은 있다.

 

학교는 갑이다.

10여 년 전 나는 동네의 가게에 들인 방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공부방 실무자가 되었다. 그 후 공부방은 2007년 법제화의 끝 무렵 지역아동센터라는 지역사회 돌봄을 실시하는 지역아동센터가 되었다. 당시 정부의 법제화에 반대하며 끝까지 제도권 밖에 남자던 공부방 동지들의 요청을 끝내 뿌리치고, 월 200만 원의 보조금이라는 현실적 유혹과 무엇보다 제도권 안에서 번듯하게 일하고 싶다는 은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배신을 하고 돌아섰다.

그 후 줄기차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왔다. 정부의 정책이 이루어지는 꼴을 보면 이런저런 정책 제안들이 수년의 간극을 두고 약간은 변형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늘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금도 딱 그렇다. 방과 후 돌봄을 확대하여 홀로 방치되는 아이들이 없게 하고, 그렇게 확대하는 돌봄을 질적으로 우수한 것으로 만들어 우리의 미래 세대들이 좀 더 밝고, 건강하고,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자고 주장해 왔는데, 현재의 이 부처간 방과 후 돌봄 통합 논의가 과연 그런 주장의 산물로 나타난다고 하니 내가 정말 원한 모습이 이것이었던가는 영 자신이 없다. 특히 앞으로 학교가 어떤 행보를 걸을지 그 자세한 속내 이야기를 듣게 된 후 더욱 그러하다.

공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사교육이 범람을 하고, 공부는 커녕 인성 교육도 제대로 잡질 못해 온 나라가 학교 폭력의 문제로 시끄러워도 학교는 여전히 갑이다. 그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근대화와 국민국가의 형성에 학교란 제도가 이룬 혁혁한 성과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여실히 빛나고 있고, 국민 모두를 빠짐없이 인간화, 사회화의 과정에 일단 담갔다 빼겠다고 하는 학교의 야심찬 계획은 오늘날에도 한 치도 어김없이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 선택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학교를 거대한 집단 기억으로 공유하고 있다. 저항하든 아니든 말이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러므로 학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는다. 물론 그 권력은 다만 교육부나 교육청에서 공문이 되어 내려오지 않을 때까지는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공문과 예산이 내려오고 명령이 시달되면 학교는 잠자고 있던 용이 깨어나는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이번에도 그렇다. 내년부터 2년씩을 잘라서 2개 학년씩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무상 돌봄을 실시하여 아이들을 안전하게 돌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공문으로 시달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약간 문제가 되는 것은 예산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국세의 일정 비율을 교육세란 명목으로 자체 쌈짓돈을 만들고 있는 교육부는 그나만 입도 뻥긋하지 말아야 한다. 복지계는 교육계를 본받아 복지세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 교육세마저 부족하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씀이다. 물론 안다. 예산은 일단 그 분들의 주머니를 넉넉히 채우고 나서야 마침내 낙수(落水)될 것이란 것을 말이다. 그러니 그 분들이 쌈짓돈 계산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떨어질 콩고물의 양이 달라질 것을 말이다.

돈은 없는데 일을 하자면 그 꾀를 어떻게 내어야 하는가? 그럴 땐 하는 척하는 시늉을 해서 일단 시간을 마련하는 전략이 최고다. 그러면 그 시간 동안 돈을 마련하든지, 안이 없애든지 둘 중 하나의 방도를 마련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학교에서 방과후 돌봄을 하는 척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선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을 되는 대로 구해볼 요량이 크다. 1~2학년 아이들이니 학교가 끝나는 1시부터 5시까지만 돌본다고 해도 하루 4시간이고, 학교는 주 5일만 운영하면 되니(참 좋겠다! 우린 그래서 꼬박 6일 일한다!) 주당 20시간만 일할 사람을 찾는 것이다. 교육부는 가능하면 주당 15시간 미만으로 일을 하도록 하면서 월 50만~6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인력 배치를 하겠다고 한다. 주당 15시간 미만이면 하루 3시간 정도 일을 하고 월 급여를 그렇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학부모나 대학생 혹은 기존 방과 후 돌봄 전담 강사나 학교 교사 등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학교에서 방과 후 돌봄 전담 인력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하루 3시간 아이들 오는지 안 오는지 출석 확인이나 하고, 프로그램 하는 교실로 아이들을 보내든지 아니면 그 교실에서 프로그램을 하면 그 뒷바라지를 하고, 끝나고 나면 간식 먹이고, 그 후에는 아이들 숙제가 있으면 그것 좀 봐주고, 그 후에 자기들끼리 놀라고 하면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5시가 될 때를 기다렸다 아이들을 보내면 끝이다. 그러고 월 50~6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을 수 있다면 하루 평균 3배 더 긴 시간 동안 일을 하고, 2 배 정도의 급여를 받고 있는 지역아동센터 교사들은 당장 이직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거기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행정 서류 처리에 아이들 하나하나에 대해 꼼꼼한 조사를 하고, 가정과 아동과 함께 성장 계획을 세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를 일일이 확인하고, 필요하면 온갖 자원 연계에 필요한 지역 기관 방문에 연계 회의까지 주관해야 하는 사례관리 서비스까지 짊어진 지역아동센터 교사들의 대탈주가 염려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복지부는 지역아동센터에 아동들을 돌보기 위한 최소한의 서비스 기준이라면서 그 동안 사회복지사는 2급 이상, 시설장이 되려면 3년 이상의 경력, 시설에 대해서는 전용 시설로 아동 1인당 3.3 제곱 미터 즉, 한 평 이상의 공간을 반드시 확보하고, 평가 때마다 얼마나 쾌적하고 적절한 물품 구비가 되어 있는지 등등 해서 품질에 대한 요구를 엄청나게 해 왔다. 그러면 지역아동센터들은 빚내고 집 팔아서 허덕허덕 그 기준을 메워 오느라 진땀을 뺐던 것이다.

그런데 학교는 교실이 있으면 돌봄교실로 전용을 하지만 교실이 없으면 그냥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실에 매트 하나 깔고 냉장고 작은 것 하나 들여놓고 그러고 겸용 교실이란 팻말 하나 붙여서 거기서 아이들을 5시까지 돌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인력의 자격에 대한 요구도 까다롭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말을 듣고 보니 어디 복지부가 따르는 정부가 따로 있고, 지역아동센터가 따르는 정부는 또 따로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렇게 하고 학교에서는 대대적으로 방과 후 무상 돌봄을 실시한다고 할 것이고, 아이들은 모두 5시까지 학교에 갇혀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5시까지 아니 밤 10시까지 지역으로 나오는 아이들은 점점 더 그 수가 적어질 것이니, 정말 지역에서는 어떤 사정으로든 학교나 돌봄 기관에서 나오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는 그야말로 정말 홀로 있는 아이가 될 가능성은 더욱 커지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뭐 아이들이 가능한 5시(학교의 오후 돌봄)나 10시까지 학교 등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정부 정책을 너무 삐딱하게 보는 것 같은지 살짝 고민스럽다. 그럼 뭘 어떻게 하라고 이런 소리를 하는가 하고 그 분(?)이 역정을 내실까 전전긍긍이다. 그 분과 학교는 원칙을 철통같이 고수하여 도대체 말이 안 통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얼마 전 한 일화를 들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왜 학교에 학생인권조례가 필요한 것인지를 확연히 깨달았다.

부산의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수 년 동안 아이를 돌보던 지역아동센터에 학교 관계자 분이 방문을 하셔서 한 말씀이다. “그 동안 저희 아이들 돌봐 주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교육청에서 예산 지원을 받아 앞으로 방과 후 돌봄을 시행할 예정이니 이젠 센터에서는 아이들을 데려오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관계자들의 말을 듣고도 센터에서 계속 아이들을 돌볼 경우 학생들에 대한 일정한 제재조치 및 담임교사가 학생이나 학부모 면담이나 전화 상담을 실시하고, 학교에 센터 차량의 출입을 금하고 아이들을 일정 시간 동안 내보내지 않는 등 갖은 조치가 뒤따른다.

그러니 학교에서 아이들을 수업 시간이 끝났다고 내보냈던 것은 임의적 행동이었을 뿐이다. 학교는 마음만 먹으면 학생들에 대해 무한 시간대의 무한 범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그야말로 슈퍼갑인 셈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하늘에서 받고 태어났다고 천부인권이라도 내세우지 않는 한 이 슈퍼갑질을 막을 수 있는 방도가 당최 없는 것이다. 게다가 무슨 계층 상승의 사다리 타기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거의 자동적으로 학교 말을 들어야 한다는 무의적의 발동과 나는 학교 말을 안 들어 이 모양 이 꼴로 살지만 너만은 학교 말을 잘 들어 잘 먹고 잘 살라는 부모들의 염원과 지역아동센터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학교에서 한다면 학교가 낫겠지 하는 경험 부족에서 오는 판단이 곁들여지면, 학부모는 자동적으로 학교를 선택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학교도 이렇게 시간 끌기용 작전을 내놓기는 했지만 무상보육의 과정에서 보이는 ‘학부모들의 공짜다, 일단 맡기자’란 식의 방과 후 돌봄 수요가 무지막지하게 발생되지는 않을까 염려를 하고 있는 눈치다. 물론 영유아들보다는 자신에 대해 조금 더 결정권이 있고, 책임 능력도 발달한 아동들이라 동일한 현상이 벌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현재보다는 훨씬 돌봐달라는 요청이 늘어날 것은 틀림없는 일로 보인다. 그것을 모두 학교에서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 지금 일선 학교의 판단이나, 이것이 그 분(?)의 뜻인 한 어떻게든 실현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또한 결연한 학교의 의지이기도 한 모양이다.

그래서 학교는 지역아동센터더러 잘 좀 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좀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특히 돈을 들여 시설은 좀 어떻게 해보란 요구가 많다. 그리고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나 학교의 운영이 어려운 야간에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어떤가 하고 제안을 해오고 있다. 즉, 지역아동센터가 학교의 보모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나마도 학교가 아이들을 다 못 돌본다고 할 때 나오는 이야기고, 혼자 잘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곳에서는 저희는 알아서 할 건데 그 쪽도 뭐…하고 그저 외면을 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소리를 하면 그런 치사한 꼴을 봤으면 그럼 때려치우라고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그러고 싶다. 그렇게 잘 때려치울 수만 있다면 장사하다 망하는 자영업자는 한 명도 없어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라. 수년 간의 생활을 이것만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한순간 그만두라 하면 단박에 “네”하고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이걸 위해 집을 팔고, 자격증을 따고, 밤낮없이 잘 해볼 생각에 고심을 해 왔던 사람들에게 어느 순간 사회에서 너흰 이제 필요 없으니 저리 가라고 한다면 고분고분 ‘네’하고 물러설 기분은 도저히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회가 만들어지고, 그 정부가 들어설 때 나도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빨간 목도리까지 두르고 다녔는데 이제와 이러면 너무 섭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학교야 말이 쉬워 부모가 방과 후 돌봄으로 학교를 선택하지 지역아동센터 너희들을 택하지 않는데 우린들 어쩌니 하면서 차라리 우리가 시키는 대로 야간 돌봄이든 뭐든 하라고 하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으면 살 길을 모색해보라고 하지만 참 배알이 곯려 지금은 도저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아니다. 목구멍이 포도청만 아니라면 확 성질대로 너희 혼자 애들 다 돌보고, 다 가르치고 마음대로 해봐라 하고 당장이라도 때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학교만 아니라 나도 아이들을 모아 놓고, 너희 부모가 우리가 아닌 학교를 선택하는데야 우린들 어쩌겠니? 너희가 부모 말을 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젠 어쩔 수가 없다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분명 지금의 파랑새 아이들은 우리가 엄마, 아빠한테 학교 안 다니고 파랑새 다닌다고 할 거예요 하고 분분히 이야기를 할 테지만, 그래도 그것도 잠시 뿐이다. 결국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할 터이고, 그렇게 지금 있는 아이들이 다 자라고 나면 앞으로는 또 어찌 될지 한 치 앞을 예측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지역아동센터는 을이다.

물론 나도 안다. 을도 을 나름이라는 것을 말이다. 을 중에서도 빼어난 을이 어찌 없겠는가? 그런 을들은 을의 귀감이 되어 갑의 칭송을 받는다. 못난 을들은 잘난 을을 보며 너는 어찌 저렇게 못하는가 하고 추궁을 당할 뿐이다. 그 동안 충분히 좋은 대리 양육자의 역할을 해 온 데 대한 칭찬은 없다. 너는 어찌 저처럼 혁신적인 사업을, 빼어난 교육 지원을, 엄청난 맞춤형 서비스를, 수완 좋은 자원 발굴과 연계를, 그 무엇도 한 게 없는가 질책을 당한다. 그런 을들은 갑의 파트너다. 그런 을들은 갑이 결코 을을 해하려드는 것이 아니라는 산 증거이다.

을들은 양극화의 가파른 길을 걷게 된다. 음지의 식물처럼 아무도 모르게 말라 없어지든지, 아니면 갑의 칭송 속에서 번쩍거리든지 말이다. 말라 죽는 을이나 계속되는 수혈과 혁신으로 거듭나는 을이나 어쨌든 모두가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일 터이다. 불완전한 사회가 자신의 영속과 안녕을 위해 때로는 한 집단을 착취하고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것이 지금은 일종의 관례처럼 되어버린 시대이다. 말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그런 착취와 팽개침이 만연되어 있어, 우리 사회는 사람살이에 대한 깊은 염증을 내고 있다. 오늘 나는 이런 착취에 신음하며 한편으로 삶이 온통 부정당하는 고통을 겪으며 비로소 다른 이들의 그런 아픔을 무시하고, 외면하며, 동조하며 굴종해 온 데 대해 말할 수 없는 회한을 느낀다.

싸움에 싸움이, 갈등에 또 갈등이, 억지에 억지가, 불합리에 불합리가 덧씌워지고 퍼져 나가며 마치 전체 사회가 악으로 빨갛게 물드는 것만 착각에 어느 틈에 정신 줄을 놓을 것만 같은 깊은 불안감에 빠져든다. 그래도 누군가의 말을 듣고 살아야 한다면 이 어린 아이들의 말을 듣고 살고 싶다는 소망도 이제는 한 겹 접어야 하는 때가 왔는가 싶다.

실은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아무에게도 고백하지 못했지만 날마다 날마다 나는 파랑새를 보아 왔다. 하루가 순간 같기만 하고, 항상 다채롭고 영롱한 순간들로 나의 인생은 행복했다. 그 안에서 사랑하고, 갈등하고, 성장하고, 울고, 웃으며 행복하고, 행복하고, 또 행복했었다. 이제 그 힘으로 앞으로 올 일들을 버텨야 하는 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지역아동센터들을 학교에 만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남은 진정한 몫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비록 하루에 다섯 시간이라도 아이들이 허비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비록 몇 시간이라도 학교에서 아이들이 정말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비록 자격증이 없더라도 진정으로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돌볼 수 있도록 그렇게 최소한의 도리를 학교가 잘 할 수 있도록 마지막 잔소리를 하는 것이 이 마이너리티 지역아동센터의 마지막 소임일지 모르겠다.

슈퍼갑이 과연 이 마이너리티의 말을 들을까? 아직은 자신이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부모님들이 선택을 한다면 당장 아이들은 서너 달 후면 학교로 돌봄을 옮겨 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 힘을 내야 한다. 거기 가더라도 oo이는 휙 하고 바람이 나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도록, 또 oo이는 일하는 엄마 대신 병원에 같이 가 주는 누군가 다른 어른들이 생길 수 있도록 말이다.

어쩌면 대도시는 그래도 아이들이 넘쳐나서 한동안은 오히려 지역아동센터가 밀려드는 아이들로 몸살을 앓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골의 작은 학교 옆에서 동네 아이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 왔던 센터들은 어떻게 될까 염려스럽기 그지없다. 학교 옆에 센터가 있어 돌봄을 하고 있는 곳은 학교가 굳이 돌봄 교실을 열지 말고 우선 하고 있는 곳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연계 체계 안에서 방안을 마련해보자고 제안은 해놓았지만, 교육부가 과연 이 말을 들어줄까 염려스럽다. 바라기는 교육부가 통합의 정신을 받아들여 최소한 의논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것인데 아직 협력 체계가 꾸려지기도 전에 실시하고 있는 하반기의 교육부의 방과 후 돌봄 시범 사업들 속에 이런 지역에 덜컥 돌봄교실을 상의 없이 운영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럽다.

물론 학교가 잘 하면 된다. 학교가 잘 하면 학교 말고 별도의 무엇이 꼭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당연히 들 수 있다. 그리고 학교는 아이들을 자기들만 가르칠 수 있다고 하는 교육 전문가들의 집단이 모인 곳이고, 엄청난 수의 비정규직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며, 지역에서 유일하게 엄청난 시설 인프라를 갖춘 곳이고, 아이들을 일단은 거의 모두를 만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곳이니 못하는 것이 되려 이상할 지경이다. 그러니 학교가 잘 한다고만 한다면 다른 무엇이 필요할까?

하지만 지역아동센터는 그 동안 학교를 대신해 왔던 것이 아니다. 지역아동센터는 가정과 부모를 도와 아이들을 돌봐온 것인데, 학교에서 이를 다할 수 있다고 하면서 갑자기 손을 놓으라 하니 약간 얼떨떨한 기분이다. 물론 부모와 학교의 강고한 카르텔을 몰랐던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학교는 잘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남든, 없어지든 학교는 잘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우리가 학교에 대해서 들었던 말이 있어 하는 소리다. 그 동안은 그렇게 해 왔더라도 이제는 정말 잘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 지역아동센터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비록 학교가 을의 이름과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모르지는 않지만 우리의 정신과 우리가 해 왔던 바 속에는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만들어 왔던 그 모든 것들이 남아 있다. 이를 이제 통째 학교에 넘겨주려 한다. 물론 학교가 콧방귀를 뀔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말하는 바이다.

학교여! 학교가 돌봄이 아닌 교육기관으로 스스로를 생각한다면 자신을 교육이 아닌 돌봄 기관으로 고민해 왔던 지역아동센터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학교의 돌봄은 지역아동센터의 그 무엇을 포함한 것이어야 한다. 특히 우리가 통합과 연계를 논의하는 이 마당에서는 더욱 그렇다.

학교에 지역아동센터를 만들어야 한다.

 

응답 4개

  1. 김상미말하길

    학교에서 지역아동센터를 대신할 수 있다고
    학부모인 저는 도저히 못 믿겠는데요…
    몇해 전 사교육 절감 어쩌고 하여 방과후교실을 학교에서 열라, 하니 제 아이가 다니던 학교에서 수학영어 과외를 대대적으로 개설하겠다고 해서 학부모운영위에서 총투표까지 해서 막은 적이 있었죠. 학교에서 한다는 게 대체로 뭐 상상이 가는 수준이라,
    참 답답한 노릇이고 걱정되고 그러네요…

    힘내시길…

  2. 제시말하길

    그럼 어떤 아이들은 아침에 학교 가서

    한밤중까지 줄곧 학교에 ‘갇혀’있게

    되는 셈이군요.

    고등학교 때 ‘자율학습’의 고통이 되살아납니다.

    학교라는 장소와 공간 자체를

    숨막혀 하고 힘겨워하는 아이들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저처럼요.^^

    방과후 돌봄의 수요자는 유권자인 부모가 아니라

    당사자인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정책 담당자들이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 근심스럽습니다.

    선생님 글의 애독자였는데 이런 어려움이 생겼다고 하니

    걱정스럽습니다.

    열받고 서운한 일이 많으시겠지만 힘내세요^^

  3. 고추장말하길

    저도 아이를 학교 방과후 돌봄교실에 맡기고 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던 내용이네요. 지역아동센터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짰어야 했는데… 사실 하루종일 학교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도 안쓰럽고(저희 아이는 학교에 그토록 오래 있어야 한다는 걸 너무 힘들어해요)… 지역아동센터를 아이들이 지역에서 놀며 지내는 소중한 코뮨으로 활성화했으면 싶은데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4. 말하길

    오랜만에 태숙쌤 글 보니, 참 좋네요. 이런 일이 있군요. 사회적기업도 그렇고, 송전탑공사도 그렇고, 참, 행정권력의 천박한 인식과 갑의횡포가 참 심각하군요. 어려운 중에도 아이들에 대한 깊고 따뜻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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