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대 과학

천동설 대 지동설2 – 상대성원리는 지동설과 천동설 중 어느 것을 지지하는가?

- 박성관

지난주에 나는 지동설과 천동설, 지구 중심설과 태양 중심설 모두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어느 쪽을 선택해서 천체를 설명하든 자유지만, 둘 중 어느 한쪽이 실재와 일치하고 다른 한쪽은 그러지 못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주에는 그걸 판정해 줄 고정된 기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대단할 것 없는 소소한 상식과 심오할 것 없는 소박한 논리를 가지고 이러한 견해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이후 러셀과 최무영, 호킹의 책을 읽으면서 내 생각이 더 뜨거워졌다는 이야기도 이미 했었다. 여러분 모두 보았듯이 그들 모두 지동설과 천동설을 편의의 문제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교과서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 서적들과 선생님들은 천동설이 틀리고 지동설이 옳은 것이며, 그것이 17세기의 과학 혁명을 통해 갈릴레오와 뉴턴을 통해 밝혀졌다고 가르친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다시 러셀의 말을 들어보자.

 “하늘의 모든 물체는 각각에 대하여 운동하고 있다.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고, 태양은 특급열차보다 훨씬 더 빠르게 헤라클레스 자리의 한 점을 향하여 운동하고 있으며, 소위 ‘고정된’ 별들도 이리저리 급히 달리고 있다. 하늘에는 킹즈크로 여행할 때, 여러분은 기차가 움직인 것이지 기차역이 움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차역들은 서로서로 그리고 주위의 지역과 지형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문학에서는 어느 것을 기차라고 부르고, 어느 것을 기차역이라고 부르든 여러분 마음대로이다. 그 문제는 단지 편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약속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인슈타인과 코페르니쿠스를 비교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사람들은 지구는 정지해 있고 천체가 하루에 한 번씩 지구 둘레를 돈다고 생각하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정말로’ 하루에 한 번씩 회전하고 있는 것이지, 태양과 별들이 매일 도는 것은 ‘겉보기’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갈릴레이와 뉴턴은 이 견해를 시인하였으며, 그것을 증명할 만한 일들이 많다고 생각하였다. 극지방에서는 지구가 납작해진다든가, 물체는 적도에서보다 극지방에서 더 무겁다는 사실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현대 이론에서는 코페르니쿠스와 그 이전의천문학자들 사이의 문제는 단지 편의의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모든 운동은 상대적인 것으로, 위의 두 진술 사이에 차이점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구는 하루에 한 번씩 회전한다”도 맞고, “하늘이 지구 둘레를 하루에 한 번씩 돈다”라고 말해도 된다. 두 진술은 똑같은 것이어서, 마치 우리가 어느 일정한 길이를 6피트라고 부르든, 2야드라고 부르든 상관없는 것과 똑같은 뜻이다.”(러셀, 김영대 역 『상대성 이론의 참뜻』)

『상대성 이론의 참뜻』 1장에서 이렇게 말한 러셀은 조금 뒤 4장에서 또 이렇게 단언한다.

 “기차의 운동이 ‘진짜’가 아닌 것은 지구의 운동이 ‘진짜’가 아닌 것과 같다. 즉, 운동에 관해서는 ‘진짜’라는 것이 없다. 인간이 ‘진짜로’ 큰 동물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서로 주장하는 토끼와 하마를 상상해보라. 그것들은 각각 자기의 의견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상대방의 의견은 순전히 환상의 비약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구의 운동이나 그렇지 않으면 기차의 운동이 ‘진짜’인지 아닌지에 관한 주장에는 별 뜻이 없다.”

 2장에서는 또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운동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물체라도 기준체로 삼을 수 있으며, 그것을 표준으로 다른 모든 운동을 판단할 수 있다…… 여러분은 운동을 판단하는 이들 방법 중의 어느 한 가지가 다른 방법보다 더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준체가 정해지기만 하면, 바로 그것이 가장 정확한 것이다.”

운동 상태가 상이한 여러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의견을 아무리 자연스럽고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이론 물리학에서는 이러한 편견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러셀을 더 인용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여러분들 중에는 혹시 이런 의문이 급 출현한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만일 상대성 이론이 맞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입장도 맞고 저 입장도 맞다면, 그래서 어느 입장도 객관성이나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면, 대체 ‘진짜 지식’은, 참된 지식은 어떻게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게 무슨 과학인가?

 

재미있는 것은 거의 동일한 이유에서 정반대로 상대성이론을 환영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임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면서, 모든 것이 주관적이라는 주장으로 날아가버리는 경우다. 파인만이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듯이, 예컨대 철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오, 그거 아주 간단하군 그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란 말이지! 상대적이 아닌 게 언제는 있었나? 이 대단한 아이디어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줄 게 틀림없다구. 물리학은 자연 현상이 관측자의 기준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증명했지. 정말 대단해!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그토록 어렵게 알아내다니 말이야!” 그러나 “초속 10만 Km로 달리는 자동차를 탄 채로 바깥으로 지나가는 빛의 속도를 측정하여 30만 Km라는 결과를 얻었을 때, 그 빛의 속도가 도로에 서 있는 관측자에게도 30만Km로 보일 것이라고 조용하게 말할 수 있는 철학자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다. 실험적으로 입증된 사실을 제시해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상대성이론에 ‘상대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정확히 말하자면 더 강하게 ‘절대적인’ 측면이 함의되어 있다. 엥? 우째 그런 일이….??? 이런 의문을 가지신 분들에게, 나는 최근 친구들과 함께 경험한 드라마틱한 사건에 대해 들려드리고자 한다.

어느 날 나와 내 친구들은 불현듯 인류를 위해 뭔가 뜻있는 일을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리고 모두 엄밀하고도 객관적으로 행동하자고 굳게 약조한 뒤, 각자 흩어져 백두산과 달, 태양으로 이동하였고, 한 친구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백두산에는 어떻게 잠입하였는지, 달이나 태양까지는 어떻게 이동하였는지는 따지지 말아주기 바란다. 어쨌든 이동했다고 치자). 그리고 그렇게 운동 상태가 상이한 여러 곳에서 천체의 운행 패턴을 관측하였다, 물론 엄밀하고도 객관적으로. 그러고 나서 다시 모여 서로의 관측 데이터를 비교해 보았다. 예상하시겠지만 우리의 관측 데이터는 모두 달랐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각자의 데이터를 가지고 그로부터 천체 운행의 패턴, 즉 우주 차원의 물리적인 법칙을 도출해보았더니, 글쎄 그 법칙이 모두 동일한 게 아닌가! 완벽하게 동일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몇몇 친구는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가 그토록 고생해서 많은 자료들을 얻었건만 그걸 물리법칙화해서 비교해보니 결국 아무런 차이도 없다니… 끌끌! 인류에게 뜻있는 일을 하기는커녕, 한심하게도 시간만 낭비한 게 아닌가! 좌중이 일순 침통해…… 지려는 순간 우리 중 한 명이 이렇게 외쳤다. 아냐, 우리는 정말 엄청난 걸 발견한 것일지도 몰라. 생각해봐! 백두산 관측소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관측한 친구와, 고속으로 비행 중인 비행기에서 관측한 친구가 마침내 얻어낸 물리법칙은 모두 동일하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 우주는 장소나 상황에 따라 다른 물리법칙을 갖는 게 아니라, 장소나 상황에 무관하게 동일한 물리법칙을 실현하고 있는 거야. 우주(Universe) 전체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의 보편성(universality)이라….. 어때, 굉장하지 않아? 우린 정말 굉장한 걸 발견한 거야!

우리 친구들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관측을 통해서도 우리 자신이 어떤 운동 상태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관측 대상이 ‘정말로’ 운동 중인지 정지 중인지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또 운동 중이라면 얼마만한 속도로, 어느 방향으로 운동 중인지에 대해서도 절대 무지하다. 오직 상대적인 측정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관측은 보편적인 물리법칙을 얻을 수가 있다. 이는 절대적인 앎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한낱 지구라는 행성의 주민들이다. 우주의 변방인 우리 은하, 우리 은하 중에서도 변방에 위치해 있는 태양계, 그 태양계를 방랑하는 한 행성(planet는 어원상 방랑자라는 뜻이다)인 이 지구의 주민에 불과하다. 그렇게 구석탱이에 거주하는 우리가 범우주적으로 작동하는 보편적인 물리법칙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우주 전체의 운동 패턴이 절대적으로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절대적인 과학 지식을, 불변하는 물리법칙을 얻을 수 있다는 이 역설!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함의되어 있는 절대성이고, 그래서 그는 원래 이 이론의 이름을 ‘불변 이론’(invariant theory)이라고 붙이려 했던 것이다(『안녕! 아인슈타인』).

 

그런데 뭐 눈치채셨겠지만, 사실 이런 내용은 우리 친구들이 최초로 발견한 게 아니라 약 400년 전에 갈릴레이가 발견한 것이다. 이를 소위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라 부른다. 흔히 상대성원리라고 하면 아인슈타인을 떠올리지만, 원조는 갈릴레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상대성이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아인슈타인이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를 두 가지 근본 가정 중 하나로 전제하고 그 위에서 자신의 이론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또 하나의 기반은 ‘광속 불변의 원리’다.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는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가능하지만, 광속 불변의 원리는 정말이지 상식에 정면으로 반한다. 내가 정지 상태에서 광속을 측정하든, 비행 중인 비행기에서 측정하든 언제나 광속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의 속도를 내가 땅 위에 서서 측정하면 당근 시속 100Km로 측정되지만, 그 차와 동일한 방향으로 시속 60Km로 달리는 차에서 측정하면 시속 40Km로 측정되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아니, 겨우 이 정도가 아니다. 만일 광속이 관측자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게 늘 30만Km로 측정된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예컨대 내가 시속 1Km로 걷고 있고 어떤 차가 같은 방향으로 시속 100Km로 운행 중이라고 하자. 나와 이 차가 12시에 출발했을 경우, 한 시간이 지난 1시에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나는 그 차보다 99Km 뒤에서 걷고 있겠지. 아주 잘 대답했다. 그런데 만일 12시에 나와 차만이 아니라, 광속으로 달리는 다른 차도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출발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1초 후에 이 광속차와 나, 그리고 시속 100Km의 차는 거리가 얼마만큼 떨어져 있을까? ?&*%@@ 만일 광속이 일정하다면, 광속차는 나로부터도 30만Km 떨어져 있고, 시속 100Km짜리 차로부터도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어야 한다(간단히 말해서, 어떤 대상이 초속 30만Km로 측정되었다는 것은 1초가 지난 뒤 측정자와 측정 대상 간의 거리가 30만Km 벌어졌다는 이야기니까). 심지어 우리의 진행 방향과 다른 방향, 예컨대 반대 방향으로 달린 자동차도 그 광속차와의 거리는 30만Km여야 한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라. 왠지 오싹한 기분이 들지 않는가?

사실 광속이 늘 불변한다는 것은 당시에 여러 번의 반복 측정에 의해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게 도대체 물리적으로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정해져 있다. 광속이든 뭐든, 관측자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게 늘 동일한 속도로 측정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광속이 그런 식으로 늘 초속 30만Km로 측정되는 것은, 광속이 너무 빨라서 우리의 관측 장치의 정밀도로는 그 차이를 잘 잡아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측정 기구나 기술이 더 발달하면,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다른 속도값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생각안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바로 앞 단락에서 말한 광속차와의 상이한 거리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상상해 주시기 바란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천재인지 광인인지 모를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내는 광속이 일정하다고 하는 이 기이한 경험 현상을 곧장 광속 불변의 원리라고 설정해버렸다. 이해가 불가능한 반(反)합리적 현상을 원리로?! 어케 그런 일이.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 추측(지금부터 그 내용을 ‘상대성원리’로 칭할 것이다)을 가정으로 삼을 것이고, 이 밖에도 또 하나의 가정을 도입할 것인데, 이것은 단지 겉보기에만 앞의 가정과 모순된다. 빛은 언제나 진공에서 방출하는 물체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게 일정한 속도 c로 전파된다. 이 두 가정들로부터 정지한 물체에 대한 맥스웰의 이론을 기초로 삼는, 간단하고 일관된 운동체의 전기역학 이론을 얻을 수 있다. ‘빛 에테르’의 도입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증명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전개될 견해는 특별한 성질을 가진 ‘절대적으로 정지한 공간’을 도입하지도 않고 속도 벡터를 전자기적 과정이 일어나는 진공 상의 한 점과 연관시키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이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이 이제 싸워야 하는 근원적인 난제들이다(『100년만에 다시 찾는 아인슈타인』).

이것은 1905년 논문의 도입부이다. 앞부분에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와 광속 불변의 원리를 전제로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절대적으로 정지한 공간’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말인즉슨 상대성원리와 광속 불변의 원리,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한 새로운 과학을 수립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정지한 공간’ 따위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에 ‘빛 에테르’의 도입이 불필요하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광속 불변 현상을 원리로 도입하고, 그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를 아울러 도입하기. 그리고 두 가지를 근본적인 가정으로 대등하게 설정하기.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설정을 늘어놓으면서 한다는 말이 그건 ‘겉보기에만 모순된다.’는 것이다. 스물일곱 먹은 새파란 젊은이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가 대담한 시도를 감행함으로써 물리학에 혁명이 발발하였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사태, 즉 뉴턴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이 붕괴되고 보편적인 시간이란 게 불가능해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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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아인슈타인

 

나는 조금 아까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는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갈릴레이의 것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대담한 것이었다. 하긴 그렇지 않았더라면 구태여 아인슈타인이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를 근본적인 두 가정 중 하나로 선택했겠는가?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는 어떤 점에서 그토록 대단한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천동설은 과학적인 근거 없이 기독교의 지지만으로 중세를 지배한 이데올로기였다는 상식을 말이다. 우선 천동설은 오랜 기간 동안 서구를 지배한 과학 이론이었던 만큼 대단히 정교했다(후대에 이 정교함은 과도한 복잡성이라는 이름표가 붙여지면서 비난의 대상이 된다). 또한 천동설은 수많은 천체 현상들을 상당히 훌륭하게 설명하였고, 여러 가지 천문 현상을 대단히 정확하게 예측하였다. 그러한 정교함과 설명 및 예측 능력이 없었더라면, 설령 종교적 억압이라는 요소가 강력하게 작동했다고 해도, 어떻게 1000년 이상을 버틸 수 있었겠는가! 오죽하면 지동설의 선구자인 코페르니쿠스도 천문 계산을 할 때 종종 천동설을 채택해야 했겠는가!

천동설에 무슨 정교함이나 설명 및 예측 능력 따위가 있었단 말이냐……고 물으실 분들을 위해 몇 가지만 들어보기로 하자. 우선 우리는 태양과 별과 달 등 모든 것들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을 우리 눈으로 직접, 그것도 매일 본다. 이것이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경험적인 증거다. 거꾸로 지동설은 도대체가 반(反)합리적이다. 만약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다면, 게다가 매일 자전까지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나 건물들이 비틀거리며 쓰러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일을 어디서도 목격할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모든 물체가 아래로 낙하하는 엄연한 현상을 보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 달을 보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니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 아닌가! 만일 태양이나 목성 같은 다른 게 우주의 중심이라면 왜 달이 하필이면 지구를 중심으로 돌겠는가! 지구가 정지해 있으니 별의 시차(視差)가 측정되지 않는 건 당연지사! 무엇보다도 지구 중심 모델이 태양 중심 모델보다 행성 궤도를 훨씬 더 잘 예측하지 않는가! 앞서 말했듯이,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실제 천체 관측에서는 천동설을 종종 이용해야 했다. 사이먼 싱에 따르면 심지어 갈릴레이의 혁명적 발견과 이론 직후에도 지동설은 지구 중심 모델에 대해 6 대 4 정도의 우위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일찍부터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던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확신하고 천동설을 그릇된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말했듯이 천동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과학적인 이론이었고 지동설에 대한 강력한 반론들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물론 천동설도 여러 가지 약점이 있었지만, 열세에 있었던 지동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강력한 반론들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상이 매일 모든 사람의 눈에 관찰된다는 것이었고, 아울러 만일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이동 중이라면, 지상의 우리는 왜 그토록 격렬한 운동을 직접 감각할 수도 없고 또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할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당신이 지동설을 확신하는 갈릴레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수많은 책들과 선생님들로부터 갈릴레이가 관찰과 실험에 입각하여 천동설을 반증하고 지동설을 입증했다고 배웠다. 그러나 당대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천동설의 수많은 근거들을 충분히 반증하거나 박약한 지동설의 근거를 충분히 확보하기에 한 사람의 생애는 너무 짧은 것이었다. 갈릴레이의 천재성이 빛을 뿜어낸 것은 바로 이러한 역경 속에서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율리시즈 갈릴레오는 상상 초월의 술책을 발명하여 이 난국을 타개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동설이 맞든 천동설이 맞든, 지구의 관찰자는 천체가 지구를 도는 것으로 관찰할 수밖에 없다고. 설령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할지라도, 지구인들 눈에는 태양이 지구를 동에서 서로 도는 것으로 관찰될 거라고. 생각해보면 그거 참 맞는 말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설령 지구가 격렬하게 이동 중이더라도, 지구 상의 모든 존재들은 그 영향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지구의 존재들 모두가 지구의 운동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해 중인 배의 돛대 꼭대기에서 돌멩이를 떨어뜨리면, 당시 천동설 지지자들의 주장한 것처럼 배 저 뒤편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돛대 바로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처럼 돌이 돛대 바로 아래로 떨어지는 현상은, 지구가 움직이는 경우든 정지한 경우든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릴레이의 위대한 상대성원리다. 당신도 느끼셨겠지만, 갈릴레이는 천동설의 근거들을 반증하고 지동설을 입증한 것이 아니다. 그는 천동설과 지동설이 주요한 현상 차원에서는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천동설이 자랑하던 수많은 근거들 중 다수를 지동설도 지지하는 근거로 환골탈태시켜버렸다. 혹은 양자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근거가 못 되게 만들어버렸다. 아울러 지동설의 약점들이 더 이상 약점이 아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되자 남은 과제는 지동설의 결정적인 증거를 찾고, 천동설의 결정적인 약점을 찾는 게 되어버렸다(지금 내가 한 이야기는 과학사가 파울 파이어아벤트가 『방법에의 도전』에서 펼친 놀라운 주장에 바탕을 둔 것이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 이야기해보자. 지구가 움직이더라도 지구 내 모든 현상들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상태와 동일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따라서 지구의 현상을 아무리 면밀히 관찰해도 지구의 운동 상태는 알 수가 없다. 또한 지구에서 지구 바깥의 운동을 관찰해서는 상대적인 거리의 변화를 알 수 있을 뿐, 실제로 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구에서의 관찰만 가지고도 범 우주적인 자연 법칙, 물리 법칙들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갈릴레이의 신과학이 근대 과학 혁명의 시초라고 승인하는 사람이라면, 지동설이 맞고 천동설이 틀리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건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나나 파이어아벤트의 기괴한 해석이라고 판단할 분들이 있을 텐데, 그런 분들에게는 갈릴레이의 주저 『두 가지 세계 체계에 대한 대화』를 정중하게 권해드린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이무현 역, 교우사)라는 제목 하에 우리말로 훌륭하게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은 모두 나흘 간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기서 갈릴레이의 분신인 살비아티는 처음 사흘 동안, 방금 내가 개관한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 지동설의 강력한 근거로 조석(潮汐) 현상을 든다. 갈릴레이에 따르면, 하루에 두 번씩 조석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지구가 공전과 자전이 결합된 운동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이 당대에 어떻게 평가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얼마 안 가 뉴턴에 의해 완전히 뒤집어진다. 뉴턴은 조석 현상을, 달의 인력에 의해 지구의 물이 끌리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정리를 해보자면, 갈릴레이가 제시한 지동설의 근거는 그리 많지가 않고,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제시한 근거는 오히려 잘못된 것으로 판명난다. 그러니 갈릴레오가 관측과 실험에 의해 지동설을 입증했다고 말하는 것은, 첫째 갈릴레이가 입증에 실패했다는 사실과 맞지 않고, 둘째 갈릴레오의 핵심 전술인 상대성원리를 완전히 배제해버린다.

지동설-천동설 관련한 나의 주장에 대해 나는 굳이 더 논거를 제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수용하는 사람이라면, 지동설이나 천동설 중 어느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은 그르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 또한 그런 주장은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도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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