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과거의 인디언, 미래의 인디언

- 오항녕

‘서양현대사’ 강의 시간. 백효리가 외우기 시작했다. “민중운동을 위해 승리의 기록을 날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 서술의 목적이 과거를 지배하는 실패만을 요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사가들은 끝없는 패배의 순환에서 공모자가 되어 버린다. 역사가 창조적이라면, 또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도 가능한 미래를 예견하려면, 덧없이 스쳐 지나간 일일지언정 사람들이 저항하고, 함께 힘을 모으며, 때로는 승리한 잠재력을 보여준 과거의 숨겨진 일화들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들을 강조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어쩌면 순전히 희망사항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미래는 수세기에 걸친 전쟁의 견고함에서가 아니라 덧없이 지나간 공감의 순간들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워드 진이 그의 《미국민중사1》 33쪽에서 한 말이다.(유강은 옮김, 이후, 2006)

나는 레포트를 내주지 않는다. 학생들이 레포트를 쓸 만큼 훈련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른 수건을 짜봐야 힘만 들고 천만 상한다. 적시는 게 먼저다. 그래서 수업 시간마다 교재에서 감동 받은 ‘씨앗문장’을 옮겨 적고, ‘암송’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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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그 깊이를 이해하기 어려운 학자, 코젤렉이 비슷한 말을 했다. 홉스봄은 친구 코젤렉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승리의 편에 있는 역사가는 단기적인 성공을 장기적으로 소급되는 목적론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들기가 쉽다.(‘원래 우리가 이기게 되게 되어 있었다’고 역사를 합리화 한다는 말이다.) 패배자는 그렇지 않다. 패배자의 주요한 경험은 모든 것들이 희망했던 것이나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발생했다는 것 자체이다. …… 패배자들은 왜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은 일어나지 않고 다른 어떤 것이 발생했는지 설명해야 할 필요를 더 크게 느낀다. 이것은 중기적 원인과 장기적 원인에 대한 연구를 자극할 것이다. 이 연구는 예기치 않은 일의 발생을 설명하고 …… 더 지속적인 통찰력을 낳고 …… 결국 더 큰 설명력을 낳는다. 단기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승리자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 이해의 증대는 패배자로부터 나왔다.” 에릭 홉스봄 지음, 강성호 옮김, 《역사론》(민음사, 2002) 384~3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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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생들에게 ‘밀양 송전탑 반대 이유’를 수업자료로 나누어주었다. 두 쪽 분량으로 정리한 자료였다. 거기에는, “첫째, 전자파 때문에 죽은 땅이 되는 밀양: 한전은 밀양에만 76만 5천 볼트의 초고압 송전탑을 69개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둘째, 서울 사람 때문에 희생되어야 하는 노인들:겨울에 쓰는 전기장판밖에 쓸 일 없는 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기고 집을 빼앗기고 고향을 빼앗기고 있다. 그런데도 ‘이기주의’ ‘님비’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더하고 있다. 셋째, 적절치 못한 보상 문제: 한평생 농사밖에 모르던 양반에게 6천만 원을 주고 떠나라고 한다. 더구나 한국전력이 일부 주민들을 돈으로 매수해 남은 공동체마저 파탄 낸 정황도 드러났다. 넷째, 직무를 유기하고 어르신들의 대안을 무시한 한전:대안을 내놓아야 할 한전은 뒷짐만 지고 지하 매설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밀양 주민의 의견을 묵살하고 무조건 철탑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만 되풀이했다. 다섯째, 전력난 때문에 송전탑이 불가피하다는 한전의 주장은 거짓: 밀양에서 벌어지는 모든 폭력적인 사태는 UAE원전 수주를 둘러싼 이명박 정권의 사기서 비롯되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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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효율성을 내세운 개발은 항상 ‘국민을 위해서라는 애매모호한 인도주의’의 견지에서 합리화된다. ‘당하는 그들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워드 진은 또 이렇게 말했다. “이런 갈등의 세계, 희생자와 가해자의 세계에서, 가해자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 생각 있는 사람이 할 일이다.(32쪽) …… 콜럼버스로부터 코르테스, 피사로, 청교도들에게 이어진 이 모든 유혈과 속임수가 인류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인종말살의 이야기를, 보다 중요한 인간 진보의 이야기 속에 묻어 버린 모리슨이 옳았던 것일까? 스탈린이 소련의 산업 발전을 위해 농민들을 죽였을 때라든지, 처칠이 드레스덴과 함부르크를 폭격했을 때, 트루먼이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했을 때 말한 것처럼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44쪽) 만약 인간 진보를 위해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희생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희생당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하는 게 가장 중요치 않을까?(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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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 내가 인용한 ‘씨앗문장’은 모두 오늘(2013년 10월 10일 목요일) 학생들의 노트, 암기에 들어 있던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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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 생활이 야만의 삶이듯, 농촌 생활 역시 근대인들에게는 도회보다 못한 삶이었다. 말은 안 하지만 농촌의 삶을 ‘은근히 비-문명처럼 여기도록 조장되었다.’ 아직도 한국전력은 ‘원활한 전기수급’을 이유로 들고, ‘원자력만한 효율성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다. ‘삶의 터전’이라든지, ‘이웃’, ‘땅’, ‘정’, 이런 어휘는 한전을 비롯한 개발주의자들의 사전에는 없다.

영국/미국인들이 아메리카를 침략하고 인디언을 학살했던 속임수와 야만성 속에는 무한한 사유재산에 대한 욕망과 충동이 숨어 있었다. 깃발을 꼽을 수 있는 데까지 힘껏 달려서 ‘내 땅’이라고 확정지어야 했다. 땅이 부족하면 욕망과 충동을 종족 전체를 살육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아마 송전탑을 반대하는 밀양 주민들에게서 ‘밀양성(密陽性)’를 거세하고 싶은 것이다. 인디언들에게서 인디언성을 제거하여 미국 시민, 브라질 시민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처럼.

나는 인종말살과 민족말살을 나누는 인류학자들의 논의가 좀 한가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인종말살만 종족의 절멸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민족말살 역시 동화를 거부하면 절멸을 강요한다. 둘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른 선택일 때가 많다. 그래서 밀양에 투입된 공권력이 어둡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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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이 ‘역사의 패배’가 갖는 의미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켠에서 풍겼던 다소 슬픈 어조는 유보해야 할지 모른다. 그가 말한 ‘역사의 희망’에 방점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디언 절멸 시도는(원주민 인구는 콜럼버스와 코르테스 이후 적어도 1/10 이하로 줄었다.) 자본주의를 앞세운 근대 문명의 가당찮은 오만과 함께 시작하여 간간히 승리를 거둔 듯이 보였는지 모르지만, 이제 시간이 흘러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이 근대 문명에 기죽지 않기 때문이다. 기죽기는커녕 반격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생활양식을 실천할 적절한 시점에 이른 듯하다. 밀양으로 인해 미래가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밀양의 저항은 인디언의 저항이다. 함께 살 수 있는 길에 대한 깨달음과 진화의 결과이다. 그래서 어떤 길이 낭떠러지인지, 그래도 걸을 만한 길인지 안다. 밀양과 아메리카의 연기(緣起), 되살아남이다.

밀양은 인디언이다. 복괘(復卦. 땅은 위, 천둥은 아래, 그래서 지뢰(地雷) 복), 땅 밑에서 천둥이 치며 치세(治世)로 나아가는 《주역》의 괘이다. 달로는 11월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밀양 인디언들이 이길 듯하다. 또 이겨야 한다. 한국전력이 이기면 일부만 잠깐 살고 결국 모두 패배할 것이지만, 밀양 인디언들이 이기면 다 같이 살고 그렇기에 모두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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