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타자의 광기 – 지구를 지켜라를 보고

- 성현

02_JGBPO4_2003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보았다. 첫 번째 봤을 때는 중3 때여서 그런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재밌는 SF물로 보았다. 수능 끝나고 우연하게 다시 봤을 때는 중3 때 봤을 때보다는 나름 영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보였다. 허나 내가 느낀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역시 인간은 나쁜 동물이야’ 정도였고, 영화가 반전 또한 괜찮아서 그냥 즐겁게 타임킬링 한 영화로 기억에 저장해 놓았다. 최근에 우연한 기회로 이 영화로 다시 보게 되었는데, 나는 정말 경악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물 간의 관계가 갖고 있는 의미는 단순하게 보기에는 너무 심오했고, 영화에서 나타나는 각 사물마다 갖고 있는 상징성 혹은 의미 또한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치를 보고 병구와 순이를 광인이라고 생각 안 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복장으로 외계인이 있다고 설명하는 병구나 덩치에서 풍기는 느낌과 달리 바비인형을 좋아하고 여린 마음을 갖고 있는 순이. 행동 방식도 엉성하고 이상하며 영화에서 보이는 그 둘의 외모 또한 이상하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광인이면 이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광인에 대한 이미지를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모습에 심어 놓았다. 그러한 것에 속은 나는 처음에는 당연하게 ‘미친 년놈들이군“하면서 그들을 바라보았고, 외계인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병구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면서 그 둘의 사랑 또한 그냥 미친 년놈들의 미친 짓거리로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진실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면서(버스 안에서 순이의 눈물) 내가 위에서 서술한 것을 근거로 그들의 관계를 광인들의 사랑이라고 폄하했던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광인이라고 판단했던 모든 근거들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왜 나는 그러한 기준으로 그들을 광인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정말 그러한 기준이 광인을 판단하는 보편적인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들인가? 그리고 그 기준을 만들어 낸 것은 무엇일까? 감독은 광인들에 대한 이미지를 병구와 순이라는 전형적인 인물들로 드러내고 그러한 전형성에 길들여져 있던 우리들의 시선을 고발한다. 감독의 고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강만식이라는 인물로 지배계급의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지배계급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병구와 강만식의 대립을 통해 현 우리사회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만식은 자아도취로 똘똘 뭉쳐 있는 인물이다. 납치됐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병구에게 지지 않으며 끊임없이 “너희들은 나를 못 이겨”라는 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자존감을 지킨다. 영화에서 그는 외계인으로 대표되는데, 이 외계인은 우리(피지배계급)와 다른 족속이다. 아니 그들만 그렇게 생각한다. 영화 스토리로 보면 지구는 그들을 닮은 실험 인간들이 만든 곳이다. 그들과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자들인데 외계인들은 이러한 실험 인간들을 철저하게 타자로 취급한다. 그리고 실험 인간들의 행동들이 단순히 그들의 무능함 혹은 부족함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고 인간들의 사태가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생각이다. 일단 왕자라는 그의 지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외계인의 사회 또한 철저한 계급사회이다. 그리고 UFO로 돌아가서 자신의 신하에게 하는 구타 행위를 보면 그들 또한 굉장히 폭력적임을 알 수 있다. 그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지구인을 지구 전체의 안녕을 위해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 몇 명은 수단으로 이용해도 좋다고 본다. 유전자 조작이라는 명목 아래 진행되는 수많은 실험들. 이렇게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하고 보다 용이한 실험을 위해 각 인간에게 갖가지 고통을 가하는 것을 “고통이 많아야지만 실험이 용이하다”면서 너무나 손쉽게 인정하고 묵인한다.

이렇게 우리를 통제하고 수단으로 이용하는 외계인에 대항하기 위해 병구는 혼자서 싸운다. 하지만 그 싸움은 굉장히 힘겹고 외롭기 때문에 끝까지 헤쳐 나가기가 쉽지 않다. 그는 그러한 고통을 잊기 위해 약물에 의존한다. 나는 여기서 지금까지의 수많은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이 생각났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게 만든 엄청난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했던 예술가들과 철학가들. 들뢰즈, 알튀세르, 이상과 같은 사람들은 당시 정신분열자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이들이야말로 철저한 리얼리스트였다.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의 실현을 가로막는 현실들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파헤쳤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냉소했고, 이러한 시선에 저항하는 그들을 세상은 광인으로 파악했으며 또 그들은 이러한 시선에 지쳐 반쯤 미치기도 하였다.

영화에서 병구도 마찬가지이다. 결과적으로 그야말로 진정한 리얼리스트였다. 결과적으로 외계인은 진짜였고, 그가 막지 못해서 지구는 소멸되고 마니까. 물론 병구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취했던 행동들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그는 괴물을 잡기 위해 자기 스스로 괴물이 되었다. 괴물을 잡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외계인이라고 의심되는 자들에게 각종 비인간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이는 분명히 옳지 않은 행동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과연 사회는 병구의 말에 귀 기울여 주었는가? 병구가 진심을 다해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외쳤을 때, 그의 말을 들어주려 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엄마, 아빠, 여자친구 등등 그의 편이었던 몇몇 사람조차 사회가 다 빼앗아 갔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핍박하고 착취하였다. 사냥꾼들이 호랑이를 잡을 때는 절대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는다. 호랑이가 주로 나타나는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급습하여 호랑이를 죽인다. 그리고 절대 혼자서 호랑이를 잡지 않는다. 하지만 병구에게는 동료가 거의 없었다. 그의 손에 총자루를 쥐어 주며 힘내라고 도와준 사람도 없었다. 그는 혼자서 계획하고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병구가 괴물이 되어 가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영화에 나오는 경찰들처럼 사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방관하고 있지 않았던가? 추 형사도 서 형사도 병구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다. 추 형사에게 병구는 자신의 마음의 반만 열어 주었지만 추 형사는 그것조차도 믿지 않는다. 그가 불쌍했었고 힘들게 살았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절대 그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추 형사에게 병구는 철저하게 범인이었고 끝까지 분석하고 파헤쳐야 할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시켜줄 수단이었을 뿐이다. 추 형사는 끝까지 철저하게 자신이 믿은 것만을 바탕으로 병구를 파악했다. 결국 추 형사는 병구에게 죽게 되는데, 이는 이렇게 자신만을 믿은 채 이웃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있는 방관자와 같은 우리들이 언젠가 병구와 같은 핍박받는 자들에게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서 형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병구가 “내가 이렇게 미쳐가는 동안에 너희는 뭐했어!”라며 절규를 했음에도, 병구와 강만식이 그렇게 진지하게 외계인에 대해 얘기했을 때도 그는 그 둘을 믿지 않았다. 병구가 후반에 자신의 모든 연구 서적을 서 형사에게 주며 진심으로 서 형사를 대했지만 서 형사는 그것을 다 내팽개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사적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병구를 죽인다. 형사는 법의 이름으로 범죄자를 처단한다. 법을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병구는 분명 범죄자다. 그리고 당연히 법을 기준으로 보면 강 사장을 구출한 서 형사는 잘한 것이다. 근데 그렇게 법의 이름으로 보호해 준 강 사장은 결국 지구를 멸망시킨다.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병구가 그렇게 미쳐 갈 때 법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렇게 많은 비리와 편법을 저지른 강 사장은 왜 법에 의해 처벌 받지 않은 것일까?

이 영화는 각 인물들을 통해 각종 계급의 전형성을 보여줌으로써, 그 전형성대로 계속 살았을 때 우리가 처하게 될 미래를 다소 극단적인 결말로 시사해 준다. 우리는 너무 손쉽게 광인들을 무능력자로 규정한다. 광인 같은 극단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수많은 하층민들을 보고 무능력자로 규정하고 그가 하층민이 되게 된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버린다. 최근 수많은 학생들이 왕따를 비관하며 자살하고 있다. 왕따를 가한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흔히 이런 대답을 한다. “왕따들은 왕따를 당할 만한 짓을 해요.” 도대체 왕따를 당할 만한 짓은 무엇일까? 그러한 짓을 규정하는 건 무엇일까? 책임을 개인에게 돌려버리는 것은 절대 개선책이 될 수 없다. 그러한 태도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행위이고, 방관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수많은 부조리들을 더욱 공고화시킬 뿐이다. 중요한 것은 광인을 형성시킨 배치이다. 배치를 끊임없이 파헤치고 고발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 해야 할 일이고 이 영화는 그것을 정말 잘 해내 주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