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NOTE ROUGE (레드 노트)

음향음악 – (1) 새로운 음악과 음악을 새롭게 듣는 법

- 이보미

음향음악 – (1) 새로운 음악과 음악을 새롭게 듣는 법

1960년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음악은 1950년대를 풍미했던 음렬음악1)과 우연음악2)의 경계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태동하게 되었다. 이 시기 20세기 음악사에서 뚜렷하게 방향전환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새로운 음악을 음향음악, 음향작법 Klangkomposition, Sound-Mass Music이라 일컫는다. 음향음악이란 어떤 음악을 말하는 걸까.

1) 1950년대 이후의 총렬주의, 전음렬주의 Total Serialism, Integral Serialism를 말한다. 음고, 음가, 강세, 어택의 serial을 부여하여 그를 토대로 작곡된 음악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음렬음악’은 쇤베르크의 12음음악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12음음악은 음고에만 12개의 serial을 적용한다.

2) 음악 작품에 우연성을 도입한 양식을 말한다. 존 케이지의 음악 양식으로 대표되며, 이외에 여러 작곡가들이 작품에 우연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도입했다.

 

음향작법의 근본 테제를 알려면, 그것이 딛고 넘어서는 지점을 명확히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음향음악만이 갖는 고유한 소재와 기법, 그리고 그것이 창조해내는 새로운 음악적 형식이 어떠한지 그 의의를 곱씹어 보기 위해서는 우선, 1950년대 유럽 전반에 걸쳐 주류 작곡계를 휘어잡았던 음렬음악의 문제의식을 거쳐 가야 한다. 이 시기 음렬 체계, 음렬적 사고방식은 작곡상 모든 문제의 일반적인 토대로 간주되었다.

1950년대 아방가르드 작곡의 중심 역할을 했던 다름슈타트 하기현대음악제에서 불레즈(Pièrre Boulez, 1925~),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2007), 노노(Luigi Nono, 1924~1990), 푸쇠르(Henri Pousseur, 1929~2009) 등의 젊은 작곡가들은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을 전환점으로 삼았다. 그들이 처음으로 음렬을 창안했던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1874~1951)를 제치고 베베른을 위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쇤베르크는 표현주의적 무조음악을 극복하는 새로운 기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12음을 동등한 빈도로 사용함으로써 조성을 해체시켜놓고, 그 가운데 기존의 관습적 규범에서 벗어나, 무한한 가능성에 놓였다. 그는 그의 12음기법이라는 음고의 제한적 사용과 작곡상의 다른 면에서 갖는 무한한 자유 안에서, 자신의 기법이 형식상의 통일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전통적 악식과 테마-모티브적 작곡 방식을 끌어들여, 12음 음렬을 그 전통과 접목시키는 방식으로 작곡했다. 음렬을 마치 조성음악에서의 모티브처럼 다루었던 것이다. 하지만 베베른은 음악적 소재를 테마-모티브적 연관에서 완전히 해체하고 음렬을 작품의 구조적 토대로 사용했다. 음렬은 작품 자체의 기본 구조를 각인시키는 음정들의 기능이란 측면에서, 개개의 소재와 구조들 간의 관련성을 매개하는 근본 원리로 작동했다. 쇤베르크가 음렬을 테마화했다면, 베베른은 음렬을 탈테마화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의 구조적 작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불레즈, 슈톡하우젠 등의 젊은 작곡가들은 여기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고3), 1950년대 음렬음악을 전개해나간다.

3) 이들은 모두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1992)의 분석수업을 들었으며, 메시앙이 음악적 소재를 다루는 여러 방식에서 음렬적 사고의 단초를 보았다.

 

여기서 중요하게 전제되었던 것은 모든 음악적인 소재를 가공되지 않은, 가장 근원적인 소재로 환원하는 일이었다. 수세기동안 확립되어온 조성음악에서 음악의 3요소는 선율, 화성, 리듬이었다. 조성음악에서 이 요소들은 음악을 형성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각 요소들은 서로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즉, 선율을 화성, 리듬과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었고, 화성도 선율, 리듬과의 관련 없이는 온전한 의의를 갖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리듬 또한 선율과 화성과의 연관 아래 이해되었다. 이 세 요소가 결합하는 방식에 따라 악곡 안에서 프레이즈, 단락 등의 구성단위를 이루는데, 이 단위들이 모여 음악적 의미를 획득한다. 이렇게 악곡이 전개되어가는 과정에서, 세 요소간의 관습적 결합 형태, 관용적 음악어법들이 조성음악을 이루는 요체로서 확립되었다.

이러한 관습적인 관련을 깨뜨리고, 음렬음악에서 음은 이론적, 실천적으로 parameter로서 구성요소로 분해되고, 음향 사건은 각 개별 요소들의 논리적 조직으로 개별화되었다. 핵심은 음악을 결정 짓는 기본적인 소재를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 단위의 요소로 분해하고 해체하는 데 있었다. 여기에는 수학적·분석적 사고가 두드러졌다. 음고(pitch), 음가(duration), 강세(dynamic), 어택이라는 네 개의 파라미터들을 각기 serial로 순서 짓고, 작곡가는 이 serial을 작품을 구성하는 토대로 사용하였다. 작곡가는 작품을 쓰기 이전에 이 음렬을 미리 조직화하여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선율-화성-리듬이 서로에 의존적이었던 것에 반해, 음고-음가-강세-어택은 각각의 항에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쌓아왔던 음악 고유의 관습적 관련을 해체하고, 작곡가는 원점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근본적이라고 여겨지는 음의 구성 요소들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테마적 모티브적 작법과는 완전히 결별하고- 결합하고 조합했다. 이러한 해체라는 국면 속에서 기존 형식은 이제 통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때부터 새로운 음악의 전개에서 형식의 문제가 첨예화되었다.

<예보 –P.Boulez: Structure Ⅰa (1952) Copyright 1955 by Universal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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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레즈는 음고 음가 강세 어택 네 개의 parameter를 철저히 음렬화하여 이를 토대로 작품을 구성했다. 불레즈의 “Structure Ⅰa”는 1950년대 초기 음렬음악의 전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첫 번째 페이지 제1피아노의 강세는 ffff (12번)으로 시작하여 두 번째 페이지에서 mf (7번)으로 이어진다. 이를 보아 제1피아노의 강세 음렬로 original matrix에서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읽는 대각선 방향(↗)의 음렬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피아노의 강세로는 12, 7, 11, 5만이 쓰이는데, 이에 해당하는 ffff, mf, fff, quasi p만이 연주된다. 여기서 극단적인 다이내믹(ffff, fff)과 아주 세분화된 다이내믹(quasi p, ffff와 fff의 차이)만이 등장하면서 매우 특수한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제2피아노의 어택은 normal (5번)로 시작하여 그 다음 또다시 5번을 거쳐 두 번째 페이지로 가서 11번 어택인 tenuto staccato로 이어진다. 불레즈는 제2피아노의 어택으로 original matrix에서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읽는 대각선 방향(↖)의 음렬을 사용했다. 제2피아노의 강세는 5번인 quasi p로 시작하여 두 번째 페이지의 ppp(2번)로 이어진다. 이 음렬은 inversion matrix에서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페이지 제1피아노는 E♭으로 시작한다. 1로 시작하는 original음렬이다. 이 음고 음렬은 7마디 fermata전까지 쓰인다. 그 다음 제1피아노의 음고 음렬로 original에서 transpose(+6)한 음렬(original의 7번째 행)이 쓰인다. 그 다음으로 3번째 행의 original형이 쓰이는데, 1-7-3-…의 순서는 바로 inversion matrix의 1번째 행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제2피아노에서 쓰인 음고 음렬의 순서는 1번째 inversion, 7번째 inversion, 3번째 inversion이 쓰이고, 그 순서는 1-2-3-…으로 original matrix의 1번째 행에 해당한다. 이처럼 serial의 serial, 즉 상위의 serial도 철저히 이 음렬의 구조에 포섭된다. 음렬의 원리가 개개의 소재에서부터 구조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용되었다.

악보의 첫 두 페이지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음가는 2대의 피아노의 양손에 걸쳐 나타나는 배열로 인해 16분음표/32분음표 단위로 평준화된다. 이 같은 작곡 구성방식은 청중에게 궁극적으로 무연관한 것으로 지각된다. 음렬의 자동화된 방식은 완벽하게 무질서하고 무작위인 것처럼 들린다. 위의 곡은 이러한 난점을 잘 보여준다.

<표 –4 parameters for “StructureⅠa”>

matrices for structure 1a

표 -4 parameters

음악에서 형식이란 무엇일까. 2부 형식, 3부 형식, 푸가적 형식, 소나타 형식…. 이러한 악식론에서 지칭하는 여러 가지 양식을 넘어, 나는 이제 새로운 의미의 형식, 악식론이 아닌 음악적 형태론을 언급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구조와 형식을 구분할 것이다. 형식은 구조의 개념을 초월한다. 형식은 우리가 음악적 형태를 감각적으로 직관하는 현상을 말한다. 대상을 향해 직관하고 있는 주체를 반드시 전제로 한다. 구조의 레벨에서 보았을 때, 음악적 소재들이 여러 관련에서 조화되고, 울려 퍼지고 있는 소리의 형상이 자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구조적 자율성이 실현되고 있다고 말한다. 구조에서 스스로 만족한 자율성은 관조자와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향적인 긴장관계에 이르러서야 주체의 직관을 통해서만 비로소 ‘음악적 형태’로 인식된다. 형식은 이 형태를 감성적으로 지각하는 것, 청각적 감관에 바탕을 두는 것. 그렇기에 형식은 미학적 범주에 속한다.

조성은 단지 음고나 음고의 복합체가 계층적으로 조직된 하나의 시스템, 그 이상의 것이었다. 조성음악의 다층적인 짜임새라는 측면에서 구조와 형식은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굳이 그 둘이 구분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테마나 모티브, 그리고 이와 대비되거나 이에 주변부적인 소재들은, ‘형식’ 안에서 위계질서를 갖고 각기 차지한 ‘구조’상의 위치에 따라 그에 타당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테마적 작법에 의한 음악적 전개가 갖는 구조, 기능화성에 의한 구조는 곧 형식과도 같았다.

음렬음악의 초기 단계에서 작곡가들은 형식이 구조를 만들 때의 결과로서 당연히 따라 나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형식에 관한 문제는 구조적인 조직의 문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형식은 구조를 구성했던 것의 직접적인 결과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누군가 음렬음악을 들으며 형식을 듣는다는 얘기는, 그 음악 내부의 개개의 요소를 일일이 따라 들으며 음렬의 질서와 구조를 파악하며 듣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음악이 실제로 구현되는 과정에서 들리는 것을, 아마도 악보 상에서 작곡가의 중심 의도에서는 간과되었던 측면을 들었다는 것일 테다. 그는 사실상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아이디어에서 다소 비껴간 다른 양상을 듣는 것이다.

음렬음악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것, 음렬로 순서 지워진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의 지속적인 나열이다. 우리는 음렬 작품을 들으면서 감성적 지각의 층위에서 어떠한 패턴도 형성하지 못한다. 음악의 모든 소재, 음고, 음가, 강세, 어택은 열 두 반음의 평균율처럼 평준화되고, 둘 이상의 음렬이 여러 성부에 걸쳐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복합적 구조와 맞물려 완전히 무력화된다. 하나의 원형 음렬로부터 파생된 서로 다른 음렬들을 배치하고 조합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작곡가의 고된 노고를 배반하고, 음정의 특성은 마비되고, 강세 어택 등의 질적인 차이는 퇴색하고 만다. 메트릭한 시간의 경과에 따라 평준된 것들의 계속되는 배열로 인해, 음악은 전체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진행감을 주지 못한 채 계속 서있고, 거기서 형식적인 침묵이 나타난다. 음렬음악 작곡가들에게는 구조적 통일성이 일차적 관심이었던 것이다. 작품의 전 영역에 걸쳐 소재를 합리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주요한 문제였다. 그들은 세부와 여러 부분 구조들, 전체 구조의 동형성(isomorphism)에 유의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음렬적 사고’였다.

음향음악의 태동에서 가장 중요시 되었던 것이, 음악을 구성하는 작곡방식이 아니라, 들리는 음향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작곡가 리게티(György Ligeti, 1923~2006)는 무엇보다 울리는 소리의 음악적 상상력, 자체로서의 형식이 다시 자유자재로 구사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리게티에게 중요한 것은 원자단위의 소재, 즉 핵으로부터 모든 영역의 음악적 사건과 현상들이 유도되는 방식으로 관철되는 구조가 아니었다. 리게티 자신의 음악적 상상력에 따라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음향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음악적 형상이 그에게 중요했다.

또한 리게티는 음렬 작곡의 자동화된 결과와 우연음악의 우연의 산물 간에는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작곡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 영역에 걸쳐 주어진 음렬의 엄명을 따르는 것은, 예상과는 달리 통제 불가능한 가변성을 낳는다. I4), R5), RI6), 즉 거울형 대칭7)은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을 강화한다. 완전하게 확정된 음악과 불확정한 음악은, 작곡가가 전체로서의 소리의 형상, 구도를 창조해내는 주체적인 역할을 잃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같은 것이 되었다.

4) Inversion 전위. 원형의 음렬에서 음정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는 것. 원형에서 1번째 음에서 2번째 음으로의 진행이 상행이었다면, 전위형에서는 그 음정 간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하행한다. 음고의 수평선에 대칭이다. 귀로 인지하기에 비교적 수월하다.

5) Retrograde 역행. 원형의 음렬의 순서쌍을 거꾸로 진행하는 것. 원형에서 1에서 12로 순서 지워진 것을 12부터 1로 거꾸로 진행한다. 시간의 경과에 대칭이다. 데칼코마니를 연상해도 좋다.

6) Retrograde inversion 전위역행. 전위형 음렬의 순서쌍을 거꾸로 진행하는 것. 좌표상의 원점대칭으로 이해할 수 있다.

7) 앞서 언급한 I, R, RI에서 보였던 대칭을 통틀어 말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50년대 전개된 음렬음악에서는 이 관계들을 음고 외에도 음가, 강세, 어택에도 적용했기에 각주 3)~5)에서 설명한 것처럼 음정 진행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구체적인 음 대신에 (위의 matrix에서 보았듯) 숫자로 추상화하여 나타내고, serial은 숫자들의 배열 규칙을 지시한다.

 

작곡가에 의해 조작되고 구성된 구조는 소리의 결과와 부합해야 한다는, 항상 들려지는 음향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지적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0년대 작곡계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실험들이 활기를 띠면서 묻혀 졌던 것이다.

음악적 형태 혹은 형상이 지각되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은 내부관련이 간결하고 명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부를 바꾸어도 윤곽의 유사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형태의 인식은 지각된 대상 속에 있어야 할 ‘불변항(Invariant)’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시간의 진행에 따른 통시적인 형태의 내부 관련이 파악 가능해야 한다. 공시적·통시적 음향 형태의 청각적 감관을 의식 속으로 종합하고 통일하는 작용이 가능해야 한다. 그렇기에 미적인 통각은 필연적으로 전체를 지향해간다.

형식의 위기는 재현에 대한 권태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재현은 악곡의 전개에서 근본적인 성격의 것으로, 바로 음악적 형태를 파악하는 데 불변항으로 작용한다. 재현은 구체적인 형태의 동일성과 유사성을 전제로 하는데, 음 소재로부터 추상된 수들의 질서인 음렬은 초월적 표상으로 기능하기에 작품의 구조 속에 은폐되어 있다. 이 은폐된 구조는 재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소재의 모든 차원에 ‘거울형’을 도입한 것은 개개의 음향사건들의 관련성을 해체하고, 극도의 고립화를 초래했다. 형태를 인식하게 하는 불변항을 무력하게 해버림으로써 정적인 경직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시기 형식 논쟁에서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는 informel음악을 선언했다. 이는 형식이 없는 음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전통적인 형식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된, 외부의 강제에 의한 추상적인 형식들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을 말한다. 그래서 ‘자유의 예술’이라 일컫는다.

새로운 작곡은 음악적 소재를 새롭게 발견하거나 한정하면서 새로운 구조상의 복합체를 얻기도 한다는 것만으로는 이제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형식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진정한 새로움은 소재의 새로움, 혹은 구조적 작법의 새로움에 있지 않았다. 바로 형식의 새로움에 있었다. 형식감을 다시금 활성화시키는 것. 이 형식은 다양한 미시적 결합에 따른 음악적 형상의 질이 거시적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포착해내는 통각적인 미감을 촉진하는 것이다.

형식은 작곡가만의 문제는 아니고, ‘감각적으로 직관하는 현상’으로서 청중의 문제이기도 하다. 관련, 패턴, 형식에 대한 욕구는 청취의 행위 속에 언제나 잠재해 있다. 청중은 작곡가가 아무것도 의도하고 있지 않은 곳에서도 무언가 발견하려고 한다. 형식을 발견하는 일은 청취를 가장 자극하고 촉발시키는 방식이다. 청중은 음악을 새롭게 듣는 법에 능동적으로 가담한다.

조성음악에서는 구조의 세부에 숨어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청중에게도 지각될 수 있었다. 이전에는 조성에 의해서 지켜지고 있던 것이, 이제는 다른 수단으로 보증되어야 했다. 바로 형태의 감각적 직관, 곧 형식이다. 기존의 관습에 메여있던 음악의 소재들을 철저히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소재가 갖는 질적인 특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방식으로 더욱 효과적인 음악적 형태를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이 1960년대 새로운 방향으로의 작곡으로 나아가게 한 뚜렷한 원동력이 되었다.

리게티는 새로운 형식 형상화를 제안했다. 모든 발전 형식8)들을 거부하는 것, 위계구조적인 구성, 음악적 요소들의 상/하위 구분을 제거하는 것. 음악의 논리적 진행이라 여겨져 왔던 모든 인과적인 연관을, 단지 음악적 형상들의 성긴 짜임과 뒤섞임으로 대체하는 것. 음렬음악에서 부각되었던 낱낱이 해체된 개별적 음들은, 이제 여러 음들이 모여 층을 이룬 ‘음향’으로 대체되었다. 음향의 커다란 흐름이 음악적 진행을 주도하게 되고, 음향이 바로 음악형식을 가능케 하는 주인공으로 등극하게 된다.

특히 음향음악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은 ‘음색’이라는 요소였다.9) 음색은 음고, 음가, 강세와는 달리 -이들은 각기 분리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양한 요소들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음향적 현상이다. 상이한 음악 요소들의 다양한 결합을 통해 음색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착상에서 음색작법의 무한한 가능성이 열렸다.

8) 이 발전형식은 테마-모티브적 작법과 연관된다. 베토벤의 ‘발전수법’의 유산인데, 이는 이후 작곡가들에게 일종의 불문율로 간주된다. 조성이 해체된 이후에도 여러 작곡가들은 작곡가로서의 의식이 이 발전형식에 드러난다고 믿었고, 이 같은 발전수법의 사고방식을 암묵적으로 따른다.

9) 따라서 음향음악을 ‘음색음악’이라고도 부른다.

 

음렬음악에서 작품의 통일성은 음향의 내재적인 작용결과가 아닌, 음들의 관계 외부(수의 추상적 질서)에서 초월적으로 존재했다. 작품의 구성 원리는 작품 이전에, 작품 외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 달리, 음향음악을 추구했던 작곡가들은 ‘내재적’인 음향관계들의 결과로써, 음향 자체가 본래적으로 갖추고 있는 동역학에 의해 생성하고 운동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이들은 음렬음악의 초월적인 통일성, 우연음악의 비통일성과는 다른 방식의 새로운 통일성을 보여주었다. 관습적 용법이든, 추상적인 음렬이든, 그로 인해 가려져 있었던 음향 내부의 특유의 잠재적 에너지를, 음향 복합체로서의 질, 밀도, 감응들을 전면에 드러냈다. 아직 정의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았기에 더욱 풍성한, 다채로운 감각질들을 더욱 살아나게 만들었다.

다음 연재에서는 음향음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됐는지, 이러한 음향음악의 문제의식의 테두리 안에서 각자 독자적인 길을 걸었던 작곡가 리게티,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 1933~),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 1922~2001)를 소개하겠다. 그리고 그들의 작곡방식과 음악어법이 갖는 특이성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작품 가운데 내 귀에 의미 있게 다가왔던 작품들만을 엄선(!)하여 예보와 함께 소개하겠다.

응답 1개

  1. menestrello말하길

    음악을 감상한다는 것은 음악에 내재하는 형식을 감상하는 것인데 음렬음악의 경우 음악의 구조만 있고 작곡자가 의도한 형식은 없기 때문에 결국 감상자는 작곡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감상을 할 수밖에 없다는 부분이 인상적이네요.
    음렬음악은 작곡시에 감상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칫 기계적으로,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짜놓고 버튼 몇 개만 누르면 곡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소리의 배열을 과연 음악으로써 감상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악보 없이, 소리를 듣고 그 음고, 음가, 강세, 어택을 모두 구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수학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을 과연 감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곡가가 의도한 수학적인 규칙을 알아냄으로서 나름대로의 희열을 느낄 수는 있을지언정 과연 이것이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음렬음악보다는 작곡가의 의도가 뚜렷이 드러나는 음향음악이 좀 더 접근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마찬가지로 쉽지는 않겠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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