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마누라 출근 사수기

- 최요왕

새벽 다섯 시 반. 집사람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거의 동시에 꺼진다. 집사람이 반사적으로 끈 거다. 30분 후 다시 울린다. 알람 끄고 다시 잠들어버려 허겁지겁대는 경우가 허다한 집사람의 자구책이다.

집에서 나서기 10분 전에 나를 깨운다. 씻고 옷 입고 기본 화장이라도 하는 마누라와 달리 나는 옷 입고 냉수 한 잔에 화장실만 해결하면 된다. 여섯 시쯤 집을 나선다. 집사람은 승용차로 나는 화물차로 양수역에서 만난다. 화물차는 주차해 놓고 승용차로 옮겨 탄다. 운전자는 물론 나다. 조수석으로 옮긴 집사람은 거의 바로 잠이 든다. 6호선 봉화산역까지 삼십여 분 동안 아주 꿀잠을 잔다. 도착해서 깨우면 부시시한 머리에 게슴츠레한 눈으로 비척비척 전철역으로 간다. “수고해.” “어. 요왕 씨.” 삼십 분쯤 걸려 안암동에 있는 회사에 도착한단다. 나도 그 정도 걸려 집에 돌아와 큰애를 학교에 태워 준다. 올 초부터 새로 바뀐 매일 아침을 시작하는 일과다. 집사람이 안암동으로 출근하면서 많이 양호해진 건데 그래서 가끔 혼자 출근하기도 한다.

 

2006년에 식구들이 모두 양수리로 옮기면서부터 집사람의 신산한 출퇴근 노역이 시작되었다. 출근지는 구로. 대중교통만 이용하면 편도 두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다. 거기에다 일곱 시 반까지 출근을 해야 했다.

차로 출근시켜 주기 시작했다. 구로까지는 무리다. 여러 노선을 고민했고 결론은 동서울터미널. 다섯 시 기상. 다섯 시 반쯤 집에서 출발. 이때도 각자의 차로 나가서 양수역에서 한 대로 합친다. 퇴근은 집사람 몫이기 때문이다. 사십 분쯤 걸려 동서울터미널에 내려 준다. 집사람의 다음 코스는 2호선 전철로 40분 걸려 대림역까지 이동 후 마을버스로 10분 정도 걸리는 회사까지 가면 출근 완료다.

문제는 퇴근이다. 회사에서 구로 전철역까지 버스로 이동. 1호선으로 용산에 와서 중앙선으로 갈아타고 덕소까지 온다. 다시 덕소에서 버스를 타고 양수리까지. 양수리에서 승용차로 집까지. 이게 보통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이었다. 항상 녹초가 되어서 집에 온다. 특히 덕소 양수리 구간을 힘들어 했다. 커브길이 많고 운전이 과격해 멀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었다.

당시에 중앙선 전철이 계속 연장 공사 중이었다. 도심, 팔당. 한 정거장씩 개통되던 기간이 왜 그리 더디게 느껴지던지. 2007년을 하룬가 남겨 두고 양수리까지 개통되던 날은 우리 식구들을 위한 날이었다. 출근하는 건 그대로였지만 퇴근이 획기적으로 편해졌으니 말이다. 세 번 갈아타는 게 두 번으로 줄었고 시간도 30분 가량 줄었다. 멀미할 일도 없어졌고! 꼬박 6년 동안 주 5일을 산 넘고 물 건너서 왕복 네다섯 시간 걸려 출퇴근을 해왔던 거다.

집사람이 면허는 있지만 동네 운전만 가능한 수준이다. 그리고 새벽같이 한 시간 운전해서 출근하면 좀 피곤할까. 항상 잠이 부족해서 쩔쩔매는 사람에게 장거리 운전을 하게 두기가 도저히 그랬다. 과연 태워줄 때면 죽은 듯이 잔다. 부족한 잠과 피로를 출근시켜 주는 차에서 해결한다.

그러한 세월 속에서 올 초 안암동으로 옮기게 된 사건은 집안의 경사 중에 경사일 수밖에 없었다. 편도 한 시간이 줄었고 힘들어도 집사람 스스로 제시간에 맞춰 출근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그전에는 태풍으로 길에 나무들이 쓰러지고 폭설로 차가 벌벌 기어 다녀도 출근은 시켜줘야 했었다. 아파서 드러누워서도 안 되었고 평일에 1박 하는 교육 등 행사는 어디에도 참석하지 못했었다. 지방에서 나는 초상은 물론이고. 아니 참석하지 않았다. 기꺼이.

 

집사람을 처음 만나 연애할 때는 수년 전부터 생각해 왔던 귀농의 꿈이 한참 무르익을 시기였었다. 귀농을 하려면 집사람과 이뤄지기가 거의 어려워 보였고 집사람과 이뤄지려면 귀농은 한참 동안 어려워 보였다. 협상을 했다. 결혼하고 10년 뒤에 농사지으러 가는 거로 하자고. 헌데 7년 뒤 2004년에 나 먼저 양수리로 내려왔고 식구들은 2년 뒤에 내려왔으니 내가 약속을 어긴 셈이 되었다. 어쨌든 그러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간호사인 집사람은 본인의 일을 계속하고 싶어 했는데 그러려면 서울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 혼자 귀농을 하고 가족이 합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고도 했지만 집사람은 가족이 서로 떨어져 사는 것도 절대 반대였다. 당시 유치원을 다니는 애들한테 아빠가 항상 곁에 있어야 된다는 주장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내가 농사를 짓고 싶듯 집사람도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맞는 거였다.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지역에 인연이 생겼는데 여기서는 힘들어도 출퇴근이 가능해 보였다. 그게 이 동네로 귀농하게 된 이유가 된 거다. 타협일까? 합의? 접점?

뭐가 됐든 객관적으로 난 집사람에게 죄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혼도 빈손으로 했다. 놀지는 않았지만 난 돈 잘 벌어 주는 서방이 못 된다. 거기다 농사라니! 그런 서방도 서방이고 애들 아빠라고 이곳까지 따라왔는데 농사 몇 년만에 정부와 맞서 싸운다고 애간장을 태웠던 서방이다. 절대 이쁜 서방일리가 없다.

딱 하나. 출근만은 절대 사수한다.

이것만이 내가 집사람에게 해 주는 유일한 생색낼 수 있는 일이었던 거다.

 

내가 농사로 가족을 건사할 수 있을까? 집사람 고생 그만 시키고 나의 농사로 새끼들 멕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고 비바람 막을 움집이라도 구해서 편히 재우고… 농사, 나의 농사로 말이다.

농사 시작한 지 10년이다. 빚은 늘고 애들은 컸다. 빚으로 내 땅을 마련했다. 나이는 먹고 지인들이 재산으로 늘어났다.

마누라는 여전히 새벽 출근에 밤중 퇴근으로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나는 여전히 농사가 세상을 받치는 근본이라 믿는다. 여전히 그러한 농사로 가족을 책임지려는 꿈을 꽉 움켜쥐고 있다. 여전히 마누라 고생을 그만 시키고 싶어한다. 2013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이 글 마치고 빨리 자야 된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태워 줘야 집사람이 덜 힘들어 하는데 이번 주는 한 번밖에 못 태워 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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