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일본에서 나온 사상 잡지 “HAPAX”을 읽고 난 후의 느끼는 몇 가지에 대해서

- 가게모토 츠요시

<후쿠시마 농산물을 먹고 후쿠시마를 응원하자는 것은 일억옥쇄(*)처럼 역사적인 슬로건이 될 것이다.>(HAPAX)

 *주. 일억옥쇄(一億玉砕)는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의 말기에 쓰던 슬로건이며, 일억의 일본인 모두가 죽을 각오로 미국과 싸우자는 의미이다. 물론 <일억> 가운데에는 조선인, 대만인, 사할린인이 포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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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일본에서 <HAPAX>라는 잡지가 창간되었다. 사상에 관한 잡지이다. 도쿄에 사는 어떤 분이 보내 주셔서 읽고 보았다. 중요한 잡지라고 생각되었다. 다양한 기사가 있으며, 모든 기사를 소개하면 나열적인 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싱거운 글이 되는 것은 확실하니까, 그냥, 내가 특히 중요하다고 느낀 후쿠시마 사태에 대한 기사를 중심으로 소개를 해보고 싶다. 그런데, 소개라고 했으나, 나의 주관도 많이 들어가는 글이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서평이며, 서평이면서도 <HAPAX>에 촉발되면서 쓴 나의 느낌을 몇 가지 써보겠다는 것이다.

<HAPAX>라는 이름이 아마 낯설 것이다. 나도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한 번>이라는 뜻이라 한다. 이가 함의하는 데에 대해서 괜히 내가 분석을 하는 것보다 내용에 대해서 들어가고 논의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잡지는 거의 모든 기사가 익명이라는 것이다. 잡지, 게다가 사상 잡지에서 익명 기사가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주제를 보아서 책이나 잡지를 살 경우도 있는데, 저자를 보고 책이나 잡지를 볼 경우가 상당히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이름이 나온 사람은 고소 이와사부로 정도이다. 그리고 잡지 사이즈도 작다. 손에 잡을 수 있는 사이즈이며, 한국에서 일반 서점에서 파는 책들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편이라고 할까. 일본의 출판계에서는 <문고>라고 해서 작은 책이 있는데, 그것보다 약간 큰 사이즈이며, 바지 포켓에 들어간다. 아마 이렇게 작은 사이즈로 나온 의미는 종이를 절약한다거나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만든다거나 하는 의미도 없지 않을 것이지만, 시위라든가 집회에 가볍게 가져갈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이야기가 탈선했는데, 이제 후쿠시마 문제에 대해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다시 탈선이 되는데, 일본 도쿄에서는 2020년의 올림픽을 하겠다고 결정이 된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올림픽이라는 것을 열기 위해서 매번 도시가 개조당하며, 그 과정에서 못사는 사람들을 추방하는 사태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제 올림픽 따위 필요 없다고 주장을 해야 하는데, 그러한 주장을 할 사람들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이번에 도쿄에서 한다는 소식에 대해서는 걱정을 감출 수 없는 모양이다. 나도 걱정이다. 걱정이라기보다 도쿄에서 그런 행사를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도쿄에서 재개발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배제당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그렇고, 방사능이 가득 찬 곳에 강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불러와 가지고, 마치 세계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피폭을 당하면 평등이 된다는 식에 사고가 아베라든가 하는 일본 수상의 머리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이다. 일본에 있는 사람들도 올림픽에 동원당할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도쿄에 오게 만든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거의 만화책이나 공상 과학을 초월하는 사태가 현실이 된 느낌을 오랜만에 느끼며, 게다가 일본에 뉴스 등을 보면 <부흥을 보여주자>, <일본의 힘을 보여주자>는 식으로 어이없는 말들이 나와서, 심지어는 연예인들도 TV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힘이 빠지는 사태들이 있을 뿐이다. 일본의 <두뇌경찰>이라는 극좌 락 밴드가 있었지만, 그들의 노래에서 <나에겐 코믹 잡지 따위 필요 없다>는 것이 있으며, 그 가사 내용은 현실이 만화책 같아서 굳이 만화 잡지 따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정말 지금 아베를 보면 그렇게 생각된다. 그런데 이번에 올림픽은 도쿄가 될까 터키의 이스탄불이 될까 하는 경쟁이었다고 한다. 결국 올림픽 위원회는 자본가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시위가 일어날 수 있는 터키보다, 시위가 일어나지 않을 거 같은 도쿄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아베 수상은 올림픽 최종 결정 직전의 연설에서 후쿠시마는 완전히 통제되어 있다고 아주 아주 아주 뻔뻔스러운 말을 했다. 이는 다음날 도쿄전력의 공식 발표에서조차 오염수가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사태가 되었으며, 아베가 말하는 <통제>는 뻔뻔스럽기도 짝이 없는 거짓이었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그런데 좀 생각해보면, 아베가 <통제>되었다고 연설에서 말하는 것은 방사능이 아니라, 일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후쿠시마가 통제 불가능한 사태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있지만, 일본 사람들은 잘 통제되었으니까 이스탄불과 같은 시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라는 것이 아베의 주장이었다는 것이 아닐까(이 분속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나오는 비판적 언론에서 가져왔다). 그러니까 문제는 일본에서도 올림픽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에 걸려 있다.

동시에 한국에서도 이석기 사태 같은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서, 한국에서의 반공 사상이 거의 일본의 천황제 같은 힘을 가지는 것을 느낄 뿐이다. 국정원에게 이석기를 정치범으로 넘기는 것을 한국 사회가 인정했다는 것은 현 정권으로서는 아주 믿음직한 사회를 보았을 것이다. 사실 정치범을 만든다는 데에 이렇게 ‘국민적인 찬성’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그나마 괜찮게 보이는 언론에서도 이석기도 나쁜 점이 있다고나 할 경우가 있었는데, 이러한 언론 현상은 아주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누구를 죽이고 싶거나, 그러한 말은 술자리에서 자주 나오는 말인데, 그런 것을 왜 하나하나 우리가 문제시하면서 따져야 하는가 말이다. 문제는 이석기보다 김석기인데. 이석기의 발언이 어색한 뿐이지, 이석기의 발언이 정말 한국정부의 폭력과 나란히 놓아야 하는 폭력성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특히 이 사태에 대해서 국정원 비판을 하기 전에 ‘이석기에도 나쁜 점이 있었다’고 먼저 말해야 했던 한국 사회라는 것에 대해서는 공포를 느꼈다. 나는 이석기보다, 이석기를 정치범으로 만든 자가 더욱 무섭다. 그리고 이석기도 문제가 있다고 하는 ‘공평’적이며 중립적이며 진보적인 시선에 깔려 있는 공포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고 있으며, 단지 이석기 비판에 머물고 있다는 데에서도 큰 공포를 느낀다. 그러니까 이석기를 무서워할 줄 알면서도 이석기를 구속한 자를 무섭게 느낄 수 없다는 한국 사회의 현상은, 근본적인 폭력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더욱 무섭다는 것이다. 잘 감각을 따져야 한다. 무서운 자는 누구인가, 이석기 따위를 무서워해야 하는가. 아닐 것이다. 정치범을 ‘국민적인 동의’를 동원하면서, 그러니까 공포의 감각 자체가 동원되면서, 우리는 공포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 현재에 대해서 아무 비판조차 할 수 없게 된 사실에 대해서이다. 이것저것 느끼는 것이 많다. 그러니까, 항상 그렇지만, 세상 일들을 본다는 것이 힘이 빠지기 일쑤이며,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어떤 희망을 느끼는 것은 아예 없고(뭐, 세상이란 게 언제 좋았을 때가 있었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힘 빠져서 권태하고 있는 우리한테 ‘운동’을 통해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인간관계라는 것은 아주 어이가 없으며, <좋아요> 지옥에 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힘이 빠진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좋아요>를 누를 것인가. 그 주체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석기를 괜히 무서워하면서 국가 폭력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현상은 <좋아요> 중독이 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하는 비논리적인 사고조차 해본다. <좋아요>야말로 적대성을 상실시켜서, 연대의 사고를 없애기에 아주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좋아요> 정도로 얌전하게 상냥하게 인간들이 연결되었으면, 논쟁적인 인간관계는 만들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밀양의 사태에 대해서도 서울 같은 차별을 재생산하는 도시는 한 번 멸망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서울을 지키지 위해 사람의 생활을 빼앗는 구도는 아주 불쾌하고, 인류 모두가 미국 상류계급 같은 생활을 하게 되면 지구가 바로 멸망할 것이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면서, 무언가 생활 수준을 높이려고 바쁘게 산다. 나는 별로 세상을 위해 어떤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이 없어서 잉여로서 살고 있는데,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것에 몰두하면서, 그렇게 해서 돈을 버는 사람에 비하면 훨씬 세상의 도움이 되고 있다고 당당하게 생각한다. 민폐를 끼치면서 살고 있으며, 그 민폐를 돈으로 청산하려는 하지 않아서 그렇다. 문제는 사회이다, 라고 <HAPAX>의 저자들이 말하고 있다.

다시 후쿠시마 이야기를 탈선했다. 후쿠시마에서는 여전히, 통제 불가능한 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계속되었다는 말이 부적절할 것이다. 사태는 확대되어 가고 있다. 우리가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HAPAX>는 생각할 재료를 줄 뿐만 아니라, 논의하기의 무가가 되며, 행동하기의 용기도 줄 것이다. <HAPAX>의 명제를 하나 보자. 인용은 문맥에 따라 문장을 아주 고쳤으며, 인용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HAPAX>와 함께 이런저런 생각해보았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며, 정확한 인용 표현을 쓰지 않았다.

<원전으로 인해 유지되는 사회를 거부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반대 운동에 숨여드는 사회성 그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 사회는 18세기에 발명된 사회통치의 형태이다.>

<HAPAX>가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사회에 대해서 <전체성>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사회를 전체성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 폭력적인 논의가 될 수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정리를 해야 할 정도로 일본<사회>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다. 왜냐면, 방사능을 무서워하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취급되어, 특히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은 아이를 걱정해서 멀리 도망가고 싶거나, 먹을 것을 걱정하고 싶은데, 집 안에서 권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인터넷에서는 아주 유통되고 있다. 이런 권력관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운동과 접속할 수 있는 경우는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여성의 의견은 경시되고, <어머니>들의 걱정에 반해서 남자들은 아이들한테 방사능이 들어간 음식물을 준다. 그렇게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면 살기 힘들다고 해서. 좀 더 편하게 살자고. 과연 신경을 계속 쓰는 것이 힘든 일이다.

아이 같은 세포분열이 빠른 존재는 방사능으로 세포분열할 때 유전자가 잘 파괴되기 때문에 빨리 도망가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서부터가 사회와 전체성을 생각하기에 중요한 부분이다. 즉 방사능 오염의 위험성을 알아내면서 동시에 아이를 피난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서도, 일본 사회를 시키기 위해 노인들은 후쿠시마를 가서 작업을 하자거나, 혹은 아이와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희생이 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일본인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반원전운동에서도 많이 있는데, 일본이라는 사회를 지키기 위해 아이와 어머니는 피난해야 하지만, 나이 먹은 사람은 좀 후쿠시마를 가서 작업을 하자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해하기 쉬운데, 이것이야말로 거절해야 하는 논리이다. 특히 반원전운동에서 아주 유명한 원자력학자가 그러한 주장을 하니까 곤란하다. 그 학자는 반원전을 주장했기 때문에, 60이 되었는데, 대학의 직명이 <조교>이다. 그러할 정도로 아주 훌륭하게 반원전운동을 해 오신 학자이며, 나도 그 사람의 책에서 방사능이나 원전의 구조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 사람이 일본 사회를 다시 내세워야 한다고 해서 발언하고 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해할 수 있으며, 어린아이를 피난시켜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는데, 이때에 <이해하기 쉽다>는 것에 깔려 있는 이해의 회로를 다시 생각해서 비판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를 전체성으로 규정한 <HAPAX>는 이에 대한 비판이 강력히 들어있다.

그리고 <HAPAX>에서 논의되는 것은 그러한 사회를 계속시킨다는 것은, 그러니까 사회를 지키자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본주의사회를 계속 유지시킬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 논의로 나아간다. 이때 <HAPAX>가 참조하는 것은 원전 체제로 들어간 70년대, 과연 지구에서는 모든 지역이 원전 체제로 들어갔는가, 하는 것이다. 70년대의 각국의 군사정권과, <민주>적인 국가에서의 원전 체제는 같은 질서 아래에 있었다는 분석을 봐야 할 것이다. 이때 동시에 주입된 것은 사람들에 대한 통제이다. 핵분열이 통제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해서는 통제의 기술이 강요되었다. 이 통제 기술 역시 사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군사정권의 붕괴는 또 다른 <원전 체제>로 세계를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떤가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겠지만, 요새 일본에서 식민지 조선에서의 전력 사업과 지금의 한국전력의 관계성에 대한 책도 나왔다(아직 미독이기 때문에 뭐라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일본을 지키자는 사람들은 반원전운동에 충분이 있을 수 있으며, 오히려 다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회에 균열이 보인 지금이야말로 사회를 부수어 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HAPAX>의 주장이다.

아주 길어지며, 그리고 <HAPAX>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할 수 없었으며, 게다가 쓰다 떨어지기에 머물렀다는 느낌이 드는데, 일단 이런 식으로 원고를 마치려고 한다. <HAPAX>는 아래 출판사에서 나왔다. http://yakosha-tokyo.blogspot.jp/

 

응답 2개

  1. 말하길

    매끄러운 한국어문장이 아니지만, 넓고 깊은 사유를 느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사회’의 전체성에 대해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것 같아요. 심지어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보장같은 소위 진보적 관념에도 신성시된 ‘사회’가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2. ㅇㅈㅎ말하길

    와 진짜 재미있네요! 속 시원합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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