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은 사람들

서울소녀

- 진기

1  “거짓말 하지 마. 그건 여자 이름이잖아. 너 목소리 하며, 응? 내가 그런 걸로 속을 것 같아 보여? 너 아버지 뭐하시니? 너희 집에 전화 좀 해야겠다. 아니, 너 날 좀 봐야겠다. 너, 내가 그리로 찾아갈 줄 알아, 너.”  “저… 남자 아닌데요. 정말… 여자 맞는데요.”  “아니, 이 미친놈 봐라. 너, 내가 우습니? 그럼, 넌 누구니?”  나는 알 수가 없어서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2  서울 사람들은 한강이 얼마나 넓은지, 지하철이 얼마나 복잡한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같은 건 잘 모르고 사는 것 같았다. 내 발로 처음으로 서울을 찾아온 날 나는 한강을 보고 바다인 줄 알았고 지하철을 몇 번이나 거꾸로 탔고, 그녀를 보고는 서울 사람들은 다 이렇게 이쁘구나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엔 너무나 이뻐서 녹아 버릴 것 같다고 말했고 그녀는 듣고도 모른 체했다. 나는 그녀를 서울로 기억했다. 아니, 서울을 그녀로 기억했다. 어느 쪽이든 좋았다. 이건 아주 나중 나중의 일이지만, 나는 그녀를 서울로, 도쿄로, 바르셀로나로, 파리로 심지어 안도라 공국으로도 기억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건 나중 나중의 일이다.

 

3  누군가를 도시로 기억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서울의 겨울이 얼마나 차가운지를 떠올리면 그녀의 흰 손이 떠올랐고, 서울이 얼마나 복잡한 도시인지를 떠올리면 그녀가 만원 지하철에서 내게 안겨 오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게 어떤 버스가 어딜 지나가는지 알려 주었다. 내가 그걸 다 까먹으면 또 알려 주는 게 좋아서 매일 같이 까먹고 다시 물어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서울의 모든 골목들은 다 그녀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나는 그 도시에서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그녀를 아는 것처럼 그 도시를 아는 것 같이 우쭐해 했다. 내가 사는 도시를 떠나 매번 서울로 올 때면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가 서울에 도착하는 순간, 휘리릭 풀려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서울에 가면 항상 그녀가 있었고, 그래서 몇 시간이고 그녀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게 되더라도 괜찮았다.

 

4  서른여섯 번 정도 부재중 전화가 왔다. 수업 중이라 도저히 받을 수 없었고, 아니었다 하더라도 받을 용기가 안 났다. 뒷자리가 그녀와 같아서 누구 전화가 온지는 이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가 너무 이뻐서 매주 그녀의 집으로 편지를 보냈고, 우리는 떨어져 있는 게 못 견디도록 간지러워서 집 안의 동전들을 긁어모아 주머니 한가득 동전을 달칵거리며 통화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새벽마다 집 전화기를 몰래 방으로 옮겨 와 통화를 했으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내게 내내 소리를 지르셨다. 처음에는 나를, 감히 자기 귀하고 어여쁜 딸과 사귀는 못된 남자애로 아셨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했고, 혼란스러워 하셨다가, 내가 미친놈이라고 하셨고, 니가 걜 망쳤어 했다. 다시는 만나지 마라. 만날 생각도 하지 마라. 이 미친놈, 니가 남자인 척하고, 속이고, 걜 망쳤어.

나는 그럴 리가 없어요 했다. 전 남자가 아닌데요. 우린 친구인걸요. 우린 다시 만나지 않아요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그래도 그녀의 아버지인데, 안부라도 먼저 여쭸어야 했을까 싶었다. 사실은 그녀가 날 먼저 꼬셨는데 쬐금 억울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은 많이, 아주 많이 울었다.

 

5  그녀에게는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학교를 가기 위해 아침밥을 먹는 동안 집 전화가 울리면 엄마가 전화를 다 받을 때까지 밥술을 넘기지 못했다. 언제이고 다시, 전화가 와서, 당신 딸은 레즈비언이야, 라거나 네 놈 얼굴 좀 보러 왔다며 학교 앞에서 맞닥뜨릴 것만 같았다. 그건 내가 원하는 상견례의 모습은 아니었다.

다시는 ‘서울’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동화책 페이지를 넘기면 신데렐라가 집으로 돌아오고, 백설공주가 숲으로 도망가듯이 갑자기 그녀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듣기로는 그녀는 많이 울었다고도 했고, 화난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집 밖으로 못 나가게 했다고도 했다. 결국 그녀는 내가 일종의 스토커라는 부분에 동의하며 폰 번호를 바꿨다고도 했다.

그리고 어떻게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내가 무작정 광화문에서 그림자를 뜯어 먹히며 기다렸던 것이었는지, 그녀가 첩보영화처럼 나에게 암호문이라도 전달했던 것이었는지, 접혀 있던 서울의 페이지 속에서 그녀를 발견한 것인지, 어쩌면 정말로 우연히 마주쳤던 것이었는지.  우리는 처음 봬서 반가워요 하고 웃었다.

나는 내 억양이 들킬까 봐 조심조심 서울말로, 버스 노선을 몽땅 까먹어서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어요 했다.  그녀는, 그런 사투리는 금방 들켜 버려요 했다.

서울은 언제든 겨울이 추운 곳이다. 나는 그녀의 하얀 엄지손가락이 행여 떨어져 나가기라도 할까 봐 조심조심 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내가 당신을 도쿄로, 바르셀로나로, 파리로, 안도라 공국으로 그곳에서 우리가 지낸 밤으로 기억하게 된 건 그때로부터 아주 나중, 나중의 일이다.

 

*코너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매주 1편의 성소수자 에세이를 싣습니다. 마포레인보우연대에서 기획, 진행한 퀴어에세이 낭송회에 모집된 글들입니다.

*퀴어에세이 낭송회를 기획한 마레연 소개
마레연은 2010년 지방선거 당시 마포레인보우유권자연대로 시작해, 같은 해 모두모임에서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로서 지역, 성정체성 상관없이 주민들 스스로 만들고 함께해 온 모임이다. 한 달에 한 번 밥상, 연말이면 모두모임, 퀴어축제 번개, 서울여성영화제 번개 등 같이 먹고, 이야기하고, 즐길 수 있는 모임뿐만 아니라 강정마을지지 현수막 보내기, 여러 다른 단체들과의 연대, 보트피플, 비록 아직까지 현수막이 걸리진 않았지만 마포구청을 통해 현수막 걸기, 야유회 등과 같은 대대적인 활동을 짧은 기간동안 내실있게 진행해왔다.

http://cafe.daum.net/maporainbow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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