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일기

2. 고양이가 든 자리

-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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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Julie Manet dit aussi L’enfant au chat
1887
Huile sur toile
H. 65 ; L. 54 cm
Paris, musée d’Orsay
오스귀트 르누아르
<줄리 마네, 고양이를 안고 있는 아이>

엄마는 동생과 내가 집에 들렀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고 말했다. 자식이 집에 들른 며칠 사이에, 거실에 누워서 텔레비전만 보다가 밥을 몇 끼 먹다가 갔는데도 그 빈자리가 허전한지 집에 갔다 오면 엄마는 며칠 동안 전화를 자주했다.

고양이는 든 자리에 표가 확 났다. 원래 고양이들은 털이 이렇게 많이 빠지는 것인지, 우리 집 석류가 덩치가 커서 다른 고양이들보다 빠지는 털의 양이 많은 것인지, 털갈이 철이라는 봄에 데려와서 그런 것인지 석류가 한 번 앉았던 자리에는 가늘고 까만 털과 흰털이 수북했다. 손으로 등을 한 번 쓰다듬으면 손에 털이 잔뜩 붙어 있어서 한 번 만져 주기가 겁날 정도였다. 고양이 털 빠짐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가만히 있어도 털이 날리는데, 가끔씩 파드득 소리가 나게 온몸을 털고, 영역 표시를 하고 다니느라 사방에 몸을 부비기까지 했다. 사람은 길을 걷다가 장애물이 있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면 피해 다닌다. 고양이는 머리부터 시작해서 뺨, 몸통을 지나 엉덩이까지 다 쓸고 지나다닌다. 까만 바지를 입고 있으면 고양이 키 높이인 종아리 부근에 흰 털이 잔뜩 붙어 있었다.

석류가 스치고 가거나, 앉은 곳, 닿은 곳에만 털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거기까지 날아간 것인지 수분 크림 뚜껑을 열었더니 거기에도 석류 털이 들어있고, 빨래를 해도 고양이 털이 붙어 있다. 어느 날은 카페에서 라떼와 쿠키를 먹는데 이상하게 입에서 고양이 털이 나왔다. 영양제를 먹이거나, 사료가 아닌 생식을 통해 조금 개선될 수 있고, 매일매일 빗질을 제대로 해 주면 나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나아지는 것뿐이지 그래도 털은 날린다.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던 친구 복순이는 결핵성 늑막염을 앓았던 병력이 있어서 호흡기가 좋지 않았다. 석류가 집에 온 뒤에 하룻밤 자고 가더니 우리 집에 있으면 목에 털이 걸리는 것 같아서 앞으로 자고 가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고양이가 헤어볼을 토하듯 내가 털 뭉치를 토해내는 날이 올 것 같다면서, 미세 먼지처럼 고양이 털이 폐에 쌓이는 게 아니냐고 걱정을 해 줬다. 첫날 석류가 이불에 오줌을 싸는 바람에 처음부터 석류를 좋게 생각할 수 없었던 동생 짱구는 털 때문에 더욱 석류를 좋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짱구는 단백질 보충제를 챙겨 먹으며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외모와 스타일에 신경을 쓰는 이십 대 초반의 남자라 옷에 고양이 털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질색을 했다. 석류는 우리 집에 온 뒤로 약 두 달 동안 과연 그루밍을 하긴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털을 뿌려대며 ‘여기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라고 온몸으로 외쳤다.

실제로 고양이를 기르지 않으면 이 털 빠짐이 얼마나 심한지 알기 어렵다.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이 앞으로 고양이를 입양하게 될 사람에게 하는 조언 중 하나가 바로 이 털 빠짐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털 빠짐, 털 날림은 고양이라는 생물의 고유한 특성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적응해야 하고, 털에 무뎌져야 한다. 나는 게으름 덕분에 쉽게 털을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아니면 절대 유기하지 말고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모성애가 아니라 묘성애라도 나왔는지 털이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털이 놀랄 만치 많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고, 나 때문에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고양이와 동거해야 하는 동생과, 고양이의 털 빠짐을 목격한 지인들이 호들갑을 떨어서 그것을 문제라고 인식했을 뿐이다.

털 이야기를 다른 친구에게 했더니 그는 자기 집에서 길렀던 개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 12월에 집에서 십 년 넘게 키우던 시츄 방울이가 죽었다고 한다. 처음 부모님이 어디서 개를 한 마리 데려왔을 때 그는 재수를 하던 중이었고, 재수 학원에 다니면서 입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애꿎은 개에게 화를 냈다. 그때 얼마나 방울이에게 못되게 굴었는지, 재수 생활이 끝나고 입시에 성공해서 십 년을 더 같이 살았는데도 방울이는 자기를 보면 고개를 쌩하니 돌리고 지나가고, 집 식구들이 들어오면 반갑게 마중을 나가는데 자기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방울이가 가장 싫었던 건 개털이었다. 깔끔하게 드라이한 정장에 꼭 개털이 붙어 있었다. 이 놈의 개털은 떼도 떼도 없어지질 않았고, 누가 봐도 옷에 개털이 붙어 있어서 집에 개를 키우는 게 표가 났다. 그런데 작년 겨울, 식구들이 다 나가고 텅 빈 집에서 방울이가 혼자 죽었다. 늦게 온 형이 컴컴한 집에서 싸늘하게 늘어져 있는 방울이를 제일 먼저 발견했다. 방울이가 죽고 나니 거짓말처럼 집에 개털이 사라졌다. 그날 이후로 털 하나 없이 옷이 아주 깨끗해졌다.

데면데면한 것도 아니고, 서로 없는 셈 치며 지내던 사이였는데 개털이 없어지니 속이 시원한 게 아니라 무척 허전하고 슬펐다고 했다. 그러면 다시 개를 기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은 사람보다 너무 빨리 죽어서 앞으로는 동물을 기를 생각이 없으며, 행여나 기르게 된다고 하더라도 절대 자신보다 먼저 죽지 않는 장수의 상징 거북이나 기를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같이 산 지 몇 달 지나지 않았는데 석류와 나 사이에 남은 날을 따져보게 되었다. 석류가 2살쯤 됐으니 고양이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앞으로 십 년쯤 더 석류가 흩뿌리는 털을 치우며 지낼 수 있다. 석류가 방 한구석에 있는 박스 안에 들어가 몸을 둥글게 말고 나른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친다. 석류의 난 자리를 생각하니 석류가 싫어하거나 말거나 하루에 한 번은 안아 주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면서 뽀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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