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에이지의 사상

1962년 가출 전성시대

- 오영진

내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나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
-미하일 바흐친, <책임과 예술>(1919) 

 

1962년은 가출 전성시대였다. 5월부터 전국 곳곳에서 보고된 가출 소식이 신문지상을 메우더니 11월까지 계속 이어진다. 급기야 원인을 특정할 수 없는 이 가출 러쉬를 두고 동아일보 11월 21일자에는 “십 대의 가출 경향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린다. 기사에 의하면 62년 10월 한 달에만 212명이 가출했는데(물론 경찰에 신고된 숫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중 삼분의 일이 10대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보고된 기록으로는 유래 없이 많은 숫자였다. 62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가출 청소년들이 급증한 것일까? 하지만 어른들은 왜? 가 아니라 어떻게? 이 사태를 막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논의한다.

 

“이와 같은 십 대의 가출의 증가 경향은 역시 늘어 가는 비행소년 문제와 더불어 적지 않은 사회문제라 보겠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요망된다.

빈번해진 십 대의 가출 문제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인과관계를 규명하고 그 원인을 사전에 제거하는 길 이외에 이렇다 할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다. 물론 가출과 더불어 신속한 수배로 더욱 불행한 환경에 휩쓸려 들어가기 전에 집에 돌아가도록 치안 당국의 기동성 있는 수색 활동이 긴요하고 또한 일반도 이러한 당사자의 가족과 당국자의 노력에 자기 일처럼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다.”(사설, 「십대의 가출 경향을 어떻게 볼 것인가」, 『동아일보』, 1962.11.21)

 

그때나 지금이나 이러한 가출 청소년들에 대해 기존 세대의 입장은 이들이 한심하다는 것이고, 또한 이들은 병이 들었으므로 사랑으로 보살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위 기사의 필자도 십 대의 가출이 왜 급증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단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골몰하고 있다. 물론 그 해결책이라는 것도 대개는 피상적인 수준이다. 지속적인 관리를 위장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9월 15일자 경향신문 기사는 대대적인 ‘가출아실태조사’를 통해 가출 청소년들이 가정불화, 현실 불만, 망상, 감정 억제 실패 등의 원인으로 생겨난다고 진단한다. 과연 그럴까?

같은 시기 가출 청소년들에 대한 기사를 직접 읽어보자. 4월 16일자 기사에 의하면 편용범이라는 고교생이 가출을 했는데, 그 이유는 집에서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 해서이다. 그에게는 분명하고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7월 27일자 기사도 보자. 19살 김학주 군과 또래 청소년 하나가 사라졌는데, 이들은 25살의 유부녀 오기선 씨와 그녀의 친구(여)와 함께 떠난 것이었다. 정황상 이만큼 분명한 목적이 어디 있을까. 물론 이 기사의 경우 유부녀의 비도덕적인 가출에 비난을 맞추고 있는 기사이다. 또 다음의 기사는 어떤가?

 

“지난 16일 아침 8시쯤 균명 고교야간부 삼면 B반 장학진(18=구로동 간이주택) 군은 같은 반 이창희(19) 군과 “밀항을 해서라도 「브라질」에 가서 성공하고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써 놓고 집을 나간 후 소식이 없다. 18일 상오 두 학생의 담임 백 선생은 “둘이 모두 착실하며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라고 말했는데 이 군은 광주에서 혼자 상경한 고학생이며 장 군도 가정 형편이 곤란하여 고학을 해 왔다”

 

금의환향 예고형 가출에 속한다. 막연히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가 아니라 ‘브라질’이라는 특정한 기표를 지목하고 있어 흥미롭다. 같은 날짜의 다른 기사를 읽으면 왜 하필 브라질인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시 브라질로 떠나는 한국인 이민 첫 세대가 막 부두를 떠나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브라질 이민은 궁핍한 조국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였다. 이 합법적인 ‘가출’에 소년도 동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가출 소년들을 망상가로 취급할 수도 있지만 ‘브라질’이라는 환상의 기표를 따라간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를 사회적 질병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아닌가 반문해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들의 가출에는 나름의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경우도 많았고,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종류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에 부정적 가치를 씌우는 것이야말로 부당한 것이 아닌가.

62년 가출 대유행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치안 권력에 의해 가출 청소년이 본격적으로 62년부터 통계화 되고 관리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다. 박정희 집권 이후 치안 유지는 어느 때보다 제일 우선시 되는 사항이었다. 이때 학교나 공장에 있어야 할 청소년들이 통제 밖에 위치한다는 것은 정권의 차원에서 경계할 일이었다. 이들은 범죄세력이 될 가능성이 높거나 동시에 정치적으로 불온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가출하는 이는 있다. 다만 집계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러므로 가출 청소년의 증가는 가출청 소년에 대한 집계가 서서히 완성되는 가운데 보이는 착시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가출 청소년이 증가할 만한 어떤 조건이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비록 5.16쿠데타를 통해 박정희가 집권하긴 했지만 아직은 4.19혁명 이후, 터져 나온 자유의 이념은 10대들의 언동에도 여전히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가출이 청소년의 변덕스러운 감정 상태 혹은 인내력 부족으로 인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겠지만 실제의 가출은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용기가 없으면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당시 기사에 의하면 상당수 학생들은 가출의 변으로 돈을 벌어 고향에 되돌아오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를 그 빈곤 문제가 원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출을 강행한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그들은 분명히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출 행위 전반에는 통상의 합리적 설명을 넘어서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는 의견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가출 청소년에 대한 기성세대의 편견이야 물론 부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가출의 충동적 가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즉 충동을 부정적 가치로 규정지어 관리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의 가치를 발견 확인할 것인가? 물론 우리는 후자로 갈 일이다.

일본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데라야마 슈지는 「가출 입문」이란 글에서 나이가 들어 시도된 ‘가출’은 진짜 가출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인의 가출이야 현실에 찌들어 도피할 곳을 찾거나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가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 이는 그 귀착지가 너무도 분명하고, 그 가출의 배경이라는 것도 비겁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가출은 새로운 집을 찾는 행위이기 때문에 ‘가출’이란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데라야마 슈지는 당시 보도된 한 중학생들의 이유 없는 가출에 대해 찬양한다. 이들은 앞날에 어떻게 될지에 걱정하기보다는 우선 당장 떠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이 목적 없는 가출이야말로 기성세대를 당혹케 한다. 가출에 대해 사후적으로 지목된 원인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가출에 있어 목적 없음의 측면을 지워내고 봉합하는 데에서 기인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11월 20일자 동아일보에는 여고 카운슬러 한점남 씨가 가장 다루기 힘든 가출 청소년으로 문학소녀/년형을 꼽고 있다. 문학작품을 탐독하다가 스스로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이상한 모험에 나서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문학소녀/년형의 가출자가 당혹스러운 것은 그들의 가출의 이유가 기성세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것도 약간은 궁색한 기성세대의 해석이다. 단지 그들이 소설의 주인공과 착각하는 망상에 빠졌다고 보고 싶은 것이다. 문학작품이 품고 있는 자유의 향기를 그들은 맡는다. 이런 가출자들이야말로 위험하다.

이런 관점에서, 대부분의 가출자 유형도 사실 문학소녀/년형이라고 할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가출 또한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탈출하는 그 순간에 집중한다. 특정 원인에 의해 가출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가출에 의해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부당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닐까? 선 원인 후 가출이 아니라 선 가출 후 원인의 측면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영토로부터 떠나겠다는 결심은 계산에서 나오지 않는다. 호르몬의 분비와 직관력이 공모해 벌였을 이 충동이야말로 누구나 겪었을 테지만 시간이 지나면 망각하는 십 대의 경험이다.

다시 말하지만 1962년은 가출 전성시대였다. 이를 기점으로 이후부터 언론에서 가출 관련 기사의 빈도가 높아지고, 이어 해묵은 해법과 논의가 지루하게 반복되기 시작한다. 청소년을 본격적으로 관리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도 높아져만 간다. 그들이 보기에 가출 청소년들은 불온한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가출의 상상력이야말로 온전히 십 대의 영혼이 담겨 있는 사상이라는 공식이 발생한다. 우리도 실은 ‘브라질’로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그러나 매 맞을까 두려웠던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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