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오합지졸들의 정치

- 지안

활동가가 주는 이미지란 어떤 대단하고 단단한 사람들입니다. 똑 부러지고, 알아서 할 일을 찾고, 모든 열정을 투여하며, 일당백을 해내는 사람들 말이지요. 그러니까 현장에서 당혹스러운 일들이 벌어질 때도 이겨내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활동가가 아니더라도 ‘하나의 주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란 대개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구성해 가고 그걸 지켜 나가는 사람들일 것이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 속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그런 ‘하나의 주체’인 건 아닙니다. 혹은 어떤 배치 속에서는 그런 사람일지 모르나 다른 배치에서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의 주체, 완전한 활동가가 아니라는 말이 우리가 현장에 있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객관적인 것들을 따져보았을 때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우리는 똑 부러지지 못하고, 모든 열정을 한곳에 투여할 만큼 결단력 있지도 못하며, 할 일이 무엇인지 몰라 허우적대는, ‘일당일’도 하지 못하는 ‘오합지졸들’입니다 (물론 이 글에서 ‘우리’란, 저와 주변 인물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예전에 연구실에서 니체를 공부할 때, 종종 초인들의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스스로 “자기 규율”을 성립하는 자들끼리의 공동체란 대체 어떤 것일까에 대한 궁금증이었죠. 그것은 아마도 코뮨의 지향점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니체에 관한 마지막 에세이에도 그렇게 썼습니다. 자본에 대항하여 “초인들의 연합, 초인들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런데 초인들이 아니라 오합지졸들의 공동체가 있다면, 자본에 대항하는 오합지졸들의 정치가 있다면 그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자신들을 긍정하며 공동성을 형성하고 정치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정치는 쓸모없음일까요?

 

우리 오합지졸들의 쓸모를 옹호해보기 위해 최근의 경험을 서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도 진행 중인 밀양 송전탑 사태가 불거질 무렵, 밀양의 이 싸움에 대해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나-오합지졸이 하는 일이라곤, 구체적인 도움도 되지 못할 텐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 같이 ‘하자’고 말할 수 있는 너-오합지졸 몇몇이 생기니 우리는 우리-오합지졸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합지졸들이 모이고, 머리를 맞대고, 아니 우선 모였다는 것 자체에서 어떤 힘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간단한 모금도 하고, 여럿이 밀양도 내려가고, 다 같이 릴레이 일인 시위를 하고, 글도 쓰고, 밀양에 대한 자료 조사 팀이 꾸려졌습니다. 밀양에 관한 카톡방이 생기고, 밀양을 조사하는 페이스북 그룹이 만들어지고 논의들이 생산되었습니다.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democracy)란 데모스(demos)의 권력을 뜻합니다. 또한 데모스란 빈민들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빈민이란 경제적인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몫이 없는 것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정치란 바로 이들이 자기 몫을 주장하고 찾으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애초에 가진 자리가 없는 ‘오합지졸’들은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를 시작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생각됩니다.

뭐 그래서, 우리는 정치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앞서 말한 우리의 활동이 밀양에게 질적으로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의문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 활동은 결과가 눈에 보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합지졸들로부터 어떤 특이한 힘들이 발현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오합지졸의 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정치의 가장자리에 있는 오합지졸들,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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