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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반시대

무엇이 진짜 세계인가?

- 숨(수유너머R)

“와, 쌤도 그 영화를 좋아한단 말이에요? 신기하다!” 이야기가 어쩌다 드라마 <셜록>으로 흘러 나도 좋아한다고 말을 했더니 K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셜록>은 코난 도일 원작 추리소설 <셜록홈즈>를 현대물로 각색한 영국 BBC TV드라마 시리즈다. 감각적이고 전개가 빠른 영상과 주연배우 배네딕트 컴버배치의 괴팍한 천재 연기가 아주 매력적인 영화다.  K와 나는 시즌2에서 죽은 모리어티가 아깝다는 둥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이내 2013년에 나올 시즌3에 대한 기대감을 나누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쨌건 처음 만나는 자리여서 서로 어색함을 느끼던 찰나 공통 취미를 발견한 것은 나에게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상담이고 뭐고 간에 K가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좋은 신호였다.

영국 BBC드라마

영국 BBC드라마 <셜록>

1. 브로맨스와 B/L, 야오이, 동인물의 세계

하지만 K가 드라마 <셜록>을 통해 들려준 이야기는 그 이상이었다. K는 우연한 기회에 <셜록>을 봤는데 너무 재미있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어떤 까페에 가입했다고 한다. 드라마 <셜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드라마 속 등장인물을 주인공 삼아 소설을 써서 게시판에 올리면 읽기도 하고 품평을 한다고 했다. 이렇게 등장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남자. 남자 등장인물들끼리의 로맨스 소설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 셜록홈즈와 닥터 왓슨이 그냥 친구가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라고 설정하거나 홈즈의 숙적 짐 모리아티와 홈즈의 형 마이크로프트를 연인 사이로 엮는 방식이다. K가 가입한 <셜록>까페는 몇 개 되는 것 같았는데 “수위”가 있느냐(성행위 묘사 장면)에 따라 가입 연령을 제한하는 곳도 있다고 했다.

K가 들려준 까페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B/L, 야오이, 동인물의 세계다. B/L은 Boys Love의 약자로 남자 주인공들끼리의 로맨스를 그린 창작물이다. 야오이는 B/L과 비슷한 뜻이지만 일본어의 야마나시(극적상황 없음), 오찌나시(반전 없음), 이미나시(의미 없음)라는 앞 글자만 따서 생성된 조어이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이 창작하고, 여성 독자들이 보는, 남성 동성애를 다룬 포르노 소설 내지 만화를 통칭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동인물 또한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이런 창작물은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을 묘사하는 포르노부터 핑크빛 연애 감정을 중점에 둔 로맨스 소설까지 다양하다. 10대 소녀들이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팬픽 소설 중에도 비슷한 종류가 많다.

일본에서는 야오이가 1985년에 처음 등장한 이후 관련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야오이 문화가 들어오고 PC통신과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폭넓은 현상이 되었지만 아직도 동인물은 여전히 언더그라운드의 문화이다.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며 자신이 “동인녀”인 것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왜 동인물을 좋아하느냐는 게시글에 개인의 취향이라는 천편일률적인 댓글이 십수개가 달린다. 그들의 취향이 공격을 받는 데에 대한 지극히 방어적인 반응이다.

여성들 특히 10대들이 동인물을 즐기는 현상에 대한 문화적 분석 중 하나는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욕구나 환타지를 투영하고 대리만족을 얻는다는 것이다. 등장인물은 차갑고 냉정하지만 잘생긴 남자거나 섬세하고 따뜻한 꽃미남으로 이분화되어 있다. 관계의 양상도 보다 적극적인 쪽, 권력을 쥐고 있는 쪽(공(攻))과 소극적이거나 권력이 약한 쪽(수(受))으로 정식화되어 있고, 소설의 전개 상에서 약간의 변주가 있다. 폭력적 성관계 장면이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즐기기는 과정에서 여성은 자신이 대상화되는 데서 오는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애를 중심으로 그리고 있는 연애물이나 포르노와 달리 안전함을 느낀다고 한다. 또한 10대 여성들의 경우는 주로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들이 등장하는 팬픽을 즐기는데 다른 여성 인물이 등장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남성과 맺어지는 것을 보는 건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기도 한다.

동인물 문화는 남성 중심의 성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발견한 여성 판타지가 발현되고 소비되는 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저항적인 것만은 아니다. 폭력적인 관계가 이야기 전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어 전형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이 영역이 완전히 상업화되지 않았지만 완전히 언더그라운드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상업 문화는 여성들의 이런 취향을 조금 순화된 형태로 받아들이는데 그것이 바로 “브로맨스”다. brother+romance의 합성어인 브로맨스는 남성 간에 그려졌던 기존의 과격하고 데면데면한 우정 이상의 친밀하고 끈끈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드라마 <셜록>의 셜록 홈즈와 닥터 왓슨, <성균관스캔들> 속의 걸오와 여림, <학교 2013>의 고남순과 박흥순의 관계가 그렇다.

속 최고의 남남커플 걸오&여림

<성균관스캔들>속 최고의 남남커플 걸오&여림

 

2. 가상과 현실의 경계. 진짜 있는 거야?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온라인, 사이버 공간은 확대되는 동시에 매우 개별화되었다. K가 말해준 새로운 동인문화는 나에게 가상 공간과 현실 세계의 경계가 진짜 있는 것일까 질문하게 만들었다. 동인물을 만들어내고 읽고 보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동인물 속의 등장인물로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고정된 텍스트를 만들고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역할로서 만나지 않았다. 그 속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다르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K는 카페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 카톡을 통해서도 만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여줬던 카톡창은 신세계였다. K가 설명한 바로는 이랬다. 한 사람이 카톡방을 개설한다. 이 카톡방은 호스트바나 까페를 무대로 설정한 채팅방이다. 개설한 사람은 사장이 되고 일할 사람을 모집한다. 손님들도 드나든다. K는 이걸 “역극(역할극)”이라고 불렀다. 물론 카톡방에서 역극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남성캐릭터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여자다. 이런 역극은 수시로 만들어지고 번성했다가 졸지에 망하기도 하고 문을 닫기도 한다.

이것과 비슷한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역할극과 다른 점은 두 사람이서 소설을 함께 쓰는 것이다. 둘은 카톡을 주고 받는데 대사와 함께 지문도 함께 주고 받는다. 달달한 대화를 주고 받으며 스킨쉽을 지시하는 지문을 괄호 안에 삽입하거나 반대로 이별을 통보하는 말과 문을 쾅쾅 두드리는 행동을 동시에 기술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일종의 희곡을 둘이서 함께 창작하는 것과 같고, 배우가 되어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리는 것과도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소설의 저자이면서 소설 속 주인공이 된다.

또 다른 카톡방은 단 둘만 참여하는 방식에서는 같다. 하지만 K는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조수빈”이고 키 180에 26살 남자라고 했다. 상대방은 자신보다 두 살이 많은 사람이었고 부산에 살고 있다고 했다. K는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한다고 다음 겨울에는 부산에 놀러가고 싶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부산에 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K는 이내 그 사람과 헤어졌고 부산 가려고 틈틈이 모아뒀던 돈을 맛있는 음식을 사 먹는데에 다 써버렸다. 그 후에도 K는 카톡방에서 만나 연애를 하는 사람들과 놀이동산에도 가고, 고백을 하고, 헤어지고, 배신(양다리)을 하기도 했다.

 

이 세 가지 유형의 카톡방과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관계들은 서로 중첩되기도 한다. 소설을 같이 쓰다가 연애관계로 이어지기도 하고, 역극을 하던 카톡방에서 서로 손님과 종업원으로 만난 이들끼리 개별 카톡을 하며 개인적인 고민을 나누고 서로 상담을 해주기도 한다.

이런 관계들은 온라인의 장벽을 넘어 오프라인으로 이어진다. K는 까페에서 알게 된 사람들, 카톡방에서 함께 소설을 쓰거나 역극을 하거나 연애를 한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기도 했다. 어떤 언니는 학원 수학 강사라 만나서 밥을 얻어먹고 수학 문제도 몇 가지 물어보고 왔다고 했다. 어떤 동생과는 으슥한 곳에서 성적 접촉도 시도해보았다고 한다. 부산에 있던 K가 정말 좋아했던 그 사람은 여대생이었다. K는 그 사람을 형이라고 지칭했지만 그가 여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K는 역극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과 서로 고민을 나누기도 했고, 자신의 가상 캐릭터 “26살, 180cm의 조수빈”처럼 되고 싶어 했고, 자기가 좋아했던 부산에 살던 그 사람이 헤어지자고 했을 때 3일 밤낮을 울었다.

 

망연자실 우는 K의 얼굴을 보면서 혼란스러웠다. 누구나 나와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도대체 K는 진짜 연애를 한 걸까, 아닌 걸까. K는 남자가 되고 싶은 건가, 아닌 건가.

이 모든 것이 가상 공간의 가상 경험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눈물을 줄줄 쏟는 K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K는 헤어진 그와 놀이공원에 갔을 때 얼마나 행복하고 기분이 좋았는지를 말했다.(물론 카톡 속에서 놀러 간 순간을 가리킨다.) 좋다, 나쁘다의 가치 판단 이전에 우리는 가상 공간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온라인이 오프라인과 비슷한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문화 현상 이상이다. 새로운 경향의 텍스트나 애니메이션, 영화와 같은 작품을 생산하는 것 이상이다.

 

이제 온라인은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내는 세계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다양한 세계를 재조직화하여 다시 새로운 실천을 한다. K는 오프라인에서 남자를 사귀기도 한다. 그리고 요즘은 학교 도서관에서 본 3학년 언니를 좋아하고 있는데 부끄러워 인사도 건네지 못한다고 야단이다. K는 자신을 바이(양성애자)라고 표현한다. 오프라인과 더불어 여전히 카톡의 역극과 연애는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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