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솔의 공공공(公共空)

미술실천으로부터의 공공성

- 이솔

포스트 스크립트 같이 간결한 글로 <공공공>컬럼의 마감을 대신한다. 2012-2013년 서울생활과 함께 시작하고 끝을 맺은 글들이 당시 느끼고 생각한 점에 대한 솔직한 발자취임을 밝힌다. 파편적이고 매끈하지 않은 서사는 솔직함의 결과이며, 나 역시 공공의 장의 일원으로 다른 이들의 사고와 환경에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대화 상대가 되어준 모든 이들께 감사드린다.

 

‘지역 연구와 미술’ 모임

2013년 3월28일 오후 5시. 구기동 아트 스페이스 풀 지하 사무실 탁자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용석, 조지은, 김희진, 이영욱, 나, 그리고 풀의 새로운 기획실장 조은비와 인턴 권기예가 참석한 ‘지역 연구와 미술’이라는 모임의 시작은 그렇게 조촐했다. 하지만 그들 틈에 앉은 내 얼굴은 왠지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  포럼에이(1997-2005)의 창단멤버였고 작가그룹 플라잉 시티의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전용석 작가, 성남프로젝트 (1998-9)와 믹스라이스 (2002-현재)의 조지은 작가, 2000년대 초반부터 인사미술공간과 풀의 역사와 함께해온 김희진 큐레이터, 미술비평연구회(1989-1993)와 포럼에이의 활동으로 더 잘 알려진 현 전주대학교 도시환경미술학과 이영욱 교수. 예전부터 지면으로 접해온 이들과 함께 무엇을 ‘모의’한다는 자체가 나를 들뜨게 했고, 이 모임의 목적이 내 학구적 관심사와 너무나 가까이 조응했기 때문이다.

 

≪공공적 소란: 1998-2012_17개의 사회적 미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전시설치전경, 사진:홍철기 ⓒ 아트 스페이스 풀

≪공공적 소란: 1998-2012_17개의 사회적 미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전시설치전경, 사진:홍철기 ⓒ 아트 스페이스 풀

모임의 취지는 의외로 간단했다. 지난 15년간 한국 미술계는 갤러리 밖의 도시환경에 반응하며, 지역 리서치를 동반하고, 때로는 지역주민과의 대화까지도 도모한 다양한 미술 실천을 시도해왔는데—그리고 아트 스페이스 풀은 그 흐름의 가운데에서 기획의 계기를 제공하거나 종종 구심점 역할을 해왔는데—도대체 이 짧지 않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비록 15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실천이지만 아카이브의 부재는 2013년 현시점에서 작품에 대한 성찰을 힘들게 하지는 않나? 미술실천과 그 결과물을 아카이빙—즉, (재)구성—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여기서 토론하고자 하는 미술실천은 성남프로젝트와 플라잉시티의 활동, 그리고 <<DMZ와 안보관광>> (2001), <<공공의 꿈, 종로>> (2002), <<다시 동두천을 주목하는 이유>> (2007) 등의 전시, <<동아시아의 목소리>> (2007) 와 <<군산 리포트: 생존과 환타지를 운영하는 사람들>> (2011) 등의 워크샵과 세미나를 동반한 전시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일련의 질문들에 대한 열띤 논의를 하기 위해 소규모의 인원이 모였으나, 답을 찾아가는 일은 처음부터 난관을 겪었다. 일단 ‘지역 연구과 미술’이라는 표제에 대한 불편함이 제기됐다. (이 세 단어의 조합은 2007년 당시 풀 기획실장 고승욱이 몇 개의 미술 프로젝트를 일컫는 말로 지어냈지만, 2013년에 와서 10여개가 넘는 전시, 세미나, 미술 활동을 통틀어 대변하기에는 부적절하게 들린 것 같다.) 오히려 ‘지역 리서치-기록- 창의적 재해석’라는 미술생산방법이 지속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뒤돌아보기’라는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첫 미팅에서 내린 잠정적인 결론 및 행동전략은 다음과 같다. 1) ‘현장미술’ ‘커뮤니티 미술’ ‘행동주의 미술’ ‘공공미술’과는 다른 차원의 실천 방법이 지속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미술적, 미학적, 문화사적 이해가 필요하다. 2) 단발적으로 행해지는 미술 실천을 연결하는 네러티브를 생각해보자. 3) 불완전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카이브이니 최대한 구성해서 2013년 9월12일 아카이브 전시를 오픈하자. 4) 미술계과 연계되어 나타난 공간/문화연구 등의 학계의 관심과 도시디자인 및 마을만들기의 사회 전반적 경향에 대해 정리하자. 5) 이런 동의를 전제로 삼고, 미술실천과 여러가지 프레임에 대한 논의를 총 여섯차례 지속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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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적 소란: 1998-2012_17개의 사회적 미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전시설치전경, 사진:홍철기 ⓒ 아트 스페이스 풀

새로운 시대의 사회적 미술

매번 발표자를 한 명씩 둔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된 모임은 디테일을 정리하는 큰 흐름에 대한 논쟁으로 확장될 때가 종종 있었다. 가령, 모두가 동의한 점은 88올림픽 이후 가속화 된 소비사회와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이 ‘민중’이라는 일종의 ‘원형이미지’(전용석의 단어)의 상실과 어떻게 맞물렸는지가 중요한 배경으로 작동했다는 것이다.(플라잉시티에게는 청계천 상인들이 주조하는 철구조물이 일종의 새로운 ‘원형이미지’였다고 했다.) 가끔은 세미나가 주석 달기 식의 자유로운 대화로 빠지기도 했지만, 그러던 중 흥미로운 ‘여담’을 접할 때도 있었다. 조지은은 미술책에서 보던 앤디워홀의 캠벨 스프캔 작품을 90년대 말 킴스클럽(1995년 창간)에 방문 한 후에야 비로소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90년대 소비사회로의 진출에 서있는 작가와 미국의 6-70년대 팝아트의 연결점에 킴스클럽의 상품 진열기법이 서 있었던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팝아트에서 선보인 상업 이미지와 이미지-메이킹를 향한 관심과는 달리, 90년대 말-2000년대 초 서울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은 자본주의와 고도로 상업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물체 (혹은 시장 가치는 미미하나 작가에게 문화적, 감성적, 미학적 영감을 주는 오브제)에 일종의 집착을 보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성남프로젝트의 <성남모더니즘> (1998)에서는 성남 주민들이 플라스틱병으로 만든 우체통이나 거푸집으로 만든 주차방해물을  ‘주민예술’이라고 칭하며 사진기록을 했다. 또한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물체의 물성, 그 물체의 배열/전시 미학, 그리고 물체가 놓여있는 도시환경에 대한 작가적 관심은 플라잉시티의 <오늘의 오브제> 연작(2002-2005)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작가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생활 속의 장면을 찍어 플라잉시티 웹사이트에 올리는 작업인데, 업로드한 종로타워의 사진 밑에 건축물의 우주선다운 우스꽝스러움에 대한 코멘트를 달거나 왕십리 2동 철거지역에 세운 표지판 혹은 놀이터 미끄럼틀 등 버내큘러vernacular 건축/디자인의 사진 연작을 웹상에서 공유하며 답글을 유도했다. 이에 대해 전용석은 <오늘의 오브제>의 연작을 중지한 계기 중 하나가 어떤 세미나에서 접한 최정화 작가의 발표였다고 말했다. 수집광으로 널리 알려진 최정화는 90년대 초부터 설치에 형광 플라스틱 소쿠리 같은 버내큘러 오브제를 사용했는데, 그 뿐이 아니라 이미 80년대 말부터 거리의 풍경을 작품 세계의 ‘사부’로 모시며 사진 찍어왔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한국의 풍경은 패션, 인테리어 디자인, 건축, 영화 속 미술감독, 클럽 운영 등의 도시 환경과 조우하는 작가의 시각문화적 작품 활동에 영양분이 되었다. ‘떡’이 될 분량의 컬러풀한 기록사진을 소유하고 있는 최정화를 발견하고, 전용석은 다른 작업방식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공공적 소란: 1998-2012_17개의 사회적 미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전시설치전경, 사진:홍철기 ⓒ 아트 스페이스 풀

≪공공적 소란: 1998-2012_17개의 사회적 미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전시설치전경, 사진:홍철기 ⓒ 아트 스페이스 풀

도시 환경을 관찰하는 자로서의 입장에서 조금 더 개입하며 재현하는 에이전시agency로의 전환을 실행한 행위는 주로 퍼포먼스라는 장르로 나타났다. 플라잉시티의 초기 비디오 작품 <망원동 임시조각> (2002), <파괴의 땅에서 할만한 일> (2002), <북안산에서 외치다>(2002)는 모두 도시 공간에서 표류하는 주체(작가)들이 무정부적 ‘소란’을 일으키는 퍼포먼스에 대한 기록이다. 이 세 작품과 방법론적 상관관계를 띄는 작품이 동두천에서 행한 김상돈의 <디스코플랜>(2007)이다. 여기서 ‘작가의 개입artists’ intervention’은 지역주민의 문화생활향유를 유도하는 페스티벌 형태의 이벤트를 기획하는 관료적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데모현장에서 사용 가능한 도구를 제작하는 행위와 확연히 다르다. 더 나아가, 비록 작가가 미술공간 밖의 한 특정 장소place와 그 장소의 역사,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표출한다 해도, 이것은 ‘참여’라는 민주주의 이념에 기원을 둔 개념으로 정리할 수도 없다. 이미 발언 자체가 자동적으로 참여를 의미하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장소특정성,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대화의 미학, 적대적인 미술 등 소위 ‘수입된’ 이론의 ‘겉돎’이 진작에 드러났다. 그럼 도대체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미술관 밖으로 나온 작가들이 창의적인 사회학적 혹은 인류학적 리서치를 하면서 기록, 퍼포먼스 및 작품제작을 한 역사를 어떤 개념적, 이론적 언어로 해석할 수 있을까?

 

지금은 2013년 9월. ‘지역 연구과 미술’ 모임의 결과물은 <<공공적 소란: 1998-2012 – 17개의 사회적 미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2013.9.12-10.27, 아트 스페이스 풀)와 <<코끼리의 날개 –사회적 미술 십오 년을 기초로 한 미래 프로젝트>> (2013.10.23-11.6, 문화역 284)의 두 전시로 기획되고 있다. ‘기획위원’이라는 모임의 구성원 이외 아트 스페이스 풀의 모든 인원이 전시 구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 두 전시에 방문할 미술인과 관람객들이 어떤 상호작용적 사고나 공공성을 띤 활동을 개시할 지는 모르겠지만 어떻한 형태로든 대화가 계속되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지역 연구과 미술’ 모임에서 언급된 여러 미술실천들은 이미 예전부터 내가 공공성에 대한 비평적 탐구를 시작할 때부터 관심을 가져온 작업들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이들 몇몇의 공공성의 정체를 희미하게나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내가 이미 이해하고 있던 공공성의 이론에 이들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들 작업에 관한 지속된 소통과 고민 끝에 내가 도달한 개념이 공공성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다.[1]

 

≪공공적 소란: 1998-2012_17개의 사회적 미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전시설치전경, 사진:홍철기 ⓒ 아트 스페이스 풀

≪공공적 소란: 1998-2012_17개의 사회적 미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전시설치전경, 사진:홍철기 ⓒ 아트 스페이스 풀

포스트-민중 시대의 공공성

작품의 조형적, 미술사학적 분석은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 채, 여기서는 생각의 큰 줄기를 적어본다. 민족국가라는 공동운명체의 불가능성이 자명하고 근원origin, 진실truth, 본질essence,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시대임에도, 정치적 관계와 공동체의 이상을 부재한 그 무언가로 쉽게 치부하기를 거부하는 작가들이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성남, 종로, 동두천, 청계천, 마석, 군산, 의정부 등에서 서행, 질주, 때로는 무단침입을 자행했다. 그리고 이런 동네/지역의 고유함을 찾는 대신에 각 장소의 공간적 요소에 매료되고 역사/기억에 귀를 기울이고 결국 그곳 풍경에 선험적, 감정적으로 반응을 하기도 하며 잠시나마 그곳의 일부가 되었다. 다른 이들의 기억과 발자취와 사회적 관계로 형성된 장소와 온몸으로 소통한 것이다. 이런 소통은 민주화 이후 친親자본, 친親재벌주의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정부가 지지하는 공공공간의 사유화privatization와 추상화abstraction에 대한—장소와의 소통 불가능함 혹은 무장소성에 대한—저항이다. 물론 일부 예술가들은 이미 정부와 지자체 복지정책의 일부로 마을만들기 프로젝트에 투입되고 스토리텔링이라는 편협한 방식의 동네 홍보를 위해 ‘상업화’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복지라는 또 다른 치안과 상술에 대항하는 방법은 끊임없이 공동체와 장소를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움직임movement일 것이다. 여기서 본질의 부재 속에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소규모 공동체는 상호주체적 관계intersubjective relations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장-뤽 낭시가 주장하는 무위의 공동체inoperative community와는 거리가 먼 공동체인 것이다. 소통은 사람, 장소, 물체, 비물체와 모두 가능하다 믿으며, 이러한 소통의 관계를 장소의 새로운 기억으로 정비하는 것이 바로 90년대 중후반부터 일련의 작가들이 공공성을 추구한 방식이다. 이러한 믿음과 태도를 활성화activate 하는 것은 전시로든, 글로든, 또 다른 미술실천으로든 계속되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 역시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비평활동을 지속할 것을 약속한다.

 

≪공공적 소란: 1998-2012_17개의 사회적 미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토크,2013,토크전경 ⓒ 아트스페이스 풀

≪공공적 소란: 1998-2012_17개의 사회적 미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토크,2013,토크전경 ⓒ 아트스페이스 풀

 


[1] 이 글에서 언급된 작품의 대부분은 <<공공적 소란: 1998-2012 – 17개의 사회적 미술 아카이브 프로젝트>> (2013.9.12-10.27,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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