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자기 자신을 보는 것, 1966 <페르소나> 2편

- 지안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사에서 무엇을 봤을까. 아마도 나르키소스가 연못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표면은 아주 잔잔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반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최선의 모습이 담길 만큼 고요한 수면 위에서 가능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수면 위는 늘 일렁거린다. 센 물결도 치는데다가 진흙과 물이 뒤섞여 버리는 상황도 발생한다. 우리가 연못을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의 모습이 언제나 최선의 상태로 있을 수는 없다. 거친 수면 위에 비친 얼굴은 한 가운데가 볼록 튀어나와 보이기도 하고 파편들처럼 끊어져 있을 때도 있다. 물론 나르키소스처럼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완벽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즉 수면 위의 상황에 따라 우리는 다르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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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극과 극을 달리기도 하며 대개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불안정하게 유동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 사람에게는 다양한 모습이 있는 것인데, 우리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든 모습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에게는 다양한 모습이 있는데 사람은 치졸한 한편 싹싹하기도 하고 이기적인 한편 누군가를 챙겨주기도 한다. 전자의 것들은 타인에게 보여 지는 것, 후자의 것들은 자기 자신만 아는 것(으로 두고 싶은 것)으로 구분된다. 타인들과 떨어지는 순간 타인들에게 보여지는 자기 자신의 가면과도 분리되면서 우울해지기도 한다. 즉 한 사람이 가진 여러 개의 모습은 특히 타인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모습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간혹 우리는 드러나는 표면적인 우리의 모습에 지나치게 빠져들기도 한다. 그 편이 행복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긴 도입을 요약하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수면 위의 상황이 어떠하든 자신의 모든 모습을 파악해야 하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우리는 가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가면이 가짜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황에 따라서 상황이 만들어내는 모습도 분명 한 사람이 가진 모습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가진 모습들을 긍정하지 못해서 지나치게 우울해하거나 하나의 가면을 만들어 내어 지나치게 몰입한다면 불행해지는 것이다. <페르소나>의 언어를 빌리자면, “다른 사람과 있을 때의 당신”이 “현기증”에 시달린다면 “혼자 있을 때의 당신”은 “만성 배고픔”에 시달린다. <페르소나>의 첫 번째 주인공 엘리자베스도 역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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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는 연극배우인데, 무대에서 공연하던 도중 대사 읊기를 중단 해버린다. 클로즈업된 그녀의 얼굴을 보면,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그건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후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이다. 그 순간 이후로 그녀는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냉담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가상인지 실상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시퀀스들에서(아마 가상일 테지만 어디서부터 가상으로 얽혀 들어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들이다.) 알마는 엘리자베스가 “젊고 행복한 엄마의 역”이라는 가면을 만들어내어 살아왔다고 말한다. 가면과 본질 사이의 괴리는 엘리자베스를 냉담한 침묵으로 이끄는데 배우라는, 가상의 역할을 언제나 부여받는 그녀의 직업이 외면과 내면 사이의 간격을 가시화 시켜준다. 사람들이 엘리자베스를 보고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렇게 예쁠 수 있을까!”라고 했다면 실상 그녀는 젊고 행복한 엄마가 아니라 태아를 증오하고 낙태를 시도하는 무책임한 사람일 뿐이다. 알마가 낱낱이 그녀의 속내를 폭로할 때 그녀는 모든 속살이 타인과 자신에게 꺼내 보여 지는데서 오는 경악스럽고도 서글픈 표정을 짓는다. 자신을 비로소 들여다보았을 때, 등장하는 효과음과 리브 울만(엘리자베스)의 표정은 마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면 뒤 모습을 들킨 것처럼 깜짝 놀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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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의 얼굴이 한 사람처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폭로 장면은 두 가지 시점으로 반복된다. 첫 번째는 알마가 엘리자베스에게 그녀의 본모습에 대해서 폭로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엘리자베스의 시점에서 알마가 엘리자베스에게 했던 동일한 대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페르소나> 뿐만 아니라 영화사에서도 매우 유명한 장면이다. 두 명의 여자가 각각의 시점에서 동일한 대사를 반복한 뒤 둘의 얼굴은 반쪽씩 합쳐지는데, 결국 하나의 얼굴처럼 관객에게 보이게 되고 하나의 얼굴이 된다. 둘이 얼굴이 닮았다는 것에서 영화 구상이 시작되었다는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언급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둘의 얼굴이 실제로 닮았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이 장면은 또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두 개의 자아가 와해되어 처음으로 만나는 것으로도 보인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와 알마, 환자와 그녀의 간호사는 서로에게 지나치게 동일시 되어간다. 알마는 엘리자베스를 존경하고 냉담한 침묵 속에서 살던 엘리자베스는 알마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엘리자베스가 “만성 배고픔”에 시달리는 본 모습이며 알마가 “현기증”에 시달리는 가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이 <폭로 장면>이라고 하는 두 자아의 만남은 상당히 충격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타나는 데 자아와 또 다른 자아 간의 만남을 우리는 어떻게 긍정해야 할까. 영화의 주 내용을 두 가지 자아가 만나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결말에도, 새로운 시작을 위해 떠난다는 식의 긍정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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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 1개

  1. 꽁꽁이말하길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영상에 빨려들듯이
    글의 도입부에서부터 빨려드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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