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침묵 속에서 폭발하지 않는다면

- 고병권(수유너머R)

3-18 사건에 죽은 북경여자사법학교의 학생인 유화진(劉和珍), 양덕군(楊德群), 그리고 >에 실린 루쉰의

3-18 사건에 죽은 북경여자사법학교의 학생인 유화진(劉和珍), 양덕군(楊德群), 그리고 <<어사(語絲)>>에 실린 루쉰의 <유화진군을 기념하며>

1.

지난번에 나는 ‘3-18 사건’에 대한 루쉰의 글, <이런 ‘빨갱이 토벌’>의 한 대목을 소개했다. 루쉰은 이 글 외에도 이 사건에 대해 몇 편의 글을 더 썼다. 이 글들은 모두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받은 충격을 말해 준다. ‘적수공권’, 맨 손으로 오직 나라를 위해 ‘청하는 말’ 하나를 가지고 간 인민들에게 ‘빗발 같은 총탄’을 퍼부은 정부. 그는 사건 당일에 쓴 글 <꽃 없는 장미2> 말미에 “민국 이래 가장 암흑한 날”이라고 적었다.

현실에 말문이 막혀 그는 처음엔 글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글쓰기의 무력함만을 깨달았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사태’ 1주일 후 그는 이렇게 썼다. “아무리 글로 쓰고 입으로 부르짖어 봐야 집정부 앞에서 마구 쏟아낸 청년들의 피를 몸으로 다시 넣어 죽은 자를 소생시킬 수도 없는 노릇”아닌가(<‘사지(死地)’>). 그런 그에게 붓을 들게 한 것은 이 ‘사태’를 말도 안 되는 프레임을 몰고 가려는 소위 ‘먹물’들 때문이었다. ‘빨갱이’나 ‘폭도’라는 정부의 비난은 놔두고라도, 학생들 행동에 ‘배후’가 있다거나, ‘학생들이 사지(死地)에 왜 나갔느냐’는, 마치 학생들의 행동이 철없었다는 식의 담론을 펴는 이들이 있었다. 루쉰은 그 먹물이 살육에 사용된 총탄보다도 잔인한 것이라고 느꼈다.

루쉰은 이렇게 적었다. “피로 쓴 것을 먹으로 감출 수는 없다.”(<꽃 없는 장미2>) 그러나 먹으로 쓴 것만 읽을 뿐, 피로 쓴 것을 읽지 못하는 문맹의 민족은 어떤가. 한 사람의 주검도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감히 팔로 안기를 두려워하는 민족이 있는가 하면, 수백 명의 죽음에 대해서도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민족이 있다(<‘사지(死地)’>). 선각자의 죽음이 후대의 삶을 위한 영약이 되는 민족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 민족이 있다. 그런데 후자는 아마도 “죽은 자의 무게에 짓눌려 함께 멸망할 것이다.” 루쉰은 그렇게 썼다.

정말이지 글을 쓴다는 것은 죽은 자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칼로 행한 일을 펜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죽은 자에 대해서 루쉰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었을까. 그냥 터져 나오는 설움을 틀어막고 가슴이나 쥐어뜯고 있었을 터. 이 몇 편의 글을 읽으며 그의 그런 아픈 마음을 느꼈다. 아마도 그의 붓은 산 자들을 겨냥했을 것이다. 살았으나 잠들어 있는 중국 인민의 등짝이라도 후려쳐 보는 심정 아니었을까 싶다.

 

2.

내가 아래 소개하는 글은 <유화진군을 기념하며(紀念 劉和珍君)>의 한 대목이다(인용문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노신문집>>, 3권, (한무희 옮김, 일월서각)에서 가져왔다). 루쉰은 이때 북경여자사범대학에 있었는데, 이 학교의 학생인 유화진과 양덕군 두 사람이 정부군이 쏜 총탄에 피살되었다. 특히 유화진은 루쉰의 글을 애독했고 그의 수업을 열심히 들었던 학생이었다. “빛바랜 핏자국과 흐릿한 슬픔 속에서 잠시 동안의 삶을 훔치며 비인간적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루쉰은 제자인 유희진을 추념하는 글에서 자기 삶을 그렇게 한탄했다. 내가 아래 글을 인용한 이유는 바로 한 구절, ‘침묵 속에서 폭발’에 눈이 갔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중국인의 결점을 거리낌 없이 그리고 짓궂게 지적해 온 나이지만 그런 나조차도 설마 그처럼 비열하고 그처럼 야만스런 짓을 하리라곤 상상할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언제나 미소를 띠고 있는 온화한 유화진군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집정부 앞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지다니!

그러나 그 날로 그것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그것을 증명한 것은 그녀의 시신이었다. 시신은 또 한 구가 있었는데 그것은 양덕군 군이었다. 더구나 그들을 살해한 사실이 증명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학살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몸뚱이에 곤봉으로 얻어맞은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단기서 정부는 체포령을 발동하고 그녀들을 ‘폭도’라고 불렀다.

그 뒤를 이어서 이번에는 데마가 나돌았다. 그녀들은 남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이다.

그 참상은 나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한다. 그 데마는 나로 하여금 귀를 가리게 한다. 내게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멸망해 가는 민족이 왜 침묵하는지 그 이유를 나는 깨달았다. 아아, 침묵아! 침묵 속에서 폭발하지 않는다면 침묵 속에서 멸망할 뿐이다.

 

“멸망해 가는 민족이 침묵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문장을 도치시키면 그것이 답이기 때문이다. 불의를 보고도 그저 침묵하고 있다면 그 민족은 멸망할 것이다. 정작 이해가 쉽지 않은 것은 “침묵 속에서 폭발”하는 것이다. 왜 ‘침묵을 깬 폭발’이 아니라 ‘침묵 속의 폭발(沉默中爆发)’인가. 중국어를 못하는 내 오해일 수 있으나, 루쉰의 문장에서 대비되고 있는 것은 ‘침묵’과 ‘폭발’이 아니다. ‘침묵 속의 멸망(沉默中灭亡)’과 ‘침묵 속의 폭발(沉默中爆发)’. 우리는 보통 ‘침묵’과 ‘폭발’을 상반된 것으로 놓지만, 루쉰의 문장에서 정작 ‘폭발’과 대비되는 것은 ‘멸망’이다. 다시 말해 루쉰은 ‘폭발할 것인가, 멸망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이 둘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침묵’이다. ‘침묵 속의 멸망’과 ‘침묵 속의 폭발’, 이 두 말 속에는 동일한 글자로 표현되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침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침묵 중에 폭발한다는 것. 이 구절은 루쉰이 <잡감(雜感)>에서 쓴 ‘격렬한 침묵’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참고로 <잡감>은 대략 ‘3-18사건’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쓴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마치 한 해 뒤에 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서 루쉰은 “혈서도, 규약도, 청원도, 강의도, 눈물도, 전보도, 집회도, 조사도, 연설도, 노이로제도 모두가 헛일”이라고 했다. “신음이나 탄식이나 눈물이나 기도” 같은 것에는 놀랄 것이 없으며, 정작 주의해야 하는 것은 “격렬한 침묵”이라고. 마치 숲 속으로 기어가는 독사나 어둠 속을 달리는 원귀처럼 소리 없이 다가가는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분노’의 조짐이라고.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불평 한마디 못하는” 노예적 침묵(<‘사지(死地)’>)만 있는 게 아니다. 혁명도 말의 중단, 로고스의 중단이라는 점에서는 침묵이다. 말이 끊어지는 시점, 세계를 말없이 이동시키는 게 혁명이다. 세계는 격렬하게 이동하지만, 말이 없으므로, 그것은 참으로 고요하다 할 것이다.

 

3.

언어도단(言語道斷). 말 길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3-18 사건’에 대한 루쉰의 글들은 조금 멀게는 광주에서부터 가깝게는 용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말문을 막히게 했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어찌 사람이 죽은, 그런 일들뿐이겠는가. 청원이 불가능한 곳, 바라는 바를 말로 하는 것이 불가능한 곳, 그런 불가능성을 느끼는 곳은 모두 ‘언어도단’이다. 넘쳐나는 것이 뻔뻔한 말들뿐이고, ‘말하지 말라’는 말 뿐이고, ‘이것은 항명’이라는 말뿐이고, 그래서 ‘왜 멸망하는 민족이 침묵하는지’만을 알게 할 때, 사람들은 ‘말의 소용’에 대해 참 허망함을 느끼는 법이다. 어떻든 모를 일이다. 말의 길이 끊어질 때, 노예는 ‘내가 별 수 있냐’고 돌아서지만, 누군가는 ‘말이란 별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하니까.

 

당시 여행자가 찍은 3-18사건 당시 군중과 군경의 대치 장면(1926. 3. 18)

당시 여행자가 찍은 3-18사건 당시 군중과 군경의 대치 장면(1926.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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