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일기

3. 자기만 아는 고양이

- 송이

단독생활을 하는 동물의 행동

 

개와 고양이의 가장 큰 차이는 개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고, 고양이는 단독으로 생활한다는 점이 아닐까? 무리를 지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서열이 있는 사회를 만들어 생활하는 것을 말하며, 단독으로 생활을 한다는 것은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개는 ‘충성스럽고 애교가 많고’, 고양이는 ‘도도하고 독립적’이라고 묘사하는 하는 것이 두 동물의 이런 생활의 차이를 가리킨다.

사람도 무리 생활 혹은 사회생활이나 조직 생활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독립성을 빙자하여 제멋대로구는 고양이보다는 서열이 높은 동물을 따르고, 칭찬을 하거나 벌을 줘서 교육시킬 수 있는 개를 더 많이 기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보면 밖에서 열심히 번 돈으로 노동하지 않는 생물을 먹이고, 재우고, 돌봐 주기까지 하는데 밥을 주는 주인에게 충성은커녕 애교라는 보상도 해 주지 않는 고양이는 얼마나 못된 짐승인가. 그런데 바로 이 단독생활을 하는 동물과 지내면서 알아 가는 일이 흥미롭다.

“고양이와 같이 사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고양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엘런 페리 버클리

 

편의상 ‘주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엄밀히 말해 나는 석류의 주인이 아니다. 고양이에게는 주인에게 복종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집에서 고양이를 기를 때 인간과 고양이의 관계에 그나마 가까운 것은 혈연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난 엄마와 자식의 관계다. 집에서 생활하는 고양이는 평생 새끼 고양이처럼 행동한다. 배가 고플 때 와서 응석을 부리고, 자기가 놀고 싶을 때 와서 치대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애완동물 대신에 반려동물이라고 바꿔 말하고, 고양이를 입양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주 빈말은 아니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스스로 집사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집에서 아이들이 상전인 것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처음에 엄마는 내가 새끼 고양이가 아니라 인간 나이로 치면 24살인 2살짜리 고양이를 데려왔다고 했을 때 “어릴 때부터 길러야 정 붙이고 살지, 다 늙은 고양이를 데려다가 어떻게 기르려고 그러느냐”라고 걱정했다. 사실 고양이보다 내가 더 늙었는데, 엄마 입장에서는 어린 딸이 덩치가 산만한 늙은 고양이를 키우느라 허덕이는 모습이 눈에 선했나 보다. 그런데 석류는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했다. 북한산에서 절밥을 얻어먹으며 사람 손을 많이 타서 그런 건지, 절밥에 눈칫밥을 반찬으로 먹고 자라서 그런 건지 처음부터 밥 달라고 교태를 부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빈 밥그릇 앞에 앉아 있을 땐 최대한 작아 보이려고 몸을 쪼그리고 있다가 밥을 다 먹고 나면 몸통은 용수철처럼 길어져 큰 덩치를 드러낸다. 그렇게 양껏 밥을 먹고 나면 이제 너에게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침대에 가서 몸을 둥글게 말고 눕는다. 볼일을 보고 난 뒤에 화장실을 빨리 치워 주지 않으면 여기에 응가가 있으니 어서 치워달라고 모래를 헤집어 놓고, 화장실 앞에서 눈을 꿈뻑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이런 행동을 보고 사람들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제멋대로인 고양이라는 이미지를 만든 게 아닐까. 그러나 이게 고양이의 본성이다. 이후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꼬리를 살랑거리며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의 생태다. 단독생활을 하는 동물에게는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하며, 필요에 따라 상대에게 접근하고 필요가 없어지면 다시 제 갈길을 간다. 이런 까닭에 개처럼 훈련을 시킬 수도 없다. 주인에게 칭찬받고 싶어하고 혼나는 것을 겁내야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을 텐데, 고양이는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동물이 아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처럼 가르칠 수 없는 것일 뿐 고양이도 무언가를 배운다. 다만 자기에게 좋은 것을 알고 그것을 기억할 뿐이다. 석류는 어디에 밥이 있는지 귀신같이 안다. 내가 늦잠을 자거나 집에 늦게 들어와 제때 밥을 주지 않으면 평소 본체만체하는 사이인 내 동생 방의 문을 벅벅 긁고 그 앞에 서 있는다. 어디가 누워야 제일 따뜻하고 포근한지, 창가에 앉으려면 어딜 밟고 올라서야 하는지도 잘 안다. 이러다가 프린터 용치 받침을  부숴버렸다. 사람이 눕거나 앉을 수 없게 매번 침대 한가운데를 차지하거나, 책상 의자 위에서 식빵 자세로 쉰다. 늦잠을 자는 나를 어떻게 하면 깨울 수 있는지도 안다. 고양이가 털이 보송보송한 앞발로 턱을 톡톡 건드리고, 갈퀴가 달려 있는 것처럼 까슬까슬한 혀로 핥으면 사람이 안 일어날 수가 없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알아서 손을 얼굴에 가까이 가져가면 바로 귀를 뒤로 납작하게 젖힌 다음에 배시시 웃는 것처럼 초승달 같은 눈을 하고 턱을 치켜든다.

밥 먹기 전과 후

밥 먹기 전과 후

고양이 팔자가 마냥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처음에 고양이는 용도가 뚜렷한 동물이었다. 약 5천 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인류는 곡물 창고에 번식하는 쥐를 퇴치하기 위해 야생의 리비아살쾡이를 가축으로 기르기 시작했다. 이 리비아살쾡이가 인간과 살게 되며 현재 고양이가 되었고, 무역 상인들이 배에 실은 짐에 피해를 주는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 반출이 금지된 이집트에서 고양이를 밀반출하여 전 세계로 퍼졌다. 게다가 지금은 단독생활을 하며 자기 영역에서 사냥하고 쉴 수 있는 환경을 인간에게 아주 빼앗겼다. 다른 길고양이들과 부대끼며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며 살거나, 어떻게 입양되어 최소한 끼니 걱정은 없는 집고양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동물행동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집고양이는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야생의 형태대로 성장하며 적응할 때보다 훨씬 더 다양한 삶의 조건들에 내몰리게 되었다. 말하자면 제 나름의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하고 같은 고양이와 지내든, 인간과 지내든 관계 형성을 한다.

앞에서 무리 생활하는 동물과 달리 단독생활을 하는 동물에게는 서열이나 주인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고양이와의 관계는 주종 관계도 아니고, 거래나 교환을 할 수도 없다. 무조건 관찰을 하고 인터넷이나 책을 보고 고양이의 의사소통에 대해 알아서 배워서  고양이가 내는 알 수 없는 몸의 신호나 울음소리를 듣고 욕구를 파악해 적절히 들어줘야 하는 전적으로 밑지는 장사다. 노예근성인가 싶겠지만 웃기게도 고양이가, 이런 관계가 좋다. 한 친구가 “사장이 일개 사원의 불만을 듣고 분노해서 전 사원을 소집해 왜 회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느냐며 분개”했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일개 사원의 입장에서 생판 남인 사장의 회사가 소중할 까닭이 없는 게 너무 당연하다. 그런데 밥줄이 끊기지 않으려면 ‘너는 너고 나는 나입니다. 저한테 득이 있을 때만 당신에게 알랑거리겠습니다’라는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땐 참 고양이처럼 굴고 싶다. 우리의 서열 관계 혹은 갑을 관계는 그저 이해관계에 비롯된 것일 뿐인데 이후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참거나 접대를 좀 해 주기보다는 앞발로 확 밀쳐 내고 나 자신의 욕구를 살피고 스스로 만족하는 삶에 집중하고 싶다.

고양이처럼 서열 관계가 없고, 그에 따라 질투나 우월감, 열등감 같은 감정 없이 산다는 것은 참 매력적이다. 타인의 욕망 따위 욕망할 필요가 없고, 결핍도 없다. 혈연가족이라는 개념도 없어서 부모 자식처럼 생활하면 부모 자식이 되고, 형제처럼 생활하면 형제가 될 수 있다. 관계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혼자 사는 인구가 늘어나는 것, 고양이를 키우는 인구가 늘어나는 것이 무관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 인간이 인간 자신을 포함해 모든 생물의 행동과 심리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무리 생활’ / ‘단독 생활’이라는 단순한 분류로 개와 고양이를 나누고 개와 인간의 유사성을 찾는 것도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갑’질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모두의 이익인 양 포장하는 사회에서,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존재의 윤리학이 필요한 것 같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