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은 사람들

淸雨 安 香蘭

- ohmeja

어머니의 노력과 땀, 눈물이 깃든 가게가 새카맣게 타 한줌 재로 내려앉았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잿더미를 정리하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골목 모퉁이에서 훔쳐보았습니다. 멀리서도 불에 탄 냄새가 콧등을 시큰하게 했습니다. 가슴을 후벼 파고 드는 그 흔적들 속에서도 어머니는 묵묵히 차근차근 차분히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 저는 그 즈음 어머니께 호적정정 판결문을 내밀었습니다.

왜 하필 모든 게 이 시기일까요.

저는 살기 위해 뛰었고 어머니는 죽을 만큼 뛰셨습니다.

왜 이때였어야만 할까요.

 

그토록 강인하신 분이 큰딸의 판결문 앞에서는 굵은 소나기를 맞는 민들레 같네요.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시는 눈빛에 제 마음은 알 수 없는 깊이의 바다에 닻을 던진 기분이었습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으로 떨어지는 마음.

26년간 큰딸로서 묵묵히 곁을 지켰던 어제의 큰딸은 그날 그 자리엔 없었습니다.

없어지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높으신 그 분의 판결보다 법보다 우선인 부모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저는 꼭 쥐면 깨질까 내려놓으면 다칠까 늘 마음 졸이던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키운 내 자식을, 내 새끼, 우리 맏이, 내 딸을 어떻게 종이 한 장으로 바꿀 수 있었을까요.

 

어머니의 눈빛이 많은 이야기를 저에게 던지고 있었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은 굳이 말을 하지 않으셔도 제게 느껴졌습니다.

메어 오는 목으로 이렇게 된즉 네가 사회에서 느꼈을 불편함 부당함 들이 나 하나가 참아 내면 내 새끼가 편해지는 것이 아니겠냐며 판결문을 돌려주셨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26살 자랑스러운 건아입니다.

하지만 영원히 어머니 마음 한켠엔 착하고 마음 여린 맏딸로도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 정체성으로도 변한 제 모습으로도 법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어미가 자식에게 갖는 또 하나의 사랑인 것 같습니다.

 

저는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여자의 언니이며 오빠이고, 한 여자의 자식이며 딸이고 아들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FTM입니다.

 

 

 

* 淸雨 安 香蘭 : 표면적으로는 ‘맑은 빗속에 편안하게 안긴 난초’를 의미하면서 ‘어머니(香蘭) 를 맑은 기운으로 안아드리고 싶은 제(淸雨) 마음’을 담은 뜻입니다.

*코너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매주 1편의 성소수자 에세이를 싣습니다. 마포레인보우연대에서 기획, 진행한 퀴어 에세이 낭송회에 모집된 글들입니다. 

*퀴어 에세이 낭송회를 기획한 마레연 소개 
마레연은 2010년 지방선거 당시 마포레인보우유권자연대로 시작해, 같은 해 모두모임에서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로서 지역, 성정체성 상관없이 주민들 스스로 만들고 함께해 온 모임이다. 한 달에 한 번 밥상, 연말이면 모두모임, 퀴어축제 번개, 서울여성영화제 번개 등 같이 먹고, 이야기하고, 즐길 수 있는 모임뿐만 아니라 강정마을지지 현수막 보내기, 여러 다른 단체들과의 연대, 보트피플, 비록 아직까지 현수막이 걸리진 않았지만 마포구청을 통해 현수막 걸기, 야유회 등과 같은 대대적인 활동을 짧은 기간동 안 내실 있게 진행해 왔다.

http://cafe.daum.net/maporainbow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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