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뒤몽이 영화를 만날 때 – <우리 선희>(2013), <플랑드르>(2006), <까미유 끌로델>(2013)을 보고

- 이상욱

우리 선희

 

<우리 선희>(2013)에 대한 소개 중 일부와 수정된 문장

 

구석에 몰린 선희가 선희를 아끼는 세 남자와 만납니다.

그들 사이에 많은 말들이 오고 갑니다.

이 말들과 선희란 사람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런 말들이 선희를 도와줄 수 있을까요?

 

문장을 조금 수정해 보자.

 

영화를 찍는 브루노 뒤몽이 플랑드르와 까미유 끌로델을 만납니다.

그들 사이에 많은 말들이 오고 갑니다.

이 말들과 영화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런 말들이 영화를, 그리고 뒤몽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

 

두 개의 만남

 

우리가 만난 선희(들)

홍상수의 근작 <우리 선희>(2013)가 ‘우리’ 선희인 까닭은 선희가 여러 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너 또는 그가 만난 선희. 선희는 나와 너 또는 그를 만나는 사이, 우리 선희, 아니 우리가 만난 선희(들)이 된다. 나, 너 또 그가 만난 선희. 그래서 우리 선희들.

그들의 말(言) 위를 떠도는 선희는 ‘예쁘지만 안목 있고 약간 또라이 같기도 한’ 오직 한 명뿐인 선희로 통일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선생님을 만날 때와 선배를 만날 때 그리고 문수를 만날 때 선희는 매 순간마다 변하지 않고 동일하게 연속되었을까? 그러나 그들의 말은 선희에 관해 비슷한 말을 늘어놓지만 결코 완전히 포개어지지 못한다. 선희는 그가 만난 남자들의 말 속에서 선희와 선희들 사이를, 하나로 통일된 연속과 미세한 차이가 만든 불연속 사이를 맴돈다. 우리 선희(들)

 

뒤몽과 만날 때

브루노 뒤몽은 플랑드르와 까미유 끌로델을 만난다. 만난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 <플랑드르>(2006)와 <까미유 끌로델>(2013)은 이렇게 형성된 관계에서 탄생한다. 다른 누가 아닌 브루노 뒤몽과 만난 플랑드르와 까미유 끌로델. 때문에 플랑드르이지만 플랑드르가 아니고, 까미유 끌로델이지만 결코 그녀가 아니다. 그 고장과 그녀가 영화로서 처한 운명은 선희의 곤경과 닮은 것이다. 선희(들) 중 한 명의 선희. 선희(들) 사이에 가로놓인 초조한 간극. 뒤몽의 영화 <플랑드르>와 <까미유 끌로델>은 그렇게 자기 아닌 자기의 영화로 존재한다.

<플랑드르>를 보고 플랑드르를 알 수 있다 말할 수 있을까? <까미유 끌로델>을 보고 ‘나는 까미유 끌로델을 알게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영화 <플랑드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플랑드르의 풍광과 그곳에서 캐스팅되어 처음 연기를 해 본 배우들뿐. 우리는 그곳의 지리, 생태, 사회, 문화, 지역민의 삶 중 어느 하나 알 수 없다. 바람 부는 플랑드르의 들판. 필름에 찍힌 들판은 그저 척박한 사막과의 대조된 이미지로서 존재할 뿐이다.

로댕과의 불타는 사랑 그리고 비극적인 천재성. 이 문구는 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동명의 영화 <까미유 끌로델>(1988)이 집중한 까미유 끌로델에게만 해당할 뿐이다. 뒤몽이 만난 까미유 끌로델의 영화는 그 삶의 끝, 모두가 까미유 끌로델에게 바라는 삶의 부분, 환하게 밝혀져 왔던 그 삶의 끝에서 시작한다. 정신병원에서 보낸 생애 마지막 30년. 제 이름의 빛이 모두 바랬던 시절. 뒤몽은 영화가 외면했던 그 시기, 고유명사로서의 그녀의 이름이 결코 보려 하지 않았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짐짓 그의 영화는 까미유 끌로델이어야 할 필연적 이유를 상실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뒤몽은 왜 구태여 어느 여인이 정신병원에서 보낸 고단한 삶의 이야기에 그녀의 이름을 붙였을까?

 

까미유 끌로델플랑드르

 

‘어느 선희’의 구출

 

카메라의 눈은 인간이 보지 못한 사물의 다른 가능성을 인간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감각의 확장’이며 또한 사물의 제 목소리 내기이다. 감춰졌던 목소리는 기계의 눈을 통해 비로소 들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의 임무이다.

뒤몽은 이러한 영화의 임무에 가장 충실한 이들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결코 들리지 않았던 감춰진 목소리를 찾는 데 열중한다. 누구도 듣지 못했던 플랑드르와 까미유 끌로델의 목소리. 그의 관심은 온통 그러한 구출 작업에 쏠려 있다. 사적 관계를 맺는 것, 그들과 개인적으로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은 모두 구출을 위함인 것이다. 그들을 구출할 유일한 장소이며 시간인 영화. 뒤몽은 영화를 통해 아직 우리 선희에 포함되지 못한 선희, 아직 제 목소리를 내 본 적 없는 선희의 목소리를 만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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