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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

어머님은 어떤 여성일까

- 숨(수유너머R)

지난 주 TV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았습니다. 마침 남편이 출장을 갔고 일주일의 긴장이 확 풀어지는 ‘불금’이라 넋을 놓고 영화를 보는데 재미지더군요.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 같은 코너에서 자주 봤던 영화인데도 캐릭터들의 매력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 중에서도 여자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남북전쟁이 있었던 당시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매우 혁명적 삶을 산 여성으로 보였습니다. 그녀는 숙녀의 점잖음이나 결혼한 여성으로서의 의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사랑과 열정, 생존의 투지로 불타오르는 그녀는 “나쁜년”이라 온갖 구설수에 오르지만 당당합니다. 그녀가 귀를 기울이는 것은 오로지 자기 가슴 속에 있는 욕망입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애슐리로 향했다가 나중에 삶 자체에 대한 열정으로 옮겨가지요. 그녀 또한 내적 갈등을 겪지만 자기 내면의 반향에 흔들리는 것일 뿐, 그 혼란은 사회의 평판이나 도덕관념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저의 이슈는 결혼생활입니다. 연애와 다르게 결혼은 관계의 확장을 전제합니다. 좋든 나쁘든 서로의 가족과 관계를 안 맺을 수 없고 그 관계에 깔려있는 규범적 기준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의 본가는 부산입니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남편은 처가가 부산이라 다행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댁이 가까운 저는 자주 가지 않는다고 해도 관계를 의식해야하는 빈도가 높은 편입니다. 저 스스로도 관계 자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종종 시댁식구와 맺게 되는 관계를 생각해보곤 합니다. 그 중에 핵심은 사실 어른들, 그 중에서도 어머님입니다.

갈등관계를 일으킬까 걱정되지는 않습니다. 어머님은 연세가 많으셔서 굳이 나서서 영향력을 행사할만한 심리적 체력이 안 됩니다. 저는 대체로 명랑하며 온순한 편이구요. 눈치도 없지 않아 대충 어떤 자세를 취해야 미움을 받지 않는지 잘 압니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어머님과 매우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훌륭한 마마보이 효자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이런 조건과 저의 처세술이 딱 맞아 떨어져 웬만해서는 어머님과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과의 관계는 서랍 속에 몰래 넣어둔 40점짜리 시험지의 존재와 같습니다. 이 시험지는 어떻게 해도 100점을 맞을 수 없는 시험지입니다. 아니, 더 큰 문제는 100점을 맞아도 석연치 않은 시험지라는 거지요.

 

“어른들에게 사랑받을 거에요”, “결혼생활 잘 할 것 같아” 라는 말을 들을 때 마다 저는 석연치 않은 시험에 100점을 맞은 듯, 결국 그 시험에 합격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과민한 걸까요. 조금 더 과민해져보자면 도대체 그 시험은 누가 보라고 만든 것이며 100점의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고 따질 수 있겠습니다. 어머님은 세련되고 쿨하게 며느리에게 간섭이나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 시어머니 역할을 연기해야 하고, 저는 자기 주관도 뚜렷하지만 눈치있게 가끔은 순종적으로 그 모든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며느리 역할을 연기 해야는 이 시험 말이지요.

이 모든 시험은 결국 ‘시’와 ‘며느리’라는 글자에서 비롯되고 그 속에 있는 두 여성의 고유함은 사라지며 오로지 관계의 형식만이 남습니다. 저의 불편함은 아마 거기서 시작된 거 같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그 관계의 형식이나 규범이 가장 중요해졌던 적은 없기 때문에 이 사실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결혼한 모든 여성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고부지간이라는 틀을 나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갈등이 있고 없고를 떠나 관계를 그 안에서 사고하고 서로의 존재를 그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이 노릇을 잘 한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거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슬픕니다.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강요받는 것만큼 내가 다른 한 여성을 시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봐야한다는 건 역시나 슬픈 일입니다. 아직 제가 분노하지 않고 슬퍼만 하는 건 초보며느리라 가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그 관계 자체를 다시 사고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시월드니 뭐니 욕을 해도 말이지요.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과도한 시집살이나 며느리살이의 강조와 비난은 우리를 모습만 바꾼  ‘쿨한 시어머니와 주도적 며느리’ 사이로 다시 엮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 관계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요? 어딜 가나 문제를 일으키는 스칼렛 오하라처럼, 서로의 욕망과 열정이 관계의 형식보다 더 중요해진다면 가능할까요? 그렇다면 그 관계는 매끄럽고 평화롭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나쁜 며느리가 되진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할 때보다는 어머님이 어떤 여성일까 조금 궁금해지네요. 다행입니다.

 

*이번호의 커버 이미지는 여강 김융희 선생님이 살고 계신 ‘우백당’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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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마감이 지체되어 발행이 늦어졌습니다. 여러 필진들의 사정으로 글의 수도 줄었습니다. 분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응답 2개

  1. 소리말하길

    두 여성의 고유함은 사라지며 오로지 관계의 형식만이 남는다…아무래도 가장 대표적인 예는 고부관계가 맞는 것 같아요. 결혼이란 형식에 의해 관계지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일테지만, 왜 유독 ‘시어머니-며느리’의 관계에서 “어머님과의 관계는 서랍 속에 몰래 넣어둔 40점짜리 시험지의 존재”가 되는 것일까..의문이 듭니다. 가부장제의 영향이 클테지만 다른 이유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음 왜 그럴까.ㅎㅎ
    덕분에 요즘 제 관심사도 ‘결혼’이 되었어요. 그래서 그런가? 더 재미나게 읽었어요~ 좋은 글 감사욤

  2. 말하길

    나의 영문 이름이… 스칼렛..이라고 하면 비웃음 당할까요? 하하.. 글 잘 읽었습니다. 숨님의 글이, 전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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