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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메트로폴리틱스 – 서울을 어떻게 재개발할 것인가

- 편집자

‘용산’과 ‘살기 위한 전쟁’

메트로폴리틱스 – 서울을 어떻게 재개발할 것인가

1. 짧은 추도사 – 망자들의 저승에 대하여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 ‘대테러전쟁’에 투입되는 경찰 특공대가, 더 이상 밀려 올라갈 곳도 없는 철거민의 망루를 공격했다. 농성이 시작된 지 겨우 25시간 만이었다. 강력한 폭발과 거대한 화염. 누군가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쳤지만 거기 있던 ‘사람’은 결국 ‘숯’이 되고 말았다. 지난 9일, 그러니까 철거민들이 망루에서 타 죽은 지 꼭 355일이 되던 날, 장례식이 엄수되었다. 정부와 유족 사이에 사과와 보상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망자들은 그들이 싸우던 겨울날, 그 온도 그대로인 냉동고 속을 나와 영생의 길로 떠났다.

여기에 모두 알고 있는 저간의 사정을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문자 그대로 곁에 두고 지낸 지난 1년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묵상하고 싶다. 누군가는 삼일장도 오일장도 아닌 ‘355일장’이 있냐고 물었다지만,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이 연결되는, 그 예외적 시간을 우리는 일 년 동안 일상으로 살았다. 우리는 죽은 자들, 무엇보다 어떤 ‘원’을 가진 ‘혼’들이 항상 산 자들의 곁에 머문다는 것을 실감했다.

철거민. 우리는 자기 삶의 장소에서 더 이상의 삶을 허락받지 못한 이들을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그들 중 다섯이 떠났다, 삶의 특정 장소가 아니라 삶의 장소 일반에서. 산 자들과 355일을 더 농성한 후 그들은 장소 없는 세계인 저승으로 갔다. 누구는 ‘먼 길’이라고 하지만, 또 누구는 ‘문 밖’이라고 부르는 저승길. 하지만 장소가 없으니 저승은 그 ‘어디’일 턱이 없다. 그 ‘어디’가 아니니, 저승으로 가는 일은 ‘떠나는’ 일도 아닐 것이다. 망자들이 머무는 곳, 그곳은 아마도 장소 없이 존재하는 세계, 바로 우리의 기억 같은 곳일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깃들 것이다. 죽음이란 우리를 떠나지 않고 다만 우리에게 깃드는 일이며, 저승이란 이승 너머의 어디가 아니라, 이승에 깃들어 있는 또다른 세계가 아닐까.

그러고 보면 누군가의 말처럼 애도란 망자들의 영혼을 우리 맘속 영안실에 모시는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망자들이 영원한 잠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다. 특히 지난 355일 우리 곁에 머문 저 망자들의 경우에는 말이다. 영면을 기원하는 납골당이 아니라, 그들이 투쟁했던 남일당을 품은 이들에게, 그들의 꿈과 소원을 함께 품고 싸우는 이들에게, 망자들의 영혼이 깃들지 않을까. 지난 9일 노제를 지켜보며, 저승이 이승에 깃들어 농성하는 잠재세계로서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뉴시스

2. 자본의 도시와 추방된 자들의 망루

보상합의도 끝나고 장례식도 끝나고, 이제 ‘용산’은 모두 해결된 걸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망루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재판이 진행 중에 있고, 도시 재개발사업이 현행처럼 계속되는 한 제2, 제3의 용산이 나타날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재판을 공정하게 진행하고, 합리적 재개발 방안을 만드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나는 용산의 ‘끝맺음’에 다가가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용산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한 물음이 있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 시작되고 있는가. 도대체 어떤 일이 진행 중에 있는가.

철거 문제가 어제 오늘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철거민의 형상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대중 추방의 어떤 상징처럼 보인다. 남일당의 망루는 추방된 대중들이 내몰린 벼랑 끝 삶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도시에서 벌어질 생존을 위한 전쟁의 어떤 형상 같아 보이기도 한다. 대통령이 지난 일 년 간 비상경제회의를 주재했다는 청와대 지하벙커의 ‘워룸’과 삶의 비상사태 속에서 철거민들이 설치한 남일당의 ‘망루’는 대립적 쌍생아처럼 느껴진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대중들의 삶이 극도로 불안정해졌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가난한 많은 이들이 토지로부터, 직장으로부터, 학교로부터, 병원으로부터 밀려나고 추방되고 있다. 사실 가난한 이들만 많아진 건 아니다. 지난 십여 년간 부자들도 참 많아졌다. 이들은 도심의 고층빌딩에 근무하는 펀드매니저와 청소부처럼, 한 공간을 쓰지만 서로 마주하는 일이 없이 두 세계로 나뉘어 살고 있다.

소득불평등도추이(지니계수). 위쪽은 1인가구를 포함한 경우고, 아래쪽은 1인가구를 제외한 경우.

상류층과 빈곤층 비중추이(단위 %)

97년 외환위기가 발발했을 때, 그 예외적 사태의 출현은 전사회적 구조조정을 가능케 한 근거였다. 그런데 그 한 번 뿐인 줄 알았던 위기가 현재 세계금융위기까지를 포함해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사회적 구조조정은 예외가 아니라 상례가 되었고, 위기는 가난한 자들의 삶에 고유한 형식, 그것도 영속적인 형식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림이 보여주듯이, 위기는 권력과 부가 축적되는 새로운 형식이기도 한 것 같다. 위기론은 권력자들이 힘을 마구잡이로 행사하는 배경이 되고, 기업에 대한 규제를 모두 철폐하는 탈규제화의 근거가 되고 있다. 게다가 생태환경과 에너지[4대강 개발, 전기와 물의 민영화], 교육과 의료시장[재벌의 교육과 의료시장 진출], 방송[재벌신문의 공중파 방송진출], 안전[보험산업과 경비산업, 돌봄산업] 등, 과거 공공기관에 관리를 맡겼던 삶의 기본 영역들이 사유화 가능한 상품 시장으로 열리고 있다.

마치 경찰의 방조 아래서 용역깡패들이 설치는 것처럼, 가난한 대중들의 삶은 정부의 ‘적극적인 방기’ 아래서 자본의 온갖 폭력에 방치되어 있다. 방기한다는 것은 어떤 적극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지만, 신자유주의 정부 아래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무위의 적극성’이 나타난다. 많은 공적 관리 영역들을 사적 자본에 적극적으로 포기하고 양도하고 분양한다. 그 안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적극적인 경찰의 울타리 안에서 철저히 사적인 것이 된다. 특공대를 투입해서 참사가 났지만, 문제는 재개발조합과 철거민의 사적 문제라는 식으로.

3. 메트로폴리틱스(Metropolitics) -서울의 재개발

메트로폴리스 서울은 이 모든 문제들이 집결된 곳이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슬럼, 지구를 덮다>에서 전세계적 슬럼화와 거대도시화가 함께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아마도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자원은 거대도시에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시장 개방 여파로 농촌에서 쫓겨난 사람들, 다른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 게다가 도시의 비정규직이나 실업자들, 빈민들, 모두 도시에 와야 살 수 있고 도시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거대도시에 모이고 머물게 된다. 청소를 하든 노점상을 하든, 생계를 꾸려나가려면 서울에 있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서울은 막대한 부가 창출되고 집중되는 곳이면서 동시에 극심한 가난이 집중되는 곳이 되었다. 서울은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면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멕시코 이민자들이 빈곤을 벗기 위해 미국 이주를 감행할 때, 멕시코와 미국의 경계인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다. 국경은 미국의 메트로폴리스 안까지 따라 들어간다. 거기서 가난한 이들은 부자들과 자신들을 가르는 국경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서울 역시 부자와 가난한 이들을 가르는 다양한 국경, 다양한 분리벽이 존재하고 또 만들어지고 있다. 그 벽 바깥으로 내쳐지면 좀처럼 다시 넘기가 쉽지 않다. 이 경계를 두고 추방과 침투, 배제와 난입 등 작은 규모의 ‘시가전’이 끊이질 않는다. 때로는 용산의 경우처럼 특공대가 투입되고 화염병이 투척되는 경우도 있다.

메트로폴리스는 그 존재 형태가 가난을 모으고 양산하는 체제이다. 하지만 또한 가난을 그 무엇보다 적대시 하는 체제이기도 하다. 도시의 통치자들에게 빈곤은 범죄나 질병의 배후지이고, 도시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주범이다. 빈곤층을 어떻게 도시 바깥으로 몰아낼 것인가. 이런 맥락 위에 도시재개발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도시재개발은 경제전략이자 정치전략이고 치안전략인 셈이다.

197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 도시개발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노후불량주거지를 정비하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공공사업이었다. 그러나 이런 목표는 법조문에나 남아 있을 뿐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합동개발 형식으로 민간기업이 개발사업에 참여하더니, 2000년대 이후 ‘뉴타운 사업’은 아예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도시재개발을 통해 ‘살기좋은’ 도시를 만들고 양질의 주택을 공급한다는 건 이제 ‘누구에게’를 묻지 않는 한 의미없는 말이 되었다.

2008년 서울시정개발원이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소형화된 가구의 비중은 엄청나게 커졌는데 소형주택의 비중은 오히려 크게 감소했다. 게다가 재개발·재건축 사업으로 공급되는 주택양은 그것으로 사라지는 주택양보다도 적다. 새로 공급되는 주택이 대부분 중대형이기 때문이다. 가구 규모는 줄었는데 평수는 늘고, 주택공급은 되지만 멸실되는 주택이 더 많은 이 이상한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보고서에 따르면, 이는 “주택공급 대부분이 기업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민간 주택건설업체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이다.” 한마디로 주거가 기업이윤을 위한 상품이 된 것이다. 손낙구에 따르면, 뉴타운 개발 이후 집값은 3억대에서 5억대로 폭등하고, 평균 월소득 200만원에 살 수 있는 동네는 650만원이 되어야 살 수 있는 동네로 변한다. 주거 형태 자체가 상품화된다는 것은 주택만이 아니라, 교육, 문화, 통신, 의료 및 돌봄, 심지어 치안 경비 시스템까지 통째로 묶여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 어떤 법도 가난한 자들이 거기 사는 것을 막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원주민의 85%는 그토록 멋지게 재개발된 자기 동네를 떠난다. 아니 떠나야 한다. 그들이 견딜 수 있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의 주거형태가 이런 식으로 상품화된다는 것은 깊이 음미해야 할 대목이다. 참고로 작년 국회에서는 한국의 신도시수출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삶에 필요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형식 자체가 구매 대상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삶의 구매력이 없는 가난한 자들을 돈의 장벽으로 둘러쳐 도시 바깥으로 추방하는 일이다. 2008년 서울시 교육감이었던 공정택은 서울시장에게 강남구 수서지구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임대주택단지 건립사업을 재고해달라는 공문을 보낸 적이 있다. 가난한 자들이 벽을 넘어오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떻든 삶의 공공성을 포기하고 도시개발을 기업에 맡김으로써,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대중을 추방하는, 소위 ‘무위에 의한 빈민 청소’를 자행했다.

하지만 메트로폴리스에서 빈민을 그렇게 털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메트로폴리스의 형성, 거대도시의 확장 자체가 지난 수십 년 간 이루어진 대중 추방의 결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도시 개발을 통해서 빈민을 추방해도 그들은 낙후된 곳으로 이동하면서 메트로폴리스에 달라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개발을 통해 슬럼을 없앤다고 하지만 개발이 가난한 이들을 이동시키고 다른 곳에 슬럼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생존부터 환경, 교육, 의료, 안전에 이르기까지, 삶의 형식 자체가 상품화될수록 가난한 이들은 삶 자체에서 배제되게 된다. 그리고 갈등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한’ 전면전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나는 이처럼 도시적 삶의 총체적 관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을 ‘메트로폴리틱스(metropolitics)’라고 부르고 싶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비정규직이나 실업자가 되는 문제가 아이가 어느 학교를 가는가의 문제이며, 어떤 병원을 다닐 수 있는가 이며, 어떤 물건을 어디서 소비하고,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 것인가와 관련된다. 삶의 한 문제는 모든 문제인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이 경제이고 동시에 정치이다. 예전에는 노동자들의 투쟁, 빈민들의 투쟁, 학생들의 투쟁, 세입자들의 투쟁이 제 각각이었지만, 메트로폴리스에서는 그것들이 복잡한 지하철망처럼 엮여 있다.

출처: 연합뉴스

결국 문제는 어떤 삶의 형식을 이 도시에서 만들어낼 것이냐이다. 서울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서울을 어떻게 개발해야 하는가. 안토니오 네그리는 ‘개발(development)’에 대한 흥미로운 견해를 들려준다. 그에 따르면 ‘개발’이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발명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가속화된 개발을 발명했을 뿐이고 그것을 화폐적으로 정의했을 뿐이다. 하지만 자연에서 ‘개발’은 ‘연대(solidarity)’를 통해 이루어진다. 홀로인 인간은 광야에 버려진 어린아이처럼 위험하다. 하지만 연대를 통해 공동의 삶을 구축하면 안전해진다. 개발이란 그런 것이다. 숲과 강물, 그리고 대지, 그 위의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들. 우리가 그들과 공동의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그들과 연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풍요로워질 것이다. 이는 이윤축적을 위해 추방하거나 약탈하거나 정복하는, 그래서 공통의 관계를 거부하고 일방적 명령을 내리는 자본주의적 개발과는 정 반대이다.

자 그럼 서울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추방하고 배제하는 개발에 맞서 공동의 삶의 형식을 창조할 수는 없는가. 공동의 삶을 ‘적극적으로 방기’하는 정부, 그리고 기업의 여러 안전 상품들(보험회사에서 경비업체 이르기까지)에 덜 의존하면서, 그것들과 다른 대안적 삶의 형식을 개발할 수는 없는가. 다행히 메트로폴리스에는 가난한 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막대한 자원이 있다. 연대를 가능케 하는 다양한 물적 자원, 다양한 소통의 수단들이 옆에 있고, 양산되고 있는 가난한 자들 자신, 그들의 창조적 두뇌와 욕망이 있다. 그것이 메트로폴리스의 최대의 부이다. 우리 도시의 삶을 재개발하는 것, 서울을 재개발하는 것은 가능할까.

– 고병권(수유너머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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