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종로가 창상지변(滄桑之變)이다

- 김융희

창상지변(滄桑之變).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으로, 갑자기 환경이 천양지차(天壤之差)로 확 변함을 뜻하는 말이다. 현대인들의 재기(才氣) 넘치며 시의적절(時宜適切)한 신조어들이 넘쳐난 요즘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창상지변(滄桑之變)과 같은 뜻으로 쓰인, 지금 엄청 변하고 있는 세상을 보면서, 내가 모르는 신조어(新造語, 새로 만들어진 말)가 분명 또 만들어졌을 것 같다. 그 말이 나는 무척이나 궁금하다. 지금은 전국 어데도 변하지 않는 현장을 거의 볼 수가 없다. 오히려 급변하는 시대에 살면서 순응(順應)된 의식이 무뎌져 둔감(鈍感)할 뿐, 조금만 주의(注意)하여 살피면 정신이 아찔해 어리뻥뻥해진다.

 

오늘 인사동에서 간단한 모임이 있어, 모처럼 상경(上京)길이다. 오랫동안 시간을 핑계로, 이발을 않는 채 장발로 지내 왔다. 아마도 반년은 넘었을 것이다. 오늘은 긴 머리칼 손질을 하자며 이발관엘 들르기로 예정해 가까운 거리의 종각역에서 내렸다. 평소 자주 다녔던 익숙한 거리라 주저 없이 가는데, 청진동으로 나가는 입구가 막혔다. 은행 건물을 통과해서 겨우 종각이 건너 보이는 종로 네거리에 섰다. 옆의 종로타워, 마주 보이는 영풍문고, 그 너머 멀리 남산타워 등이 익숙하게 시야에 드는데, 내가 선 곳은 도대체가 설고 어색하다. 공사로 인해 입구가 막혔고, 일대(一帶)가 속속들이 바뀌며 변하고 있다. 온통 신축 건물들로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살풍경(殺風景) 주위가 험상스레 살벌하다.

 

인사동의 이웃 청진동에는 나의 단골 이발관이 있다, 주택의 모서리를 가게로 사용해 실비(지금 5000원)로 주인 혼자서 운영하는 골목 깊숙이 자리한 곳이다. 그동안 나는 두서너 달이면 꼭 한 번씩은 몇 십 년을 거의 빠짐없이 이곳을 이용해 왔었다. 물론 젊었을 때는 더 자주 다녔지만, 나이가 들어 점차 몸 관리에 관심이 줄면서, 이용 간격이 자꾸만 멀어지고 있다. 오늘도 거의 반년 만에 들르게 되는 것이다. 꼭 이발이 아니더라도 그리도 자주 찾는 곳이 종로였다. 그런데 가까운 친구를 만나면 즐겨 찾았던 이곳 피마골 주점들도 이제는 모두 떠나버렸고, 구수한 맛의 청진동 해장국집도 사라져, 지금은 그들이 있었던 자리도 가늠할 수가 없다. 마음이 허전 서운코, 기분이 허탄하다. 불과 몇 달 만인데, 이처럼 황당할 수가…… 나는 만감(萬感)이 교차(交叉)해 한참을 멍히 그냥 서 있었다.

 

학창 시절 4.19 혁명의 대열(隊列)에 합류하여 시청 광장에서 시위 중이었다. 맞은편 경남극장 옥상에서 쏘아대는 총소리에 놀라 도망친 길이 피마골이였고, 들개처럼 쏘다니며 젊음을 불태울 때면, 저녁녘 일행들과 주시(酒時)를 앞당겨 청진동 주막에 앉아 왕대포를 마셨던 생각들, 독립문 부근의 영천에 살면서 백화점 옥상의 화신극장에서 싸구려 영화 마지막 회 두 편을 보다가 통금에 쫓겨 가슴 조이며 지나던 길이 종로였다. 지금의 단골 이발관도 그때부터 이용했었던 곳이다. 생각하면 종로는 나의 고향처럼 느껴진 곳이다. 그동안 다행스럽게도 몇 십 년을 끄떡도 없이 옛 모습 그대로 잘도 버틴다 싶었던 곳이 종로였다. 그런데 변화의 크기와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면서 지금 대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뜯겨 헐리며 말없이 우리 곁을 떠나는 종로의 옛 모습을 이제는 다시 볼 수가 없다.

 

장님 물건 찾듯, 주섬주섬거리며 나는 이발관을 찾았다. 어림잡아 현장 뒷켠을 돌아서니 낯익은 표시등이 돌고 있다. 옛날에도 걸려 있던 단골집 간판등이었다. 초라하지만 쉼 없이 여전히 잘 돌고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왈칵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았고, 덥석 부등켜안고도 싶었다. 멎었던 숨통이 트인 것도 같다. 허름하지만 가게도 문짝도 정겹고 반가웠다. 얼른 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인도 여전하다. 손님은 없고 늦은 아침인지, 이른 점심인지를 먹고 있었다. 나도 반가웠고 그도 반기었다. 먹는 밥상을 덮고 일어서려 한다. 그럴 것 없으니 먹는 밥을 계속하라며,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난데없는 고맙다는 인사말에 그가 어리둥절하며 이상해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내 말을 의심한 그에게, 나는 다시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내 심사(心思)를 설명했다. “아직도 자리를 지켜줘 고맙고, 저 돌고 있는 표시등을 남겨 줘서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아마 저 돌고 있는 간판 표시등이 없었더라면 나는 울어버렸을 것이다. 울진 않았더라도 마음이 무척이나 슬펐을 것이다. 우리는 이발을 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눴고, 또 다시 헤어졌다. 나는 문을 열고 나오다 말고 다시 돌아서며, “시간 되면 놀러 오시구려” 우리 집 주소가 적힌 명함을 내밀었다. 막걸리 잔을 나누면서 종로 이야기들을 나눌 기회가 있을는지?

 

다시 종로 네거리에 서니, 마침 종각에선 정오를 알리는 은은한 종소리와 더불어, 울굿불굿한 깃발의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고 있었다. 신구가 함께하며 숨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의 혼돈(混沌) 문화가 이렇게 우리를 어리뻥뻥하게 한다. 이 어리뻥뻥 어지럼증이 쉬이 가시질 않고 있다. 나는 이번 호 여강만필을 “우백당 식구들(3)”으로 끝내려 했었다. 그래서 쓰기를 시도했다. 그때마다 종로통 쏘크가 나를 어지럽히곤 했다. 몇 번을 반복했지만 어쩌랴. 이처럼 “아니다 싶어” “종로가 심히 변하고 있다”는 사설(辭說)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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