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내가 영화를 보면서 꿰어 맞췄던 퍼즐은 마지막 신(scene)

- 성현

내가 영화를 보면서 꿰어 맞췄던 퍼즐은 마지막 신(scene)에서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주인공들을 그저 현실물정 모르는 청년들의 유희라고 판단했던 내 생각들이, 순수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고, 그들은 그저 어른아이라고 생각했던 내 판단들이, 마지막 신에서 송두리째 뒤집혀 버렸다. 그렇게 뒤집혀 보니 그들을 그러한 어른아이라고 판단하게 만든 각각의 신(scene)들에 대한 내 판단 또한 다시 재조명되어야만 했다. 매튜, 이사벨, 테오 이들은 일차원적인 인물들이 아니었다. 이 인물들에 대한 판단은 쉽게 닫힐 수 없다.

 

The.Dreamers.2003.720p.BluRay.X264-AMIABLE[19-48-23]

 

분열된 ‘우리’

 

 

그들은 서로를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거울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알려주듯이 그들은 확실히 분열되어 있다. 장 뤽 고다르의 국외자들에 나오는 그 유명한 신을 현실로 옮겨놓고 나서 그들은 외친다. “우린 널 받아들인다. 우리 중 하나로!(We accept you, one of us)” 그들을 서로를 ‘우리’라고 부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각자가 ‘우리’로 환원되지는 않았다. 아니, 환원될 수 없었다. 국적도 계급도 달랐고, 그렇기에 서로가 살아왔던 삶의 궤적으로 인해 각자에게 형성된 세계 또한 달랐으며, 무엇보다 이사벨과 테오는 매튜와 달리 샴 쌍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오는 매튜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는 분명 널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와 우리(이사벨, 테오)가 정말 하나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마.”    이 분열의 징후는 이미 매튜가 이사벨과 테오의 부모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신에서부터 알아볼 수 있다. 라이터 하나로 모든 사물의 길이, 심지어 인체의 비율까지도 측정해낼 수 있다고, 거기서 알 수 있듯이 사실상 모든 존재자들 안에는 하나의 보편적인 조화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는 그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매튜는 사실상 그가 속해있는 세계를 동일성이라는 척도로 꿰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테오는 마오이즘에 관한 매튜와의 대화 중에서 그런 매튜의 태도를 보고 아버지와 같다고 비난하는 것이며, 고로 그러한 매튜의 태도는 확실히 어른스럽다.

 

이렇게 어른인 매튜이기에, 사실상 프랑스로의 여행은 하나의 일탈이자 도피이다.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프랑스로 가출한 것이며, 그 가출의 원천은 바로 영화다. 초반 매튜의 독백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영화를 통해 현실에 대한 감각이 몽롱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현실감각을 완전하게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의 음모를 제거하려 하는 이사벨과 테오에게 화를 내며 제발 삶을 향유만 하려고 하면서 도피하지 말고 세상을, 현실을 직시하라고 그는 일갈한다.

 

이렇게 끊임없는 매튜와 쌍둥이의 불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사벨과 테오는 확실히 매튜와는 달리 어른아이이다. 사회 안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바로 ‘나’를 관리하는 것이며, 동시에 ‘나의 것’을 관리하고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내가 사회 안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올곧이 서있을 수 있도록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 그러한 자립을 위해 임금노동을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의 톱니바퀴 속으로 들어가는 것. 매튜는 이런 의미에서의 어른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른스러운 청년이었다. 그가 이사벨에게 나‘를’ 사랑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리고 끊임없이 매튜의 의견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사벨 네 스스로가 결정하라고 강요했을 때, 매튜는 그렇게 이사벨에게 자신의 것이 되어달라고 간청한 것이며 동시에 이사벨 또한 어른스럽게 판단하라고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매튜와 불화를 겪는 쌍둥이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이사벨과 테오가 아예 하나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위의 거울에서 볼 수 있듯이 이사벨은 테오와도 매튜와도 분리되어 있고, 동시에 이 둘 사이에 위치 지어 있다. 이 포지션은 굉장히 상징적이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실 이사벨은 마지막 신 직전까지 테오와 매튜 사이에서 끊임없이 서성거리기 때문이다. 분명 이사벨과 테오는 거의 하나처럼 보인다. 서로는 서로의 경계선을 구획하지 않는다. 대소변을 보는 것, 잠을 같이 자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의 가장 동물적인 지점까지 공유하는 이들은 어찌 보면 정말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매튜를 통해 그러한 그녀의 기존의 포지션은 흔들린다. 나‘도’가 아닌 나‘를’ 사랑해달라고 매튜가 이사벨에게 요청했던 것을 그대로 테오에게 요청하는 그녀의 모습에는 이미 매튜의 면모가 스며들어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매튜가 이사벨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테오를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은 또한 여전히 그녀가 테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아버지를 두려워한다. 테오와 달리 그녀는 아버지에게 직접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마약, 섹스, 담배, 혁명, 음악, 영화 등 당시 전후 세대들이 아버지(기존세대)와의 단절을 일궈내기 위해 가꾸어내었던 문화적인 장치들에 대한 그녀의 향유는 영화 곳곳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그러한 그녀의 기호는 이미 암묵적으로 그녀 자신이 아버지 세대의 문화와는 단절선을 긋겠다고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테오의 관계, 즉 근친상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러한 그들의 은둔적이고 유아론적이며 동시에 비문화적․비도덕적 관계가 부모님께 걸렸을 때 자살을 결심했던 그녀의 선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자신의 세계가 침입 받거나 도촬당하거나 혹은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과 테오를 순수 중의 순수라고 표현함으로써 순수하지 않은 아버지의 문화에 대한 두려움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그녀는, 자신의 경계선을 바로 순수라는 테두리 안으로, 즉 이질성과의 조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어버린다.

 

테오는 분명 이러한 이사벨과 공유하는 지점이 많다. 아버지들의 문화와 단절하려고 하는 지점이나, 이사벨과 함께 은둔적이고 유아론적인 유희를 즐기는 부분이나, 동시에 그들의 유희를 지탱하는 생존의 문제는 아버지의 돈을 빌려서 이어가는 지점이나. 하지만 이러한 테오가 이사벨과 확연하게 갈라지는 지점은, 이사벨처럼 순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역을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사벨보다 더욱 더 자신의 직관에 따른 판단에 진솔하다는 점이다. 그의 이러한 성격의 백미는 바로 라스트 신에서 등장한다.

 

The.Dreamers.2003.720p.BluRay.X264-AMIABLE[19-55-02]

 

혁명은 어디서 오는가

 

 

혁명을 누구의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과연 혁명의 주체를 상정할 수 있을까? 혁명의 주체를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추론해 낸 맑스주의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맑스주의자들이 목전 앞의 혁명 앞에서 판단을 내려야할 때 그들은 어떻게 했었는가. 영화의 배경인 68혁명을 대하는 수많은 맑스주의자들, 특히나 대학이나 정당활동을 하던 기성의 맑스주의자들, 예를 들어 루카치나 알튀세르와 같은 강단 맑스주의자들은 당시 68혁명을 맑스주의라는 기치로 담아낼 수 없는 폭동이라고 칭하며, 그들의 봉기에 혁명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렇다. 오히려 혁명의 주체는 그들이 과학이라는 토대 위에서 객관적으로 추론해내려고 노력했던, 그리고 그러한 과학적인 생산양식을 정초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노동자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혁명의 불씨는 바로 테오와 같은 (비)노동자로부터, 즉 학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비노동자라는 측면, 즉 아직 노동전선에 뛰어들지 않았다는 것, 고로 스스로의 능력으로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는 것. 영화에서 보다시피 매튜는 아버지의 돈으로 연명하는데, 바로 그러한 생활기반을 토대로 만들어 낸 문화를 바탕으로 아버지를 부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부정의 논리는 사실상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인 측면을 거의 결여하고 있다. 오히려 그 부정으로서의 봉기는 합리가 아닌 직관에, 냉철함이 아닌 분노에, 동적(active)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반동적인 것(reactive)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마오에 대한 매튜와 테오의 논쟁에서 볼 수 있다시피 테오는 매튜의 사실상 합리적이고 냉철할 비판을 폭력으로 무마하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의 귀를 닫아버리려고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는 더욱 더 확고하게 드러난다. 폭력을 폭력으로서 상대하는 것이 아닌, 에로스적 사랑과 지식으로 국가폭력을 상대해야 한다는 매튜의 절박한 절규를 ‘닥쳐!’라는 강력한 한 마디로 무시해버리고 투쟁전선에 가서 화염병을 던지며 그 누구보다 봉기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사실 테오의 광기에 가까운 폭력에 대한 매튜의 비판은 일견 틀린 것이 없다.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 싸울 때는 결국 폭력의 연쇄작용에 의해 파국으로 점철 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매튜의 논리는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정합성으로 가득 찬 매튜였기에, 결국 매튜는 이들을 떠난다. 마치 세이렌의 노래를 어떻게든 듣지 않으려고 했던 오디세우스처럼, 매튜는 혁명이라는 이질적이고 광기로 가득찬 타자성에 몸을 담그기보다는, 오히려 냉정하게 그것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이 둘에 대해서 어떻게 가치판단을 할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인물들의 평가가 닫힐 수 없음이 드러난다. 결국 테오의 끝은 파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극단적 폭력의 결과가 어떠했는가는, 적군파의 사례에서, 68혁명 잔당파의 사례에서, 이태리 총리를 암살했던 붉은 여단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 대중들의 외면과 혐오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튜가 옳다고 주장하는 어른의 삶이 아름다운 것 또한 아니다. 결국 ‘나’가 흔들리지 않는 삶, 혹은 ‘나’를 확장하고자 하는 삶에서, 나 아닌 이질적인 것이 틈입하지 못하는 삶에서, 타자와의 대면 혹은 나 아닌 자들과의 대면은 무방한 일일 것일 테고, 그것은 연대의 불가능성, 공감의 불가능성, 이것들을 바탕으로 하는 봉기 및 혁명의 불가능성을 낳음으로써 이 세계 안에 다른 세계들을 틈입시킴으로써 새로운 세계로의 전화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박탈하게 만들 것이다.

 

영화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나온다. 테오와 같이 영화 같지 않은 현실에 분개하며 삶을 영화로 만들려는 이들이 직관에 기초한 이상에 갇힘으로써 광기 어린 자가당착으로 빠져들어가는 모습도 있다. 동시에 혁명에 등을 돌리고 합리적이고 냉철한 언어로 그것을 비판하지만 결국 차가움과 고독만이 남는 매튜의 뒷모습 또한 마지막 신에서 함께 드러난다. 감독은 우리에게 어떤 판단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혁명 앞에서 너는 어찌할 것인가. 분명 둘 다 명과 암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응답 2개

  1. 지지말하길

    ㅋㅋㅋㅋ 제목이 한번도 언급이 안됬네요, 몽상가들입니다.

  2. 독자말하길

    이 글은 무슨 영화를 가지고 쓴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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