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헬기를 넘어선 움막의 정치

- 지안

 

 

0. 울타리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해, 마을 주민들 그리고 연대해오는 각종 사람들이 투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공사는 여전히 강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 현장을 소개하면, 송전탑은 산 위에 세워지고 산 위로 갈 수 있는 통로는 경찰이 완전히 차단하고 있는 상태다. 송전탑 공사에 필요한 중자재들은 밀양시 단장면 단장리에 위치한 ‘금곡헬기장’에서, 실제 공사 현장인 산 위로 헬기를 통해 옮겨진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헬기 사용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단장면 밀양 투쟁의 거점인 움막 또한 금곡 헬기장 앞에 위치해있다.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와 헬기장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타리를 따라서 다시 방패를 둘러 친 경찰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현재 SNS를 타고 밀양에서 벌어지는 <국가폭력>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경찰은 한전이 지정한 경계인 울타리를 보호하는 것을 넘어서, 산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모두 제한하고 있다. 또한 아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때에도 불법채증을 거듭하며 그에 대항하는 주민들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고 있다. 송전탑 건설 사업의 과정에서부터 이루어진 잘못된 ‘합의’에 더해 현재 공사단계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은 경찰의 치안의 방패에서 배제되고 있다. 그리고 헬기 우선 중단과 관련하여 “대표끼리 대화하자”는 이야기조차 묵살된 것으로 보건대, 지금 이 공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주체에는, ‘주민’은 물론이고 주민도 아닌 ‘연대 해온 시민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전원개발촉진법>에 의거하면 한전은 주민설명회 한 번만으로 송전탑 건설을 추진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앞선 두 번의 765kv 송전탑 건설처럼, 만약 저항 없이 그대로 추진되었다면 치안은 어려움 없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밀양에는 그 배제의 구분선을 지우려는 흐름, 그리고 공권력과 ‘민주주의’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정치가 있다.

 

헬기

10/3 목요일, 헬기가 이륙했다. 이 날 오전 7시 반부터 약 400명의 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울타리를 둘러쌌고 곧이어 11시쯤 행정대집행을 실행하러 약 70명의 공무원들이 합세했다. 헬기는 아홉시쯤 이륙해서 내가 현장을 떠나던 오후 6시까지 계속 중자재를 나르고 있었다.

처음 헬기가 이륙했을 때 한 마을 할머니가 주저앉은 채 목 놓아 우셨다. 이때부터, 단순 대치상황에 있던 현장은 격렬해졌다. 마을 주민과 시위대 중 일부는 차도에 누움으로써 한전에게 헬기 사용을 우선 중단하고 대화를 하자는 의견을 강하게 전달했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하고 묵살될 뿐이었다. 차도에 누워있는 와중에 어느 순간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져 모두 일어나보니 우리 중 여러 명이 헬기장으로 진입했고, 그 7명이 모두 경찰에게 연행되고 있었다. 헬기장 앞은 “헬기 사용, 중단하라” 외치는 시위대의 찢어지는 함성이 귀를 때리고, 와르르 몰려가 사진을 찍어대는 기자들과 시위대와 경찰이 엉켜 있는,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다. 그때, 내 시선이 집중된 곳은 헬기였다. 아마도 모두의 시선이 헬기를 향해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헬기는 너무 먼, 어떤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 것처럼 차분하게 자재를 나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륙하면서 주위에 큰 바람을 일으켰고 그 때문에 피켓이나 나뭇잎들이 바람에 쓸려 다녔다. 헬기가 내는 시끄러운 소리와 바람은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지만 우리가 딱히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헬기가 주는 풍경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멈출 수도, 되돌릴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자본의 거대한 힘처럼 보였다.

 

2. 벌집

10/2일 새벽 처음 단장면 움막에 도착했을 때, 마을 주민들로부터 한 가지 에피소드를 들었다. 전날 행정대집행을 위해 온 공무원들을 쫒아낸 것이 사람들이 아닌 벌들이었다는 것이다. 공무원 중 누군가 벌집을 건드렸고 따라서 행정대집행도 철수될 수밖에 없었다. 벌집에 의해 행정이 불가능해진 이 상황, 누군가에게는 단지 재수가 없었던 날로만 여겨졌겠고 누군가에게는 행운이지만 밀양에서 이 사건은 단순히 지나가는 한 특별한 행운으로만 여겨지지는 않았다. 다음날 집회에는 “벌들도 생존권이 있다는 겁니다.”라고 “벌들도 싸운 것”이라고, 벌과 생존권 문제가 연관되어 외쳐졌다.

밀양 송전탑 문제에서 보다 본질적인 부분은 이것이 ‘생존권’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송전선에 의한 건강위협이나 송전탑 찬반을 둘러싼 마을공동체 파괴, 미래세대 문제, 밀양시의 경관침해 문제를 차치하고서 객관적인 보상금액만을 따져 보아도, 비상식적인 보상금은 밀양주민들의 현실적인 재산권을 위협한다. 산외면 보라마을에서 시가 6억 9000만원에 달하는 논의 보상금은 8700만원으로 책정되었고, 송전탑이 지나가면서 항공방사가 불가능해져 생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단장면 동화전 마을의 한 주민에게는 고작 154만원의 보상금이 주어졌다. 그러나 밀양 주민들이 “보상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정당한 보상액에 관한 문제제기라기보다는 주민들의 ‘생존권’ 그리고 밀양이라는 땅을 지키려는 의미가 담겨있다. 사실 도시공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시골이라는 장소가 주는 ‘것’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가령 어떤 측면에서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은 단순히 <아파트>일 뿐이다. <다른 아파트>와 <내 공간인 아파트> 사이의 거리는 그리 크지 않다. 아파트는 그저 아파트일 뿐이며 언제든 우리는 이 <아파트>에서 <다른 아파트>로 옮겨갈 수 있다. 도시 시민에게 도시 안의 공간들은 갈수록 서로 구분되지 않는 균일한 공간들이지만, 밀양 주민들에게 <밀양>과 <밀양 아닌 곳> 사이는 보상금이나 국책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좁힐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즉 밀양 주민에게 땅은 일차적으로 재산이기에 생존의 문제이고, 동시에 땅을 기반으로 삶을 구성하고 살아가기에 다른 차원에서 생존의 의미다.

이런 점에서 밀양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있다. 벌 때문에 행정이 불가능해진 상황은 행정대집행을 해야 하는 공무원들에게는 해프닝 이었겠지만 밀양에 있던 우리들에게 그건 벌들이 외치는 어떤 생존에 관한 문제로 보였다. 사람들은 농성하는 밀양 주민들에게서 지역 이기주의를 보지만 밀양에 연대해오는 사람들은 밀양 주민들로부터 <밀양>이라는 곳이 가진 가치를 발견하고 그들이 제기하는 핵과 대체에너지, 미래세대, 농사에 관한 문제를 본다. 밀양 주민들, “외부 세력”이라 일컬어지는 연대하는 시민들, 그리고 벌들 등등은 모두 보이지 않던 생존권을 보이게 한다는 측면에서 하나로 묶인다.

 

3. 움막 

이진경의 언어로 랑시에르의 ‘정치’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나누어 가질 몫이 없었던 자가 그 몫을 다투게 되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반면 치안은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에서, 이렇게 정의된다. 치안은 “통치의 과정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공동체로 결집하여 그들의 동의를 조직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자리들과 기능들을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것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이진경의 언어로는, 치안이란 “내부자들에 의한, 내부자들을 위한, 내부자들의 권력의 작동”이다. 또한 주민들의 동의 없이 주민설명회 한번으로 송전탑 건설 사업을 추진했던 한전처럼 치안은 “합의의 이름으로 이질적인 자들을 배제하면서 사회를 하나의 동질성으로 통합”한다.

울타리를 따라서 만들어지는 치안의 경계는 강하고 견고해 보인다. 그러나 움막에서 만들어지는 언어들을 보면,

 

“이 선(차도)을 두고 저긴 북한이고 여긴 남한인거야”

 

“공산주의보다 못하다” 

 

밀양에서 한전(경찰)과 움막을 가르는 “이 선”은 3·8선으로 불리고 있다. ‘저쪽(한전, 경찰)’과 ‘이쪽(움막, 주민과 연대하는 사람들)’을 북한과 남한으로 구분하는 이 언어는, 송전탑 건설이 ‘국책 사업’이라는 것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싸움을 ‘지역 이기주의’라고 언론이 덧씌우는 것과 정반대로 보인다. 그러니까 주민들과 소통 없이 졸속으로 이루어지는 공사와 그것을 옹호하는 공권력이 민주주의냐는 문제제기들이 분분한데,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가 재정의 된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르케 논리와의 단절, 곧 아르케의 자질로 지배를 예견하는 것과 단절하는 것이며, 특정한 주체를 정의하는 관계 형태로서의 정치 체제 자체이다.(‘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 테제4)” 아르케란 사람이나 사물들에 적절한 자리를 배분하는 원리를 말한다. 밀양의 상황에 대입시키자면, 추수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움막에 나와 공권력을 향해 시위하는 것은 지정된 자리에서 이탈하는 행위다. 또한 아르케가 “배분된 자리들을 위계화 시키는 원리”라는 측면에서 벌들의 생존권은 애초에 한전의 공사에 우선되지 못하고 거론조차 되지 못할 일이다.  민주주의(democracy)는 데모스(demos)의 권력을 뜻하는데 랑시에르는 데모스가 공동체의 이름이기 이전에 빈민들의 이름이라고 한다. 여기서 빈민이란 경제적인 의미가 포함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중요하지 않은 자들, 아르케의 힘을 행사할 자격이 없는 자들, 셈해질 자격이 없는 자들”을 말한다. 즉 “말하지 않아야 하는데 말하는 자, 몫이 없는 것에 참여하는/몫을 갖는 자가 데모스 출신인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런 데모스는 아르케와 단절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다시 벌의 문제로 돌아가서, 밀양의 주민들이 데모스이고 이들이 지금 통상적인 의미의 민주주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면, 송전탑 공사에 전혀 고려 대상도 아니며 보이지 않던 ‘벌’이라는 존재를 동등한 ‘생존권’을 가진 존재로 가시화시켜 끌어올리고 있다면, 여기에서 확실히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가 작동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리에서 이탈하는 데모스이고 민주주의에 의문을 던지고 있으며, 데모스의 권력이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민주주의까지로도 나아갈 수 있는 싹을 제공하고 있다.

 

4. 다시 ‘헬기’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선험적 체계를 유지하는 권력과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밀양에서, 그 대결을 가능하게 하는 데모스에는 주민들, 벌들, 자연도 포함되어있다. 이들의 저항은 헬기가 가진 권력과 치안의 구조의 장을 바꾸고 새로 조직해낼 수 있을까? 경찰통제선과 울타리의 보호막을 넘어서 자기 몫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저기”로 가닿을 수 있을까? 기자, 경찰, 시위대, 마을 주민이 한데 엉킨 움막 위를 유유히 지나가는 헬기는 이 싸움에서 어떤 초월적인 존재로 보였다. 실제로도 자본 내지는 치안이란 그만큼 단단한 것 같다. 랑시에르에게서 답을 찾자면, “정치의 중대한 작업은 그것의 고유한 공간을 짜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의 주체들의 세계 그리고 정치가 작동하는 세계를 보이게 만드는 데 있다. 정치의 본질은 두 세계가 하나의 유일한 세계 안에 현존하는 불일치를 현시하는 것이다.”(‘정치에 대한 열가지 테제’ 중 테제8) 그러니까 정치에 속하지 않는 우리가 정치에 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저들에게 보이지 않는 한 세계를 보이는 세계에 덧씌워야 한다. 또한 그들이 사람들을 지정하고 배분하는 ‘자리’와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에 우리의 ‘자리’를 위치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공간은, 결국 공간을 짜야 하는 문제다. “치안은 통행공간이 통행공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이 통행 공간을 한 주체의 현시/시위 공간으로 변형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정치는 공간의 모양을 바꾸는 것, 곧 거기에서 할 것이 있고 볼 것이 있으며 명명할 것이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뤄진다.” 나는 움막이 있다는 것, 보고 싶지 않은 불길하고 불쾌하고 난잡한 천막이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그리고 그 움막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할당된 자리가 아닌 바로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금곡헬기장 앞의 공간이 재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철거되지는 않지만 철거를 지연시키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움막, 헬기가 이륙 착륙하는 것을 보기 밖에 할 수 없는 이 움막이 이미 헬기를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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