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혁명가와 깡패 – 노라는 집을 나간 뒤 어떻게 되었나

- 고병권(수유너머R)

1.

어둡고 답답한 현실이 길어질 때 사람들은 수난의 세월을 견딜 해석학적 장치를 만든다. 좋게 보자면 그것도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노력일 것이다(그것이 정말로 삶에 보탬이 되는지 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이 분야에서는 기독교가 특히 영리했는데, 그들은 수난을 심판 이후에 있을 보상과 연계시켰다.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뒤의 보상을 상상케 해서 현재의 수난 때문에 곧바로 죽지는 않도록 혹은 죽더라도 절망 속에서 죽지는 않도록 일종의 진통제를 투여했다. 이 분야에서는 사회주의 혁명가들도 크게 뒤지지 않았다. 이들은 현재의 수난을 일종의 적립으로 생각했고 혁명의 때가 되면 목돈 타듯 한꺼번에 되찾을 것이라고 대중들을 위무했다.

그런데 여기에 역설이 있었다. 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어느덧 ‘견딜 만한 현실’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지속케 한다. 현실이 변하지 않음에도 대중은 자기 돈의 관리자라도 되는 듯 이 영혼의 위무자들을 좋아하고 또 의지하게 된다. 물론 이처럼 수난(passion)을 의미화하는 것이 전혀 무가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때 그것은 고통이 극심한 수술에 필요한 진통제일 수 있고,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이나 그 죽음을 목격하는 이의 심리적 상처를 덜어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사람이라면 이럴 필요가 없다. 아니, 이래서는 안 된다. 힘든 현실에도 불구하고 삶을 개척할 의지를 갖고 있다면, 수난(수동, passion)을 축적하기보다는 행동(능동, action)을 축적하는 편이 백배 낫다. ‘축적’이라고 했지만 무슨 적립하는 것은 아니고, 이것이든 저것이든 계속 시도하고 저질러 봐야 한다는 말이다.

다만 주의할 것은, 일을 저지르는 것이 일의 끝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게 행동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 예전의 선배들을 보면(혹은 나도 그런 꿈을 꾸지 않았나 싶은데), 일을 저지르는 것이 그 일의 목표인 것처럼, 그것이 행동의 완성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머지? 그들은 그것을 역사에 맡겨버렸다. 언뜻 그것은 역사의 합법칙성에 대한 신뢰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무지에 대한 포장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역사의 대단한 구경거리로서 혁명을 자기 시대에 목격하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건의 발발’이란 그 ‘사건의 의미’와 동일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사건이란 특정 시점이라기보다는 지속을 갖는 어떤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건의 발발이란 일종의 폭발일 뿐이고, 그것은 원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발발에는 ‘옳다/그르다’, ‘좋다/나쁘다’를 말할 수가 없다. 일어날 수밖에 없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건의 의미화’, 다시 말해 ‘의미있는 사건’이란 발발과는 별도의 것에 달려 있다. 그것은 어떤 질긴 노력을 필요로 한다. 혁명이 단순한 사건 사고가 아니라 어떤 중대한 변화를 의미한다면 그 변화를 끌어낼 악착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건의 발발 이전에, 그 와중에,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 그런 게 없다면 공주와 왕자들의 흔한 동화들과 다를 바가 없다. 결혼에만 도달하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가 보장되는 그 이상한 동화들 말이다. 막상 결혼 이후의 고단한 삶의 문제들과 대면했을 때 공주는 결혼이 의미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백마를 탄 왕자의 폭압 아래 사는 것이 마녀에 쫓기던 시절보다 못하고, 성 꼭대기의 독방에서 혼자 살던 때가 가정에 갇힌 지금보다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단 한 번’의 결정적 사건에 대한 기대는 답답한 마음이 꿈꾸는 대단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건이 결정적이기를 바란다면, 그 사건이 그런 의미를 갖기 바란다면, 더욱더 끈기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혁명이 필요로 하는 것은 스펙타클이 아니라 악착같음이다.

 

2.

지난 두 번의 칼럼에서 나는 1926년의 ‘3-18사건’에 대한 루쉰의 가슴 아픈 글을 소개했다. 루쉰은 그 사건에 대해 ‘피로 쓴 것을 먹물로 지울 수 없고’, ‘피의 빚은 반드시 갖은 것으로 돌려받아야 한다’고 했다. 루쉰은 비무장한 청원자들에게 총탄을 퍼부은 당국의 잔학성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사건 이전부터 청원은 물론이고 연설이나 혈서까지도 그렇게 유효한 전술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중국에서 그런 전술이 먹힐 것 같지 않다는 현실적 이유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 일반은 훨씬 더 끈질긴 노력, 그의 표현을 빌자면, ‘독사나 원귀처럼’ 칭칭감고 악착같이 매달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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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는 집을 나간 뒤 어떻게 되었는가.’ 1923년 12월 26일, 루쉰은 북경여자사범학교에서 이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은 입센의 작품 <<노라>>(<<인형의 집>>으로 옮기기도 한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작품보다는 작품의 바깥에 대한 것이다. ‘작품 바깥’이라고 한 것은 ‘작품의 배경’이라는 뜻이 아니다. 입센의 이야기는 그냥 출발점이다. 입센이 도달한 곳에서 루쉰이 그냥 더 써나가 보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행복한 생활을 하던 노라는 어느 날 자기가 남편의 인형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집을 떠나버린다. 입센의 작품은 여기서 끝나지만 루쉰은 ‘집을 나간 노라’의 이후에 대해서 물어본다. 그녀에게 어떤 미래가 있는가. 집을 나간 노라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무일푼의 그녀는 결국 집에 돌아와야 하거나 길에서 타락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각성한 노라에게는 돈이 필요하다. 집 나갈 때 챙겨갈 돈 말이다. 물론 경제권이 그녀에게 온전한 자유나 해방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뭔가 길을 개척해보려면 그게 필요하다. 고상한 혁명과 해방을 논하면서 이런 사소하고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루쉰의 매력은 그런 사소하고 구질구질한 것의 힘이랄까, 의미를 놓치지 않는 데 있다. 그의 논법은 이렇다. 노라가 과거에 그랬듯이 그냥 꿈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해라. 그런데 꿈에서 깨어버렸다면 별 수가 없다. 각성만으로는 살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빨간목도리만 두르고 집을 나설 것인가. 목도리가 몇 자나 되든 상관없이 그런 건 별 도움이 안 된다. 돈을 챙겨가야 한다.

그런데 이념으로야 옷 한 벌, 빵 한 조각보다 전체 인류를 해방하는 혁명이 비할 데 없는 가치를 갖지만, 현실에서는 전체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선언보다 네 빵 한 조각을 내게 달라는 쪽이 더 큰 갈등을 낳는다. 인류를 구원하는 아름다운 담론은 그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대방의 빵 한 조각을 가져오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구원과 해방 담론의 설득력이 클수록 빵을 쥔 손을 더 강하게 움켜쥘 것이다. 그래서 루쉰은 권하는 것은 일종의 ‘배째라’ 정신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는 혁명가보다는 깡패가 더 나을 때가 많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래 인용글은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이욱연 편역, 도서출판 예문, 2003, 64쪽에서 가져왔다.)

세상에는 깡패기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요점은 다름 아닌 끈기입니다. 듣자니 ‘권비의 난(의화단의 난)’이 있은 뒤 텐진의 칭피라 불린 깡패들이 대단히 날뛰었다고 합니다. 이를 테면 그들은 남의 짐을 운반해 주고 2원을 내라고 합니다. 이 짐은 작지 않느냐고 따져도 2원을 내라고 합니다. 길이 가깝다고 해도 2원을 내라고 합니다. 운반하지 말라고 해도 역시2원을 내라고 합니다. 물론 칭피를 본받을 일은 아니지만, 그 끈기만은 탄복할 만합니다. 경제권을 요구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그런 것은 케케묵은 일이라고 말해도 끝까지 경제권을 달라고 해야 하며, 이제 곧 경제제도를 개혁할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끝가지 경제권을 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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