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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칼럼

[마을 만들기 파트4-5]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쓴다 – <가면의 붉은 숨> 표현행동을 보고 –

- 신지영

 ‘도쿄 올림픽’이라는 국가의 정신 승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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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최소한의 생존 조건이 되는 그러한 때도 있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왜”라고 묻는 것이 차단된 그런 상태에서는 말이다. 이럴 때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 우리의 진실을 표현한다. 거짓에 가담하지 않으면서도 거짓이 보여 주는 진실과 대면하는 건 얼마나 불가능한지… 예를 들면 이러한 것들이다. 슈퍼마켓에는 어느새 외국산이 부쩍 늘었으나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 척 외국산을 산다. 방사능오염이 심한 곳에서 온 야채인지 아닌지 일단 생산지를 확인하지만, 유통 경로에 따라 생산지가 조작될 수 있다는 점은 모른 척하기로 한다. 버섯과 유제품과 고기 등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음식점은 성업 중이다. 왜냐면 어떤 음식점이든 “홋카이도산 고기” “나가사키산 굴” 등을 판다고 쓰여 있고 진위는 의심스럽지만 일단 안심한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화된 정신 승리법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먹고 마시고 씻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국가는 바로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국가는 우리들의 나약한 정신 승리법이 지쳐갈 때쯤 해서 도쿄 올림픽을 들고 나왔다. 그리곤 우리들에게 말하듯이 세계를 향해 말했다. “괜찮다니까.” 원래 정신 승리법이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었는데, 국가가 이것을 전유했다. 괜찮으면 동북지방이나 후쿠시마에서 개최해야 할 텐데 굳이 도쿄에서 한다는 점에 부쩍 의심이 났으나 몇몇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그럼 도쿄는 괜찮을지 몰라… 라는 마음이 싹텄던 것을 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는 사람들의 정신 승리법이 담고 있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진심 어린 거짓말을 너무 얕잡아 보았던 것 같다. 도쿄 올림픽에 대한 비판과 탈원전에 대한 민의가 가라앉지 않자, 이번에는 고이즈미 발언이 등장했다. 세상에! 우리의 뜻을 대변하여 탈원전을 주장한다고?! 아베 수상과의 정치 게임이 농후해 보였지만 일단 반기면서도 진의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탈원전 운동 속에서도 우파와의 마찰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지만 고이즈미의 발언이 ‘탈원전 데모에 히노마루로 칠갑을 하고 참여하는 사람들’과 같은 것으로도 보인다. 특히 나로서는 온갖 종류의 정신 승리법으로 버텨 온 우리의 약한 마음을 고이즈미의 발언이 순식간에 번개처럼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부쩍 의심이 나고 번쩍 정신이 든다. 마치 정신을 차리라는 듯이 최근 며칠 간 도쿄에서는 진도 3 정도의 지진이 잦다.

그리고 필리핀의 고통을 보면서, 일본의 재해 당시에도 주로 해안가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큰 고통을 당했었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린다. 20세기가 수용소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의심과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자연재해가 만들어 내는 수용소의 세기 같다. 프뢰모 레비는 수용소의 상황을 ‘왜’라는 질문을 허용치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하다니!”라는 놀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자체를 물음에 붙인다. “이것이 인간인가”. 자 보라, 이것이 인간이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 (프레모 레비,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년, 136쪽) 프레모 레비의 언어들은 유대민족을 대변하는 언어가 아니라 수용소라는 상황의 언어이다. 각양각색의 인종과 국적을 지닌 정치범과 범죄자와 유대인이 뒤섞여 있었던 그야말로 무한히 다양한 인종․타입․상황 속에서 나온 언어다. 따라서 그 언어는 단 하나의 수용소가 아니라 여러 가지의 다양한 수용소적 상황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언어를 담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보자. 거짓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거짓을 진실로 생각하고 싶어지는 상황 속에서 거짓을 거짓이라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그들의 거짓말’과 구별된 우리의 ‘진심 어린 거짓말’ 속에 있는 진실과 생존을 위한 강렬한 저항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뭔가 우리 나름의 말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가면 만들기 표현활동 = 그녀들의 생존활동  

 

2 토크쇼 광경

 

일단 조용하고 작고 지속적인 표현활동에서 시작하자. 가면 만들기 표현활동이 지금 여성들의 손으로 열렸다는 점이 지닌 의미가 조용하고 작지만은 않을지 모르므로. 내년 5월까지 이어질 예정인 프로젝트 <물어 가며 가는 길전(問いかけながら道をゆく展, http://toikake.tumblr.com/>의 첫 번째 행사로 이치무라 미사코씨의 표현활동이 있었다. 제목은 <가면의 붉은 숨-흔들리는 집 밖에서(仮面の赤い息ー揺らぐ家の外で)http://wan.or.jp/art/?p=6889>였다. <물어 가며 가는 길> 전시회의 기획은 이토 타리라는 여성 퍼포머가 중심이 되어 기획했다. 모든 참여는 무료이고 재정적인 부분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캄파로 이뤄졌다. 이토 타리씨는 조선과 오키나와의 위안부 할머니 및 여성들의 말 못할 고통을 표현해 온 성 소수자 퍼포머이다. 이치무라씨는 요요기 공원에서 야숙 생활을 하면서 여성 야숙인들을 모아 에노아루(그림그리는 회), 요가, 면 생리대 만들기 등의 일상적인 표현활동과 데모 및 직접 행동을 벌이고 있다.

 

3 전시 입구

 

10월 9일부터 27일까지 이어진 전시 활동 속에는 가면 만들기 워크숍, 두 번의 토크 행사, 가면 쓰고 하는 거리 행진 및 파이널 파티가 기획되었다. 가면 만들기 워크숍에는 야숙자 여성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연을 지닌 여성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가면 만들기는 어떤 규칙도 없었지만 오직 한 가지 제안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가면 재료로 “평소 주변에 두고 쓰던 것을 사용할 것”. 그런데 대체 왜 가면일까? 표현활동의 컨셉은 이랬다. “숨겨진 가면들의 붉은 숨이 저릿거릴 정도로 뜨겁다. 거리 재개발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 중이다. 규범적인 ‘가족’ 안에 개인을 가두려고 하는 사회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인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삶’이 어렵다.” 그리고 이 표현활동은 다음과 같은 것을 꿈꾼다. “거리의 영상 앞에서 익명의 가면이 섬세하게, 요란하게, 유머를 잔뜩 품고는 나타납니다. 가면들의 연기(演技)와 저항의 호흡이 정돈된 거리와는 다른 공간을 만들겠지요.”

그들이 만든 가면을 들여다본다. 가면은 아기 옷, 책, 쇼핑 봉투, 털실, 청소 도구, 티셔츠, 악세사리, 인형, 화장품, 후라이팬 등으로 만들어졌다. 섬세하면서도 요란하다. 늘 사용하던 물건이 떡 하니 귀가 되고 코가 되고 눈이 되니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그 물건들이 전달해 오는 어떤 숨결이 고통스럽다. 강렬하면서도 부드러웠고 감추는 듯하면서 모든 것을 표현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 가면들의 이 붉은 숨결, 뜨겁게 내뱉는 숨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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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토크는 필리핀의 여성 아티스트 아루마 퀸트(Alma Quinto)씨와 함께 “바느질하는 손, 연결되는 손”라는 주제로 열렸다. 아르마 퀸트 씨는 부드럽고 칼라풀한 면 소재를 사용한 입체 작품으로 유명하다. “아트는 미술관이나 갤러니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커뮤니티 속에 있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중요한 활동은 학대나 자연재해 등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여성이나 아이들의 커뮤니티와 공동 제작하는 「House of Comfort Art Project」워크샵이다. 여성과 아이들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트라우마와 대면할 수 있게 되고 내밀한 안쪽에 갇혀 있는 고통스런 기억이나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게 된다고 한다. 아르마 씨는 그녀들이 자신이 지닌 내밀한 힘을 느끼고 일어서 살아가도록 돕는 표현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참여한 두 번째 토크는 「‘가족’ 이외의 필드」라는 제목으로 <에프터 케어 상담소 유즈리하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카바시(高橋亜美) 씨와 이뤄졌다. <유즈리하>라는 말은 신년이나 번영 및 축하의 장식물로 쓰이는 식물 잎을 의미하는데 일본에서는 청각장애인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왜 있지 않은가? 크리스마스가 되면 서양의 집집마다 걸리는 길쭉하고 뽀족한 나뭇잎들. <유즈리하>는 어린아이들의 DV 및 학대, 임신, 중절, 임금 문제 등 어린아이나 젊은 여성이 겪는 문제들의 상담소이다. 또한 그녀들의 안식처이기도 하지만 18세가 되면 그곳에서 독립해야 한다. 이치무라 씨는 <유즈리하>에서 독립해야 하는 젊은 여성들끼리 공동생활을 꾸리거나 하는 적은 없는지 질문했다. 다카바시 씨는 감춰진 성적 학대를 받은 경우 그 트라우마가 훨씬 크다고 말한다. 그들은 14세나 15세쯤 되어 경우 집에서 도망쳐 나오게 되는데, 이후에도 트라우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까지 지난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단체생활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그녀 말에 따르면 그렇다고 그녀들이 복지에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복지란 신청자의 존엄을 다 빼앗음으로써 겨우 주어지는 비굴한 댓가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복지 혜택을 받으려면 가족, 수입, 학벌 등 학대 경험을 지닌 아동에게는 기억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폭력인 것을 묻는다. 그녀들은 고통을 상기하며 스스로가 사회적 기준에 얼마나 미달되는가를 고백함으로써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치무라 씨는 생활 복지를 얻기 위해 했던 수많은 싸움을 언급하며 적극적인 동감을 표시했다. 더구나 이 복지 제도는 20대~50대 정도의 여성만을 대상으로 해서 나이 든 여성들에 대해서는 지원이 없다. 그녀는 말한다. 왜 복지 제도는 가임기 여성만을 대상으로 할까?

토크의 주제들이 보여주듯이 가면 만들기 표현활동은 이러한 이야기, 표현을 통하여 생존 네트워크를 만드는 행위, 즉 생존 활동이기도 했다. 학대 경험을 지닌 여성들은 야숙 여성들과 함께 가면을 만들면서 돈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 등의 생존의 정보를 교환한다. 이런 만남을 통해 ‘복지’와는 다른 최소한의 세이프 네트워크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우리는 가면을 쓴다

 

그런데 가면들이 보여 주는 표정은 정보교환을 넘어서서 좀 더 내밀하다. 그녀들은 말한다. 이 붉은 숨은 가면 속의 맨 얼굴이 내뿜는 것이 아니라고. “숨겨진 가면들의 붉은 숨이 저릿거릴 정도로 뜨겁다”고. 그녀들은 그 뜨거운 숨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면을 벗는 것이 아니라 가면을 쓴다. 연기한다. 대체 왜?

아르마 씨는 말한다. 트라우마를 지닌 여성들이 고통을 표현하고 자신 내부의 힘을 느끼려면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적 방식이 필요하다고. 다카바시 씨는 말한다. 존엄을 받침으로써  지불받는 복지가 아니라, ‘죽고 싶다는 말’을 들어줄 공간이 필요하다고. 표현하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가면쓰기이며 일종의 연기이며, 아름답지 못한 삶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은 진실 어린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다카바시 씨는 한 아이의 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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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고 쓴다. 거짓말을 막기 위해서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되고 더 큰 거짓말, 더더 큰 거짓말, 거짓말을 멈출 수가 없다고. 그런데 자신이 유일하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추억이 있었다고 한다. 5살 때 아빠 엄마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아메리카 여행을 갔던 기억. 자신을 학대하기만 하는 엄마에게 “엄마, 5살 때 엄마 아빠랑 함께 비행기 타고 아메리카 여행을 갔었지요?” 라고 묻는 아이. 엄마는 여태까지 여행이란 걸 가본 적이 없다고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냐고 다그친다. “너 태어나기 전에 아빠는 집 나갔어.” 아이는 스스로 만들어 낸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그 추억만을 붙잡고 몇 년을 살았다는 것을 초등학교 4학년 때에야 겨우 알게 된다. 아이는 말한다. 엄마는 늘 화가 나 있었다. 때리고 맨몸으로 벌주고 화장실도 보내지 않고 매일매일 지옥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부은 얼굴로 학교에 갔는데 다른 애들은 몰라도 선생님은 알아주길 바랐다. “구해줘요.” 라고 늘 마음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늘 거짓말뿐이었다. 컨트롤할 수가 없다. 거짓말을 그만두는 것이 무서웠다(이상 한 단락은 그날 읽어 준 글을 필기와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한 것으로 원본과 다를 수 있음:필자).

이치무라 씨는 야숙 여성들 중에도 아이와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여성들은 많은 폭력에 노출되기 때문에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현실 속에서는 존재시킬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도 존재할 수 있는 공상을 만들어 낸다. 대개 그들은 끊임없이 독백을 하는데 스스로 만들어 낸 공상의 사람만이 그녀의 고통을 듣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치무라 씨는 그녀들과 면생리대를 만드는 표현활동을 했는데, 독백을 하던 그녀들로부터 엄청나게 다양한 표현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가면 만들기가 바로 그러한 과정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고 말한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외쳤던 어떤 참여자의 말처럼 진짜 거짓말쟁이는 거짓말(거짓말처럼 보이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치가들이 너무나 잘 보여 주지 않는가? 그들은 귀가 솔깃한 진짜 같은 거짓말만 한다. 반면 우리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진심 어린 거짓말이 필요하고 때로 그 거짓말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할 정도가 된다. 가면은 그녀들의 간절한 숨결을 드러내기 위한 ‘거짓말’을 대체할 수 있는 도구였다. 가면을 벗으면 드러나는 원래의 얼굴과 같은 것은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현재의 고통 이전에 재해 이전에 지금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갈 곳이 없는 그녀들은 가면을 씀으로써 표현의 수단을 얻는다. 그래서 그녀들은, 우리들은, 가면을 쓴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로 만든 가면을 쓴다

 

그런데, 우리의 진심 어린 거짓말은 과연 괜찮은 것일까? 5살 때 엄마 아빠와 비행기를 타고 아메리카 여행을 하는 아이의 꿈이 표현하고 있는 삶에 대한 눈부신 애착, 그것과 함께 좀 더 질문해야 할 것이 있지는 않을까? 아이의 꿈은 우리의 꿈은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  프레모 레비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수용소를 경험한 자들이 이후의 삶이 얼마나 찬란하건 간에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과연 트라우마 때문만일까?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학대를 당한 아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건 과연 트라우마 때문만일까?

토크에 참여한 한 여성 참여자가 이러한 질문을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학대를 당하고 고통스러워도 그나마 부모가 있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를 활동가들로부터도 들어요.” 유즈리하의 다카바시씨는 말한다. 사실 집에 있으면 모르던 것이 혼자 살아보려고 하면 엄청난 벽이 되어 나타나요. 그런데 생활보호를 받으려면 가족이 없는 자신에게 뭐가 “없는지”를 다 이야기해야 하죠. 그것은 다시금 상처가 돼요. 그러나 유즈리하는 가족을 만들려고 하거나 돈을 빌려주는 것은 하지 않는다/할 수 없다. 그런 행위를 하게 되면 부채감 때문에 오히려 다음에 또다시 문제가 생겼을 때 말하러 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유즈리하는 언제든 쉽게 이야기를 건낼 수 있게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며 네트워크를 맺게 도와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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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무라 씨는 말한다. 이번 전시가 열리는 이 동네는 부촌이어서 오는 길에 바둑 모양으로 집이 쭉 늘어서 있더라구요, 그런데 통계상으로 보자면 3개 중 1개 집에서는 DV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요. (약간의 저항감 섞인 반응이 나오자) 텐트 마을에 살면 집들이 상자곽처럼 느껴져요. 어쩔 수 없이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이치무라 씨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가족에서도 이러한 가족의 벽은 반복된다고. 예를 들어 몇몇 야숙자 여성들은 남자 야숙자와 파트너가 되기도 한다. 오직 생존을 위해서이다. 이치무라 씨가 여성 야숙자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남자 파트너가 가로막는다. 할 얘기가 있으면 그녀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라는 것이다. 반면 드물지만 이런 여성도 있다. 18세가 되어 더 이상 보호시설에 있을 수 없어 나왔는데 살 기반이 없자 결혼을 한다. 살다 보니 조금씩 자립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남자에게 이혼을 청구하고 놀랍게도 그 남자는 그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이치무라는 말한다. 절대적인 어머니상 같은 것들은 오히려 없는 편이 좋지 않겠냐구. 절대적인 결혼상이나 절대적인 가족상 같은 것들도.

가족 속에 있던 그녀들의 표현이 시작되는 것은 단지 ‘가면을 쓰는’ 행위로부터가 아니다. 주어진 가면을 버리고 그 주어진 가면이 주었던 고통을 다른 여성들과 이야기하고 그 모든 고통과 기쁨을 모으듯 자신의 주변을 것을 모아 자신의/우리들의 가면을 만들어서 쓰는 행위부터인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면을 쓰고 그녀들은 27일 거리로 몰려나왔다. 정말 불행히도 나는 이날 다른 약속 때문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대신 친구로부터 그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몇몇 남자분들이 혀를 차며 보고 몇몇 아가들은 좋아 날뛰고 몇몇 아가들은 무서워 울어재꼈다고. 그런데 스스로 만든 가면을 통해 보는 세상이 정말 새로웠노라고. 주어진 얼굴=가면이 아니라, 감춰져 있던 표현=가면이 거리를 질주했다고. 두려워하며 동시에 용감하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질문했다고. 왜 그 얼굴=가면만을 쓰고 살아야 하나?

 

정신 승리법이 승리할 때 – 왜 라는 물음을 멈추지 않는 것

 

학대받은 아이가 거짓말을 하듯,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나 폭력에 노출되기 쉬운 야숙자들이 독백을 하듯, 히잡을 착용해야만 비로소 공공장소로의 출입이 가능한 현실 속에서 이슬람 여성들은 히잡을 쓴다. 히잡을 쓰지 않는 공간은 가족 안에서의 공간을 의미하는 그녀들에게 히잡을 쓰는 행위는 이슬람의 여성 차별의 상징인 히잡이라는 가면을 “해방의 도구”로서 역설적으로 재전유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이지선,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어디에나 (속할 수)있는 -히잡 문제를 통해 본 프랑스 이방인 여성의 존재론」,『공존의 기술 –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그린비, 2007, 134쪽) 이슬람 여성들이 히잡을 재전유해 쓰듯 그녀들은 가면을 만들어 쓴다. 그리고 왜라는 물음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가면을 쓴 그녀들의 질주와 저릴 정도로 숨찬 호흡은 오히려 그녀들을 둘러싼 이 사회의 맨 얼굴을 드러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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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모리 통신>이라는 것이 있다. 소규모의 비밀스런 메일링을 통해 전달되는 요요기공원의 야숙자 통신이다. 10월의 모리모리 통신은 요요기공원에서 이틀간 열렸던 홋카이도 페스티벌에서 발생한 고미가 요요기 공원 야숙마을에서 어떻게 재활용(재창조)되었는가를 전한다. 일단 홋카이도산 고기 표시가 음식점의 필수요소가 된 방사능 도시에서 홋카이도 페스티벌은 매력적인 것이었으리라. 통신은 전한다. 행사가 끝나자 “쓰레기가 잔뜩 생겼습니다. 그래서 베테랑인 누구누구 씨가” 밤중에 “자, 가져왔어!”라며 텐트 마을에 음식들을 왔다. 대량의 훈제 계란, 대량의 와라비 떡, 대량의 쿠페빵, 그리고 대량의 날것의 조개(가리비) 였다. 1주일이 지나고도 남은 가리비 등이 있어서 먹기에 다소 위험한 상태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야숙 생활의 베레랑들은 “음… 문제없어”라고 말하면서 걱정하는 사람들을 향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가 아픈 거야”라는 정신론을 펼친다. 통신은 이렇게 끝난다. “그 공간에 함께 있던 채식주의자이자 동물 애호 활동을 하는 사람도 생명을 헛되이 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여졌던 탓일까 함께 먹게 되었습니다. ”

야숙 생활자들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왜 그게 쓰레기인데? 왜 그걸 먹으면 안 되는데? 왜 이게 채식이 아닌 건데? 왜 이건 가족이 아닌 건데? 왜 이건 삶이 아닌 건데? 안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마음이 지고 몸이 아파지는 거다. 나는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가면을 만들고 거리를 질주하는 여성들의 저린 숨 속에서, 정신 승리법이 맘도 몸도 승리로 이끄는 순간을 슬쩍 엿본 듯한 기분이 든다. 이치무라 씨는 두 번째 토크 때 이렇게 말한다. 텐트 마을에 버려진 아이 모음 상자를 만들어 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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