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산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주로 동생 때문이다. 동생은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한다.
가령 “누나는 고양이 똥 치울 때 석류 키운 거 후회되지 않아?” 같은 말을 툭 내뱉는다. 정말 궁금해서, 내가 진지하게 대답해 주길 바라고 묻는 게 아니라 고양이가 똥오줌을 싸면 냄새가 나니까 짜증이 나서 하는 말인데 나는 이 소리에 한참 고민을 한다.
‘그러게,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게 됐지?’라고 속으로 깊이 후회를 하느라 그런 것은 아니다. 고양이를 똥 싸는 기계로만 아는(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동생에게 매일 똥을 치우는 일이 그렇게 짜증 나지도 않고, 그런 이유 때문에 키운 것을 후회해 본 적 없다고 말할 때 석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설명할 방법을 찾느라 시간을 보낸다. 돌봄이란 사랑이라는 모호하고, 추상적이고, 불확실하며, 변덕스럽기까지만 감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건 석류가 좋든 싫든, 감정과 무관하게 책임을 지는 일에 가깝다. 게다가 엄밀하게 말하면 같이 사는 동생이 쓰레기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고, 제때 쓰레기를 내다 버리지 않는 것이(즉, 집안일을 분담하지 않는 것이) 고양이 똥 치우는 일보다 훨씬 더 사람을 짜증 나게 한다.
하루에 한 번 플라스틱 삽으로 똥이랑 오줌을 떠서 까만 비닐봉지에 담는 일에 대단한 사명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석류는 다음 배변 활동을 할 때가 되었는데도 화장실에 똥오줌이 그대로 있으면 치워 줄 때까지 나를 쳐다보며 앞발로 모래를 파헤쳐놓는다. 앞발로 모래를 헤치면 모래가 플라스틱 화장실 사방에 튀어서 아주 시끄럽고, 거실 바닥으로 모래가 튀어 나온다. 도저히 안 치울 수가 없다. 게다가 동생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화장실을 치우지 않고, 석류가 인간의 변기를 이용하거나 기특하게 스스로 삽을 들고 똥을 치울 리도 없으니 결국 내 몫이다. 인형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고양이가 똥을 싸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집 한구석에 고양이 배설물을 쌓아 두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나를 위해서도 치우긴 해야 한다.
나는 똥을 치운다는 것에 생기는 저항감을 빠르게 포기하고 매일매일 해야 하는 작은 일에 익숙해졌다. 샤워를 하고, 양치를 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매일 해야 하는 이런 작은 일에 고양이 똥 치우기 하나가 늘었다. 왜 더럽고, 귀찮게 고양이 똥을 치워야 하느냐는 의문을 매일 가지고 힘들어 하면 고양이와 같이 살 수 없다. 아마 동생은 해 주는 게 아무것도 없는 쓸모없는 고양이를 위해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내게는 한집에 같이 사는 존재로서 고양이나 동생이나 다를 바가 없다. 동생은 하나하나 의식하지 않는 것 같지만, 동생이 하지 않은 설거지를 가끔 내가 하고, 공동의 구역인 거실이나 화장실을 혼자 청소할 때가 있다는 것과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는 일이 별로 다르지 않다. 석류가 집에 들어오기 전이라면 고양이를 키우는 데 드는 사료값과 모래값, 보험처리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동물병원비, 자잘한 노동이 문턱이 된다. 그런데 이미 들어온 뒤에 이런 것을 늘 생각하고 산다면 괜히 억울하다는 피해의식만 생기고, 무척 슬픈 일이다.
## 사실 이것보다 큰 것은, 동생이 ‘고양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런 경제적인 가치도 생산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고양이 사료 모델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 오거나, 애교를 부리는 감정 노동을 하지 않아도, 경제적 효용성이 전혀 없어도 데리고 내 개인의 선함이나, 박애주의가 아니라 아무 이유 없고,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그냥 산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감성 뚝뚝 흐르는 동물에 대한 사랑을 말하지 않고 이런 것을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수유너머 웹진은 꼭꼭 챙겨보는데, 특히 묘한일기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동네길고양이 살찌우고 방생하는 로테이션 시스템이라니,, 멋진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