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고양이입니다만, 잠시 시간을 부탁드립니다

- 골빈왕자(길하마을)

 

수유너머와 길고양이

최근에 수유너머에 몇 번 들락거릴 일이 있었다. 지나는 길에, 혹은 홍보물을 돌리러. 나는 길하마을(길고양이와 사람이 함께 하는 마을)이라는 꽤 낯간지러운 이름의 마을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고로 내 손에는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길하마을의 홍보물이 들려 있었다. 길하마을의 리플렛을 내밀었을 때 수유너머의 몇몇은 대략 이런 반응을 보였다.

“어, 난 고양이 안 좋아해.”

똑 떨어지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저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새삼 깨닫는다. 또 다른 수유너머의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동물권? 그건 철학의 문제가 아니지.”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이긴 하다만, 나는 철학이 나로부터 시작해 우주까지 논할 수 있는 학문인 줄 알았다. 아님 말고.

 

‘길고양이’에 담겨 있는 뜻

도둑고양이 대신 길고양이라.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애완동물’ 대신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써야 개념 있어 보임을 안다. 길고양이도 이처럼 새롭게 등장한 단어다. 병신이란 말 대신 장애인이라는 말을 써야 하듯이. 하지만 길고양이란 말은 단지 고양이의 무죄와 절도 능력 없음을 강조하는 표현은 아니다. 길참새, 길비둘기, 길개(들개라는 표현은 있다), 길소, 길돼지… 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왜 고양이 세계에만 길고양이란 표현이 있을까? 길을 접두사로 쓰는 같은 길 종족으로는 노숙인(홈리스)이 유일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물보호법상 길고양이는 길에서 살아갈 권리를 인정받은 야생동물이라는 매우 특이한 존재다. 또한 매우 다행히도 ‘유해 야생동물’에 포함되지 않았다 (유해 야생동물로 예시된 5종의 불운한 존재는 까치, 참새, 비둘기, 멧돼지, 고라니이며, 이들을 구분한 근거는 매우 불충분하고 불합리하지만 여기서는 이만 줄인다). 따라서 개가 길에서 발견되면 유기 동물로 구분돼 10일간 공고 후 안락사 처분을 받지만, 고양이가 길에서 발견되면 “너는 여기서 사니까” 하고 냅둬야 한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개가 고양이를 부러워할 만하지만, 대한민국 모든 길에서 고양이가 이런 권리를 획득한 것은 아니다. 오로지 TNR이 시행되고 있는 지역에서만 그러하고, 아닌 지역에서는 개와 마찬가지로 유기 동물로 취급된다.

 

당신은 TNR을 아십니까?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자. 그게 용감한 거다. 나 역시 TNR을 고작 3~4년 전에야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시가 TNR을 실시한 것이 고작 2008년부터다. 게다가 서울시 단위로 TNR을 알리는 홍보물이나 홍보 활동이 전혀 없었다. 물론 다른 지자체도 마찬가지다.

TNR은 Trap-Neuter-Return의 약자로 ‘포획-중성화-제자리 방사’를 뜻하는 국제 용어다. 현재  길고양이 개체수 조절 방법으로 서울시를 포함한 대다수 광역시와 주요 도시가 TNR을 실시하고 있다. TNR이 실시되기 이전에는 길고양이로 인한 민원이 관계 부서에 접수되면, 포획-살처분으로 민원을 처리하였다. 현재 서울시가 1년에 길고양이 TNR로 쓰는 비용은 9억 가량이다. 이외에도 동물보호단체의 지원금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부담하는 TNR 비용이 투입되고 있다. 여튼 TNR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길고양이를 두고, 좋네 싫네, 죽이네 살리네, 싸우는 것이 인간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TNR정책이 시행된 이후에는 적어도 “길고양이가 싫고 귀찮으니 죽이자”라는 폭력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확인한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매우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조차 길고양이 TNR이라는 정책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길고양이 문제로 인간계에 갈등이 빚어질 때 수수방관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길하마을: 길고양이와 사람이 함께하는 마을’이라는 매우 낯간지러운 마을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운동의 핵심은 길고양이 구조와 식량 지원이 아니다. 길고양이 TNR에 대한 시민홍보, 동물보호의식과 동물권에 대한 인간교육이다.

 

동물권 연구에 철학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

인간이 갈 수 없는 심해 생명체에게 인간이란 어떤 의미일까? 지구라는 행성이 사라질 때까지 서로 존재를 모른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인간의 영향력은 지구 거의 모든 곳에 닿아 있다. 심해 생명체들조차 이유를 모른 채 방사능에 병들어 가고 있고, 움직일 수 있는 동물들은 인간을 보면 대부분 놀라 도망친다. 철학이 언어와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로만 가능하다면, 인간 아닌 동물은 철학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향력은 지구 곳곳, 거의 모든 생명체에게 닿아 있으며, 인간의 영향력이란 그들을 이용하거나, 착취하거나, 학대하는 행동 모두를 뜻한다. 이러한 인간의 행동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은 누가 해야 하며,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아직은 생소한 동물권이란 용어에 ‘인권도 없는 나라에서 무슨 사치스런?’ 이런 반응을 받을 때가 많다.

그러나 동물권이란 동물의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 그런 권리는 애당초 인간에게 있지 않다. 동물권이란 인간이 살아가며 영향력을 미치고, 지배하고, 학대하는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행동이 정당한지 아닌지, 어디까지가 그 한계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학문이다. 즉 동물권은 인간의 존재와 행위에 대한 고민의 하나다. 또한 인간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운 좋은 동물들에게는 동물권이라는 고상한 말은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그 언저리 어딘가에 ‘길고양이’가 있고, ‘TNR’이 있으며, ‘길하마을’이 있다. 만약 당신의 머릿속에 “길에서 고양이를 잡아 생식 주요 기관을 제거하고 풀어놓는 행위가 너무나 인위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환영한다. 당신에게 동물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는 증거니까. 또한 동물권, 동물관련법 연구와 개정 절차에 철학적 사고가 가능한 인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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