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외할머니와 엄마가 그때 나눈 말들

- 숨(수유너머R)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친정에 인사차 들렀습니다. 생선회며 수육이며 한 상 그득 차려진 밥상을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엄마가 아빠를 가리키며 한탄을 합니다. “맨날 얼굴보면서 밥묵고 하면 뭐하노. 남편이란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엄마가 몇 달 전부터 목이 칼칼하니 아프고 목 구멍에 뭔가 걸린 듯한 증세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얼굴 아래 턱도 비대칭적으로 부었다구요. 매일 보는 아빠는 그걸 몰랐다는데 엄마가 한 달 전에 외할머니댁에 갔을 때 외할머니가 당신 딸 얼굴을 보고는 이상하다고 병원에 가보라고 했답니다.

날 받아놓은 딸래미 걱정이 돼서 잔치를 치른 후에야 병원에 가 진찰을 받았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습니다. 엄마는 유방암과 자궁경부암 수술을 두 차례 받고도 한 번 더 재발해서 항암치료만 세 번 받은 전적이 있습니다. 검사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악성은 아닌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사의 소견을 전하며 엄마가 말합니다. “다시 암이라 해도 나는 항암 치료는 더 이상 못 받겠다 싶더라, 그걸 다시 하라카면…”

엄마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을 때 저는 18살이었습니다. 어린 나이가 아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분명 어린 나이입니다. 엄마가 겪었을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18살의 제가 얼마나 가늠할 수 있었을까요. 엄마의 고통을 이해하는 깊이도 얕았지만 아픈 엄마를 돌봐줄 능력도 안 됐습니다. 수술 부위에 고인 피를 빨리 배출할 수 있도록 마사지하고, 가발을 예쁘게 빗어서 씌워드리는 정도의 일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때 엄마는 참 외로웠겠지요. 누구도 아픈 걸 대신해줄 수 없고, 심지어 자식들도 엄마가 얼마나 아프고 견디기 힘든지 속 깊게 알아줄 수 없었으니까요.

수술 후 한 동안 기운을 못 차리던 엄마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결국 외할머니에게 가서 한 달 정도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가기 전 엄마는 피골이 상접했는데, 돌아온 엄마는 눈사람처럼 불어있었습니다. 외할머니가 무엇이든 만들어주셨고 엄마는 외할머니의 음식을 보는 족족 다 먹어치웠다고 합니다. 외할머니의 음식과 돌봄은 큰 효력이 있었지요. 그 모든 것은 당신의 딸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가장 가슴 깊이 이해하고 연민할 수 있는 데서 나왔다고 봅니다. 어머니라는 입장이 물론 그렇겠지만, 외할머니 또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때론 이겨내면서 살아온 여성이니까요. 엄마는 18살의 저보다 70살의 외할머니 곁에 있는 게 덜 외로웠을 거에요. 엄마는 그렇게 아플 때 외할머니에게 뭐라고 말했을까요, 그리고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뭐라고 말해줬을까요.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자주 자신을 압도하는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적 문맥이 점점 희박해지는 상태로 방치된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이반일리히)

이반 일리히의 글을 읽으며 엄마의 투병이 생각났습니다. 그 시간은 제게도 여전히 어렴풋한 공포, 아물지 않은 두려움으로 남아있습니다. 아픈 엄마와 허물어져 가는 가정을 지켜봐야하는 건 고통이었으니까요. 저에게는 엄마와 우리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할 만한 언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다들 안녕하시냐는 인사가 쏟아집니다. 이런 인사는 흘러 넘쳐야합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하고, 우리가 왜 아파야 하는지, 나 말고 더 아픈 사람은 없는지, 서로 얼마나 외로운지 이야기하고 들어줘야 합니다. 이런 말이 위로만 되진 않을 겁니다. 같이 아파하다보면 울분이 솟기도 하고 나 보다 더 아픈 사람에게 미안하기도 할 겁니다. 때론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겠지요.

우리 스스로 이 고통을 온전한 말로 의미화하고 다른 사회적 관계로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서로가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지 나누는 말이 쏟아져 흘러넘쳐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이 공포로 남지 않습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서러움이 만나 고통의 연대라는 새로운 경험으로 이어지기를.  저들이 던져주는 몇 개의 처방전에 안주하지 않고 그 다음으로 가는 새로운 발걸음으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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