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대 과학

“이기와 이타”를 넘어서(1)

- 박성관

“이기적 유전자론” 폐기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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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발발했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자기 이론의 핵심이자 동의어라 할 수 있는 ‘혈연 선택’론과 ‘이기적 유전자’론을 버렸다. 『지구의 정복자』(사이언스북스)는 그 선전포고이자 출사표다. 우리도 알다시피 ‘이기적 유전자’론과 ‘혈연선택’론은 현재 생물학계를 지배하는 담론이다. ‘혈연 선택’론의 본명은 포괄적 적합도 이론으로서, 이것의 창시자는 윌리엄 해밀턴이고 그것을 초기부터 신봉하며 사회생물학을 창시한 이는 에드워드 윌슨이다. 그리고 이 흐름을 이기적 유전자라는 키워드로 통합한 것이 바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다. 그런데 그 창시자 중에서도 핵심 인물인 윌슨이 두 가지를 버린 것이다.

 

이쪽 분야를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윌슨이 ‘혈연 선택’ 이론과 소위 ‘이기적 유전자’론을 완전히 버렸다는 것은 오해라고 충고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윌슨이 그 두 가지(실은 거의 한 가지라 할 수 있지만)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 맥락을 고려하면 이것은 작은 사실에 불과하다. 먼저, 주류 생물학자들은 윌슨이 새로 들고 나온 낡은 도구인 “집단 선택”이라는 요인을 전면 거부한다. 그리고 윌슨은 이들의 ‘혈연선택’론과 ‘이기적 유전자’론을 기본 원리라 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양자의 대립은 근본적이고 화해는 불가능하다.

 

윌슨이 자기 입장을 180° 바꾸었다? ‘혈연선택’과 ‘이기적 유전자’론을 버렸다? 혹시나 있을 오해를 막기 위해 서둘러 한 가지 바로 잡아야겠다. 윌슨이 나머지를 다 버리고 “집단 선택”론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폐기된 지 오래인 집단 선택을 다시 살려 통합적인 이론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그의 새로운 이론은 다수준(multi-level) 선택 이론이다. 새로운 이론이라고 했지만, 이 이론은 예전부터 있었고, 윌슨을 중심으로 주류 생물학계가 혹독하게 공격해 온 것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스티븐 J. 굴드 같은 학자들의 입장이기도 하다(2002년의 유작 <진화론의 구조> 8장. 국내 미번역). 그랬던 그가, 집단 선택이라는 수준(level)을 진화의 중요한 요인으로 다시 살리려고 한다. 개체 선택만을 주요한 수준으로 보는 태도, 혹은 유전자 환원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지난 40년간 진화 생물학계를 지배한 ‘이기적 유전자’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하고 대안으로서 집단 선택과 개체 선택이 상호 작용하는 다수준 선택 이론을 제안한다. 혈연 선택이 아니라, 집단 선택과 개체 선택이 얽혀 있는 다수준 선택이 인류의 유전자를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가 결합된 유전적 키메라(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합성 동물)로 만들었고, 인류는 유전자 수준에 새겨진 이기적 본능과 이타적 본능의 길항(拮抗) 속에서 살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1)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지점! 윌슨의 이 이론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생물계 전체가 아닌 인간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이론이라니…… 인간이 이토록 훌륭한 정복자(“훌륭한 정복자”라는 말이 가능한가?)가 된 이유를 밝히려는 과정에서 산출된 이론. 이 낯 뜨거운 자뻑! 최근 장대익 교수와 한 인터뷰에서 한 대목을 보자.

 

 “[지구 최고의 정복자인: 인용자] 인간의 경우 사회성 진화의 원동력은 확실히 유전자나 개체가 아닌 집단 선택이다. 인류의 진화사에서 집단 간 충돌은 끊이질 않았는데 이 과정에서 부족주의, 명예심, 의무감 등이 이기심을 억누르게끔 진화할 수 있었다.”2)

1) <매일신문>. 2013.12.14 

2) 『지구의 정복자』 에드워드 윌슨 인터뷰 <중앙일보> 2013.12.1 장대익 교수와 에드워드 윌슨의 인터뷰

 

자신이 창시한 이론을 (적어도 반쯤은) 죽이는 이런 도발에 대해 그 이론을 추종하고 또 동의하며 확산시켰던 수많은 생물학자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동네 큰 개가 짖을 때 따라 짖었던 개들은 이제 어떻게 할까? 윌슨이 2010년에 이런 내용의 논문을 <네이처>에 실었을 때, “진화 생물학자 무려 154명이 반박 논문을 같은 잡지에 실었다.”3) 도킨스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의 고차원적 사고와 글쓰기를 생각하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결코 추천할 수 없다…… 살짝 던져 놓을 게 아니다. 온 힘을 다해 집어 던져야 할 책이다. 정말 유감이다.”4) 이에 대해 큰 개가 격하게 반박하는 것은 당연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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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적 유전자’로 얻은 그[도킨스]의 평판은 포괄 적합도 이론에 근거해 있다. 오우, 그는 내 이론을 평가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과학자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나와 그 사이에 충돌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런 건 없다. 나는 과학자들을 설득 중이고, 그는 대중들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5)

3) 전중환, 「“만물은 이롭게 적응했다!” 그 ‘종교’를 반박한다」 <프레시안> 2013. 11. 29

4) 전중환, 앞의 <프레시안> 기사

5) 앞서 인용한 장대익 교수와 에드워드 윌슨의 인터뷰 중에서

 

이타성이란 대체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대략 보셨다시피 사건은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는 심히 이상한 방향으로 번역되고 있다(외국에서도 사정은 대동소이할 것 같지만 말이다). 마치 윌슨이 이타성을 이기성 못지않게 강조한 것으로, 특히 인간의 경우에는 이타적인 집단 선택이 이기적인 개체 선택을 어느 정도 억누르고 있는 것으로 번역,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뭐 아주 기괴한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이렇게 요약한다고 해도 틀릴 것은 없다. 그러나 만일 평범한 방식으로 이해할 경우 그런 요약은 심각한 오해가 되어버린다. 이는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이타성이 일반적인 이타성과 상당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 번역된 윌슨의 문제작 『지구의 정복자』 뒤표지에 실린 정치학자 조인원의 추천사를 보자.

 

 “그런 그[윌슨]가 이번엔 또 다른 지적 혁명의 단초를 제공한다. 인간의 진화가 ‘혈연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 본능의 결과’라는 자신이 정초한 학계 정설을 넘어,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집단 선택’이 인간이 지구를 정복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을 내놓았다. 비주류 정치학의 문맥에서 인접 학문의 변화를 살펴 온 내겐 반가운 소식이다. ‘이기적 권력’에 주목하는 현대 정치학은 더 큰 사유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정치와 사회의 보존은 나와 타자, 공동체의 이타적 행위의 연결망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때 더 온전한 설명이 가능하다. 자연과 문명의 역사를 통섭하며 인간 존재, 혹은 희망의 또 다른 지평을 연 『지구의 정복자』에 경의를 표한다.”

 

여기서 조인원은 개인의 이기적인 성향에 대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을 이타적인 것으로 설정한다. 현대 생물학의 설정과 동일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왜 그런가? 예를 들어보자. 서구의 수많은 국가들이 근대에 비서구를 식민지로 삼으며 온갖 제국주의의 악행을 일삼았다. 그랬던 역사를 무지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격이다. 우리 서구인들이 이렇게 문명을 전지구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서구인들이 자기 개인의 이익에만 몰두하지 않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나와 타자, 공동체의 이타적 행위” 덕분이라고.

 

내 질문은 이런 것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이타성은 내가 속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이길 수 있도록 나를 어느 정도 양보하는 걸 말하는가? 그것뿐인가? 당신들은 개인 경쟁의 규모가 더 커진 집단 경쟁에서 이타적 행위를 발견하는가? 그것이라면 그건 본질적으로 더 큰 나를 위한 이기적인 행동일 뿐이지 않은가! 그냥 이기주의가 아니다. 자기를 위해 다른 존재들을 파괴하는 범죄다. 예컨대 노태우와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군부나 하나회라는 집단을 위한 이타적 행위라고 부른다면 당신은 뭐라 하겠는가! 부시 대통령이 (나중에 밝혀진 바대로) 있지도 않은 대량 살상 무기를 근거로 이라크 민중들을 학살하고 후세인을 처형한 것을 두고 그가 석유업계나 미국 전체를 위해 이타적인 행동을 했다고 기술한다면, 생물학 이론에서는 어디서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세기의 전범 부시가 이타적 인간이 된다. 그것도 거대한 이타적 행동을 한 위인. 그리고 미국민들은 “이 과정에서 부족주의, 명예심, 의무감 등이 이기심을 억누르게끔 진화할 수 있었다.”(앞의 추천사에서 인용) 미국 내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이슬람인들, 라틴아메리카 출신 사람들이 윌슨 같은 미국 생물학자들에게 이 점을 지적하면 뭐라 답할까? 그렇게 치면 히틀러야말로 독일 국족(國族)에게는 희대의 영웅이겠네. 비록 결과는 안 좋았지만, 동기만큼은 완전 순수하고 이타적이었던 인간……

 

생물학의 이기(利己) 일원론

 

생물학자들은 이기와 이타에 대한 편협한 규정을 한 번도 성찰해본 적이 없는 것일까? (정치학자들은 과연 다를까?) 오래전 칸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기적인 행위를 단기적 이익으로 놓고, 이타적인 행위는 당장에는 손해가 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이익이 되는 행위라 놓는다면, 그건 영악한 거지, 윤리적인 게 아니라고.6) 내가 보기에 생물학은 이기(利己) 일원론이다. 이타적이라는 말을 쓸 때에도 그것은 결국 이기에 불과하다.

 

첫째로는, 이타가 방금 말한 장기적 이익을 가리키는 경우다.

둘째로는, 나 개인의 이익보다 내가 속한 어떤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다. 이것은 더 큰 나의 이익을 노리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대표적인 경우가 서구의 제국주의다. 국가주의나 국족주의7)라 부르는 그것.

셋째로는, 물질적 이익 이외에 정신적 이익을 추구하는 걸 가리키는 경우다. 개인이 손해를 보는 행위를 하는 경우, 그것을 물질적으로는 손해지만 정신적으로는 이익이라고 봄으로써 이기 일원론을 고수하는 방식.

6) 칸트의 『실천이성 비판』에서 봤는데, 어디였는지 못 찾겠다. 분하다!

7) “손문은 중국의 다민족을 하나의 ‘중화민족’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漢)민족으로의 동화와는 다릅니다. 손문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민족 대신에 국족(國族)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네이션의 역어로서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만, 지금은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자연과 인간』(도서출판b, 2013) p. 161

 

나의 질문

 

내가 생물학에, 혹은 생물학자들에게 궁금한 것은, 그런 식의 이기 일원론 이외에 이타성을 사유하는 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그들은 이기적인 행위를 보면 인간 혹은 동물 혹은 모든 생물의 근본적인 본성이라고 한다. 이타적인 행위를 보면 방금 앞에서 든 세 가지 이기성으로, 즉 이타성을 매개 삼아 결국 이기성으로 환원하는 데 성공했을 때, 비로소 설명과 이해에 도달했다고 본다. 그들이 말하는 이기나 이타가 중요한 현실인 건 사실이다. 내 질문은 생물학이라는 학문이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그 외에 다른 이타성을 사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혹은 이기성과 이타성 외에 다른 것을 예감할 수 있는 비전이 그들의 사유 공간에서 서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이런 것이다. 생물학에서 그 생물에게 유리한 형질이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어떤 번성한 생물종이 그 특유의 어떤 형질 때문에 우세해진 것인지(이 경우 유리한 형질이라 부를 것이다), 아니면 그 형질에도 불구하고 우세해진 것인지(이 경우 불리한 형질이 될 것이다)를 어떻게 판정하느냐는 것이다. 조금 분야가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흔히 서구의 학자들은, 서구가 왜 오늘날 이렇게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는지에 대해 줄기차게 탐구해 왔다(대표적인 책이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같은 뻔뻔스러운 책이다. 물론 지루해 다 읽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일 수는 없다). 그 과정에서 17세기 과학혁명이나 고대 희랍의 합리주의적 사고 등을 찾아내고는 기뻐하며 자화자찬한다. 그들이 말하는 ‘거대한 성공’이라는 게 제국주의의 만행과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탐구지만, 일단 그건 차치하자. 우리도 익숙하다시피 고대 희랍의 합리주의적 사고는 서구의 근본적인 우위를 설명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역시나 잘 알다시피 17세기 이전까지는 서구에 비해 중국이 크게 우세했다(적어도 서구 학자들이 설정한 기준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는 서구의 학자들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인 것 같다). 그들이 대안으로 17세기 과학혁명을 내세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저명한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조지프 니덤이 던진 질문도 이게 아니었던가, 그 이전까지 그토록 대단했던 중국이 왜 근대화에 실패했는가? 그렇다면 서구는 고대 희랍의 중요한 특성 때문에 2,000년도 더 지난 시점부터 성공하기 시작한 것인가? 아니면 그런 불리한 특성들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겨내어 오늘날 성공한 것인가? 만일 15세기에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고 해보자. 그러면 질문 자체가 바뀐다. 왜 서구는 여태까지 이토록 못났을까? 그 질문 과정에서 불려 나오는 고대 희랍이든, 중세든 온갖 특징들은 그들을 그렇게 못나게 만든 원인으로 지목될 터이다. 잘 동의가 안 되시는 한국인들은 일본을 떠올려보시면 쉽다. 그들이 “우리” 일본이 지금까지 이렇게 성공했던 요인들을 탐구하는 꼴을 떠올려보시라.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달을 때, 히로히토 천황이나 이토 히로부미가 개인적인 이기심만을 위해 그런 것은 아니다. 설마 천황이 땅뙈기 좀 더 갖기 위해서 그랬겠는가? 좀 더 골치 아프지만 만세일계(萬歲一系)인 이 세상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그러지 않았겠는가? 그럼 그건 이타적인 행동인가? 최소한 일본이라는 국족(國族; nation)에 대해서는 이타적인 행동인가?

 

이런 이기-이타 개념에 갇히면, 예컨대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을 자행할 때, 전쟁에 반대했던 비전론자(非戰論者)들이나 반전론자(反戰論者)들의 생각과 행위는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가? 자신이 속한 집단에 반하는 행위는, 그리고 다른 집단이나 아니면 지구 사회 전체에는 의미가 있는 그런 행위는 이기적인 것인가 이타적인 것인가? 혹은 우리 사회의 80년 5월의 광주나 87년의 민주화 운동, 2002년의 촛불 시위 등, 그것은 이기적 행동인가 이타적 행동인가? 자기에게 손해가 될 수도 있는데 과감하게 행동을 한 것이니까 이타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결국 자신들의 장기적, 전체적 이익을 위해서니까 이기적 행동으로 볼 것인가? 혹은 참가자들 집단의 이익을 위한 행동인가? 아니면 우리나라라는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이기-이타’라는 틀은 이런 현실적인 중요 문제들에 적용하기에 너무 조악한 틀 아닌가! ‘이기-이타’라는 개념쌍을 적용하기 전에 과연 그 적용이 적합한 것인지 성찰해야 하지 않겠는가! 조지 윌리엄스의 「적응과 자연선택』은 기존의 생물학계가 “적응은 어쨌든 이로우니까 자연선택 되었다는 막연한 사후 설명만 난무”8)하는 상황을 비판하는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책의 대부분이 “적응이라는 개념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논의들에 대한 반론”9)들로 채워진다. 그 비판 지점에 대해서는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마찬가지로 ‘이기-이타’라는 개념쌍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사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달리 말하자면 집단이라고 할 때 사람들이 연루되는 수많은 집단 중 어떤 것을 어느 시점에서 중요시해야 하는가? 미국이나 유럽 생물학자들은 이런 질문을 떠올려본 적이 있을까? 특히 미국 학자들은 인간을 관찰할 때 개인과 미국이라는 전체 말고 다른 집단 수준을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8) 전중환, 앞의 기사

9) 조지 윌리엄스, 『적응과 자연선택』p. 34

 

더 따지고 들어가면, 우리가 어떤 형질이라 부르는 것이 과연 자연적인 분절인지, 아니면 인간 생물학자들이 자의적으로 분절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생물학자들 말마따나 눈을 파란색으로 만드는 유전자도 없는 판에, 이기적이니 이타적이니 하는 복잡다단한 현상을 유전자 수준에서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다양한 수준의, 그것도 역동적으로 변하는 집단들(즉 다수준 집단)을 유전자라는 단일한 요인으로 분배한다는 게 얼마나 적합한 방법일까? 이는 깊은 성찰을 요하는 문제인데, 생물학자들은 아예 자명한 것으로 놓고 있지는 않은가!

 

앞으로의 계획

 

나는 사회생물학이나 이기적 유전자론에 대해 잘 모른다. 직접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 읽기 힘들었던 번역본으로 『이기적 유전자』론을 겨우 일독했을 뿐이다. 내가 가진 느낌은 주로 언론을 통해서나 다른 학자들의 단편적인 언급을 보며 형성된 것이다. 내가 앞서서 단언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진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막상 그들의 문헌을 직접 읽어보면 내 선입견과 상당히 다른 측면을 발견할 가능성도 크다. 내가 생각했던 문제점들이 오해일 수도 있고,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점들이 우글거릴 수도 있다. 마침 윌슨이 기존의 자기 견해를 크게 뒤집었다고 하니 내 질문에 답을 얻을 좋은 기회다. 내가 손에 든 책은 세 권이다. 윌리엄스의 『적응과 자연선택』(1966),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 윌슨의 『지구의 정복자』(2002). 순서는 거꾸로, 즉 최근에 출간된 것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겠다. 사실 책을 꼭 과거 것부터 읽어야 본래 순서인 것도 아니고, 내가 택한 방식이 반드시 거꾸로인 것도 아니다. 과거부터 출발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지층을 탐사해 들어가는 지질학자처럼 점차 파 들어가다 보면 의외로 참신한 대목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 과정에서 ‘이기-이타’라는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기 바란다. 그게 사회생물학에서든 이기적 유전자론에서든, 아니면 윌슨의 새로운 주장에서든 발견된다면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설정한 물음과 지향이 잘못된 것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이라면, 내 자신이 그 역시 흔쾌히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물론 앞서 들었던 몇 가지 의문들에 대해서도 답을 얻었으면 좋겠다. 이제 『지구의 정복자』 책장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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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윌슨과 리처드 도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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