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 새긴 이야기

[6호] ‘심신득청(心神得淸)’, 한가한 때에 해야 할 것

- 향산 고윤숙(香山 高允淑) (수유너머 길 / 청구금석문연구소 연구원)

‘심신득청(心神得淸)’, 한가한 때에 해야 할 것.

<심신득청(心神得淸)> 香山刻

忙處不亂性 須閒處心神養得淸
바쁜 때에 본성(本性)을 어지럽히지 않으려면 모름지기 한가한 때에 정신을 맑게 길러야 한다.
-<채근담(菜根譚)> 후집(後集) 26.

한가로운 것은 겨를이 생겨 여유가 있는 것이다. ‘겨를’은 어떤 일을 하다가 생각 따위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겨를’은 어찌하다 우연히 주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사용 의미와는 달리 한가함은 남는 시간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그러한 수동적 의미에서조차도 우리에게는 그러한 시간은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을 위하여 확보해야만 하는 시간이다. 보통 우리는 일상의 습관대로, 때로는 맹목적으로 근육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움직인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냉장고 문을 여닫고, 글을 쓰고, 계산을 하고, 책을 읽는다.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 채로 지내는 사람에게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겨를을 내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 질적으로 큰 차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적으로 시간이 아무리 많이 남아돈다 하더라도 자신을 돌아볼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쁜 때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위급한 때에도 마찬가지로 감정적으로, 심리적으로 삶 전체의 동요를 느낀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약의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서 갖가지 보험을 들고 있다. 일어날지도 모를 각종 사고와 재해를 대비해서 결국은 보험회사를 살찌우는 공동의 비상금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이러한 지배적인 대비 방식에 대하여,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정신을 맑게 가다듬는데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지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정신을 맑게 가다듬어야 자신을 냉정하게 성찰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매일 매일이 안락한 일상일 수도 있는데, 이와 달리 우리에게 위급하거나 바쁜 때란 어떤 것일까?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목표하고 있는 삶을 위하여 철학적인 사고와 그에 따른 수많은 자신을 향한 질문과 약속들을 제대로 이행하면서 살고 있지 못할 때가 아닐까? 단지 편안함을 구하기 위하여 노예적인 삶을 답습하게 된다든지, 보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 견뎌야 할 고통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고,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가 예속적인 삶의 길로 되돌아갈 때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다보면 자신이 벗어나고자 선언했던 그 길로 되돌아가고 있는지 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의 본성을 흩뜨리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우리들의 철학적 신념을 뒤흔들 수 있는 주변의 불신과 냉소, 오해와 핍박 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나약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부와 명예를 빼앗길 때이다. 그럴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그러한 오해와 핍박자의 위치로 타락하기 쉽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 직면했더라도 질식사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한가해야 하는가? 그것은 마치 교통 신호를 위반하고 자신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차량을 피하는 뛰어난 운동감각을 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능력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항시 주변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지 못하는 중력들을 떨쳐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홀로 설 수 있는 능력과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일상적으로 키워야 한다. 돈을 받고 하는 일 한 두 가지를 접더라도 한가로운 때를 확보하여, 자신이 얼마나 홀로 설 수 있는 존재인지를 시험하고 단련시켜야 하는 것이다. 찬물에 담근 수박을 잘라 먹으며 부채질을 하는 것이 한가로운 여유가 아니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인 자신과의 싸움, 사막과도 같은 황량한 벌판으로 자신을 내몰며, 자신의 가능성과 무력함, 무지와 비굴함을 색출해 내고, 지속적인 성찰과 공부를 통해서 발견되는 지점들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타인이나 조국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 평소에 존경하고 사랑했던 인간이 놓인 곤경이나 고통에 대한 연민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 또한 학문에도 매이지 않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미덕에 매여 자신의 전체를 희생하며 낭비하듯 소모해 버리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전투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겨를을 ‘일상적으로’ 확보하여 스스로를 보존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 각자의 독립성에 대한 가장 혹독한 시험이다. 노예근성에서 벗어나는 단련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의 새로운 ‘본성(本性)’이며 한가한 때에 보존해야 할 것들이다.

篆刻 돋보기

일반적으로 인(印)이 사용되는 경우는, 그것이 본인의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전각의 역사에 있어서, 관인(官印)에는 각각의 시대에 있어서의 제도가 있어 관직의 상하나 지위와 봉록(俸祿)의 차이에 따라서 인의 모양이나 크기에도 차이가 있었다.

사인(私印)은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각각 일정한 기준이 있다. 만일 이러한 기준이 없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서 틀림없이 본인의 것이라는 증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기준이 발달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성명인(姓名印)을 먼저 살펴보자.

옛날 사람들이 사용한 인은 대부분의 것이 성(姓)과 명(名)만을 각하거나 ‘인(印)’을 붙여서 ‘〇〇印’이라고 했다. 또는 ‘지인(之印)’을 붙여서 ‘〇〇之印’이라고 하였으나 그 이외의 문자를 넣지는 않았다. 이것은 성명인에 점잖고 엄숙한 분위기를 표현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인(印)자 이외에도 ‘〇〇장인(章印)’ 또는 ‘〇〇신인(信印)’이라고도 새겼다. 이와 반대로 신자를 인 아래에 쓰기도 했다.

<고장형인(高長兄印)> / <창유인장(昌孺印章)>

<부고인신(剖高印信)> / <효자유인(孝子唯印)>

또한 ‘유(唯)’자를 넣어서 ‘〇〇유(唯)’라고 한 경우에는 ‘리(里)’ 와 ‘읍(邑)’의 이름만을 각한 것이 많다. 이 경우는 모두 마을이나 읍의 이름이므로, 그 마을의 장이 공문서에 사용한 것이다. 리와 읍의 장은 그 관직의 지위가 대단히 낮기 떄문에 사용하는 인에 ‘유(唯)’자를 붙여서 관직의 지위가 낮다는 것을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는 14~20세기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인 중에서 그 예를 몇 가지 싣는다.

<전성이징하계상장(全城李徵夏季祥章)> / <덕수이정화신지인(悳水李鼎華新之印)> / <정선사인(正善私印)>

– 향산 고윤숙(香山 高允淑) (수유너머 길 / 청구금석문연구소 연구원)

응답 4개

  1. 박카스D말하길

    ‘겨를’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
    글 재밌게 잘 봤습니다^^

    • 향산말하길

      자신만의 ‘겨를’을 만드는 것이 요즘은 정말
      일상의 투쟁처럼 느껴집니다.
      일 분 일 초가 다 제 몫이 있다고 아우성입니다.
      때론 힘들 때도 있지만, 항시 저 자신에 대하여
      긴박함을 느끼고 집중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2. 쿠카라차말하길

    ‘겨를’, ‘여유’, ‘한가함’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수련의 능력과 성찰의 눈을 통해 능동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 정말, 저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군요.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시간을 생성하는 법을 알아야 할텐데…정신이 버쩍 드는 글 감사합니다.

    • 향산말하길

      쿠라카라님의 글을 읽으며 저도 다시 정신이 맑게 돌아오는 느낌입니다.
      한시도 자신을 방치하지 않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글을 써놓고도 가슴이 두근 두근 뜁니다.
      이 모든 것을 어찌 지키고 살려고 저리도 큰 말들을 겁없이 했을까…하고요.
      그래서 때로는 그로 인하여 한없이 홀로 부끄러워하곤 한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