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겨울의 노출, 정치의 공백

- 가게모토 츠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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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온 지 오래되었다 보니까 어느 정도 한국 생활에도 적응하게 되었는데, 적응한 것이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주변에 있는 외국인 중에서도 상당히 한국어를 잘하고 그리고 한국의 문화에 적응하고 살아 있는 이들도 많으며 그러한 사람을 본 한국인들이 “아휴, 한국인이 다 되셨네 그려”라든가 하는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과연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것을 물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다 한국 사회에 포섭 당했다는 의미가 되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볼 때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지하철인가 어딘가에서 군복을 입은 젊은 남성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충격이 지금 와서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기분이다. 지금 나로서는 군복을 입는 젊은 남성이 옆에 있어도 별로 관심이 가지도 않지만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군사적인 긴장감을 낱낱이 느꼈다는 것이 기억에 있다. 한국에서 살면 무감각이 되지만 군복을 입는 자가 길거리를 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면 아주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 살다 보니까 그러한 공포의 감각이 후퇴해 버렸으며, 지하철에서 옆에 군인이 있어도 아무 감각이 없어지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생활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다고 느끼게 되어 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군복을 입고 길거리를 다닌다는 것은 너무나 정치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것을 쉽게 간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문제이다. 그러나 군복을 입는 사람에 익숙해져 버린 나로서도 여전히 신기하기 짝이 없는 것은 겨울에 대학생들이 자기 학교 이름을 붙인 외투를 입는다는 문화이다. 심지어는 자기 학과와 학번까지 붙였을 경우도 있다. 게다가 그들은 별로 노출하기를 좋아하는 변태같이 생기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생태에 대해서는 여전히 납득 가지 않는다.

그런데 학력주의가 심한 한국이라서 서울대에 다니는 학력 스펙에 세뇌 당한 학생이 바보스럽게 자기 자랑 삼아 ‘sun’라고 붙인 것을 입었다면, 그냥 불쌍한 학생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는 학생들도 그것을 입고 있다는 현상에서 보아 학력주의의 자랑거리로서 학교 외투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마치 현대 한국의 겨울 풍속과 같은 학교 이름 외투를 입는 대학생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왜 그들을 자기 육체를 숨기면서 동시에 자기 속성을 노출하려고 하는가. 알아봤더니 학교가 주는 것도 아니며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라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다. 과연 이러한 문화를 스스로 실천 재생산하는 학생들의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이 글은 압도적으로 한국에 대학생 문화에 대한 지식이 없는 외부자로서 한국에서 지내 온 사람이 써보는 대학생 문화에 관한 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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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론’이라는 글들이 있다. 한국 문화, 일본 문화 등등의 글들이다. 그러한 글들은 재미가 없다. 왜냐하면 정치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는 그러한 정치를 제거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맥에서 대학생들의 ‘노출’에 대해서 접근해보고 싶다.

겨울이 되면, 마치 여름의 매미처럼 대량 발생하는 대학생들의 학교 이름 외투에 대해서 어떻게 논의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그 외투는 ‘노출’의 기능을 가진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패션은 어떤 인간의 속성을 보여 준다. 구멍이 난 옷을 입는 사람과, 어떤 유명 브랜드를 입는 사람, 압구정스러운 사람, 동묘앞스러운 사람 등등, 모든 패션은 사람들의 속성을 보여 준다. 그러하기 때문에 굳이 학교 이름 외투만을 정치적으로 논의할 것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략히 말한다면 한국에서의 학력주의와 거의 모든 젊은이가 대학에 다닌다는 획일성에서부터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쯤이 되는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서열화한 대학 사회가 그 전제가 될 것이다. 자기 위치를 노출하기 위한 수당으로서의 학교 이름 외투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이 글의 결론이다. 향할 목표도 아니라 어떤 움직임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라 자기가 있는 움직이지 않는 자리를 보여 주기 위해서.

노출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변태들의 행위로 취급되기도 하는데, 한국 대학생들의 절반 정도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굳이 노출과 변태를 연결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대학생들의 절반 정도가 변태이며, 사회 구성원의 일정 부분이 변태라면 굳이 소수자 배제하기의 명목이 될 ‘변태’란 말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다니는 학과나 학번까지 쓰인 개인정보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려고 애쓰는 모습은 보면서 나는 아주 신기함을 느낀다. 왜 스스로의 속성을 남에게 보여 줘야 하는가, 혹시 그 학교 이름 외투는 사회에 내미는 ‘이력서’같은 기능을 가지는 것일까. 물론 그러한 성격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의 노출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노출의 연장으로서의 학교 이름 붙이기, 라는 것이다. 이는 강요당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주체적인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강요된 개인정보의 공개가 아니라 스스로 주체적으로 정보를 보여 주는 것이 노출이다. 이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남의 시선이며, 남에게 보여 준다는 주체성이다. 노출은 혼자서는 완결하지 않는다. 게다가 거의 대부분의 경우, 학교 이름과 학번은 자기 눈에서는 안 보이는 곳에 붙이고 있다. 그리고 자기 얼굴과도 같이 보지 못하게 된 자리에 학교 이름이 붙어 있다. 이러한 면에서도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노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얼굴과는 다른 의미에서 남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개인정보의 노출은 좋은 일이라고 취급되지 않는다. 그래도 노출된 개인정보는 스스로 개인이 보여 준 것이다. 게다가 개인정보라고 할 때 진정하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어떤 사회적 속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즉 우리는 그들의 등을 보면 거기에 쓰인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알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질서 내부에서의 배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개인의 표현인 패션이 이미 존재하는 질서 내부에서 재배치된 것이 학교 이름 외투라고 할 수 있다. 야구 선수나 축구 선수가 등에 번호를 붙이는 것은 주체를 분별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등이라는 표현 공간에서는 남에게 보이기가 중요하다. 따라서 학교 이름 외투 역시 남에게 분별하기 쉽게 되어야 되며, 기존의 질서에서의 주체의 위치를 잘 보여 준다. 달리 생각하면 기존의 질서를 흔들거나 남을 곤혹시키지 않는 것이 학교 이름 외투라는 것이다.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표현이 아니라, 의미가 아주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 학교 이름이다.

등이라는 정치적인 표현을 아주 할 수 있는 공간을 스스로 버림으로써 주체화하는 것의 재생산 시스템이 그 외투라는 말이다. 좀 더 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으면 좋은데, 일단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래와 같다. 1) 남에게 보이기 쉬운 아주 정치적인 표현 공간인 등을 이미 있는 질서 내부의 표현으로 회수하며 2) 자기에 개인정보를 보여 주는 것을 주체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군복을 입고 다니는 것 자체의 폭력성을 느끼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된 필자이지만, 그 정도로까지 한국 사회에 익숙해지면서 동시에 감각이 둔하게 된 필자로서 여전히 의문스럽게 느끼는 것에 대해서 써봤다는 것이다. 정치의 노출, 혹은 정치의 표현은 학교 이름 표상으로 얌전하게 순치되었다. 그러면 겨울에 노출시켜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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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기 어려운 법률을 가진다. ‘일인시위’라는 것은 사실 시위 행동을 하도 하기 어렵게 규정한 법에서 빠져나온 한국에서의 특징적인 행동이다. 나도 처음 ‘일인사위’라는 것에 접했을 때 왜 혼자 의사표시를 해야 하는가 의문이었다. 중요한 문제를 알리기 위해서는 집단적으로 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법이 그러한 집단행동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거기에서 나온 것이 일인시위라는 방법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여러 가지 법의 구멍을 뚫기 위한 사람들의 시도를 많이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니까 ‘등’이라는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 일인사위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어떤 의사표시가 될 수 있는 공간이며, 그러한 의사표시를 담기 위해 공백으로 놓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학생들에게는 공백이 필요하다. 괜히 메우면 안 되며,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결정되지 않는 공백이 필요하다. 등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미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공백. 혹은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공백으로 빈 곳이 필요하다. 공백이 너무 없다. 학생의 등에 쓰인 글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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