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에이지의 사상

우리는 젊음쳐 뒤이을 것이다

- 오영진

1963년 미국 버밍햄 시에서 인종 간 분리 정책은 전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것이었다. 흑인들은 백화점 가판대에서 파는 바나나 스플릿을 먹을 수 없었다. 그들은 백인 전용의 상점에 가는 순간 체포되기 때문이었다. 흑인들은 극장 안에서 항상 위층 발코니에 앉아야만 했다. 백인 의사들은 흑인 환자들의 이름을 알려 하지 않았고, 아무렇게나 ‘보’, ‘베시’라고 부르곤 했다. 길을 가다 백인경찰에게 검문을 당하는 날이면 총에 맞지는 않을까 숨죽여야 했다. 버밍햄 시에서 흑인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남부 백인들은 북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압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고, 인종 간 통합을 꾀했다고 느꼈다. 이런 반발심이 생기니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수정헌법 14조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되려 남부 지역에서는 인종차별이 더 심해지는 결과를 나았다. 남부의 백인들은 인종분리조례를 통해 법적으로 인종 차별을 합법화시켰다. 인종분리조례는 아주 구체적으로 흑백 분리를 지시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23장 도박 597절은 검둥이와 백인이 함께 즐겨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들은 백인과 유색인 구역의 칸막이 높이까지 디테일하게 지정해 놓았다. 210cm였다. 백인들 눈에 유색인이 전혀 띄지 않을 수 있는 높이였던 것이다.

이 도시에서 순종적이지 않은 흑인 아이는 커서 언젠가 경찰에게 죽임을 당한다. 반항기 다분한 성격이었던 워시는 그 성격 때문에 어머니를 걱정케 했다. 버밍햄 시에는 “다이너마이트 언덕”이라는 곳이 있었다. 40년부터 20년 동안 그 누구도 기소되지 않고 끝없이 폭탄 테러가 자행, 아니 용인되는 흑인 밀집 지역이었다. 앨라배마 주 KKK 소속 1만 1천 명이 모조리 버밍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밍햄 시의 셔틀워스 목사는 54년부터 거의 7년간이나 인종분리정책에 저항해 왔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들은 마틴 루서 킹 목사와 앤드루 영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시위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시위대는 경찰견에 물어뜯겨 해산되고 만다. 셔틀워스는 “지나치게 과격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중산층 계층의 흑인 목사들은 셔틀워스의 행동에 동참하길 꺼렸다. 그들은 백인들로부터 “괜찮은 흑인”이라는 훈장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비교적 온건한 백인들도 셔틀워스에게 투쟁의 속도를 늦추라는 당부를 했다. 셔틀워스는 그들이 진정으로 진보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킬 것이 많은 자는 혁명에 가담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반면 버밍햄의 아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16가 침례교회 지하에서 경찰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대응하는 법을 배우고 물대포를 안전하게 맞는 법을 학습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이 아이들이 언젠가 체포되는 것이 필연적이라면 지금부터 준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흑인은 반드시 죽는다. 그렇게 죽어버리면 남는 것은 폭도의 낙인과 흑인에 대한 경멸뿐이다. 그들이 극악의 상태에서도 비폭력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은 생존술에 가까웠다. 마틴 루서 킹은 이들을 “노래하되 폭력은 사용하지 않는 군대”라고 묘사했다.

킹은 버밍햄의 교도소를 시위자들로 가득 채워버리면 인종 분리 법률을 집행이 마비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른바 ‘프로젝트 C’ 상당히 기발한 아이디어였기 때문에 초반에는 약 1000여 명의 시위자들이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갔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백인 전용 상점이나 버스 좌석에 앉는 행동을 실천에 옮겼다. 예상대로라면 버밍햄 시는 마비되어야 했다. 하지만 시의 치안담당국의 대응이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이들을 인근 지역의 여러 감옥에 인도함으로써 문제없이 시위자들을 수감할 수 있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느껴지자 사람들이 좌절해 갔다. 이후 프로젝트 C에 참가한 사람들은 4명, 10명, 29명 정도에 불과했다.

흑인 사회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상류층과 하류층 흑인, 온건파 목사와 강경파 목사 사이의 골이 깊어져만 갔다. 언론에서도 이들이 너무 급진적이며 참을성이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셔틀워스는 “우리는 340년 동안이나 기다려 왔습니다. 우리는 행동을 원해요. 지금 당장 행동에 옮기길 원합니다!”라고 외쳤으나 동조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에게 비폭력 시위를 교육하던 베벨은 그 순간 만약 3000여 명의 아이들이 감옥에 간다면 버밍햄 시는 충분히 마비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정은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몫이었다. 아이들을 정치에 이용한다는 비난이 내부에서 거셌다. 셔틀워스와 베벨은 아이들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스스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어른들이 갑론을박하는 사이 비폭력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흑인 고등학교에 리플릿을 뿌리며 이미 새로운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4월 30일 화요일이었다. 아이들은 이 시위가 자신들의 몫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암호는 “로큰롤 축제”였다. 교내 방송을 통해 로큰롤 축제에 가자는 메시지가 전달되는 순간 아이들은 학교에서 빠져나와 거리로 모여들었다. 첫날 800여 명이 모여들었다. 경찰들도 이에 준비한 듯 상응하는 인원을 시위대의 행진 루트에 배치해 두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보는 족족 호송차에 태워 감옥으로 보냈다. 하지만 나중에는 호송차가 부족하여 스쿨버스에 태워 감옥에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침에 부모에게 한 인사를 떠올렸다. “오늘 저는 감옥에 가요” 둘째 날, 셋째 날도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뒤이어 감옥에 걸어 들어갔다. 경찰들은 전원이 서 있어야 할 정도로 비좁은 밀도로 아이들을 고문했지만 그들은 교대로 잠을 청하며 의연하게 감옥에 갇혔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천 명이 훌쩍 넘는 숫자의 아이들이 감옥에 가게 되었다.

여섯째 되는 날, 이 시위대에 처음으로 어른과 아이들이 뒤섞이게 되었다. 누구도 참여하지 않으려 했던 시위였지만 이제는 버밍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시위 행진으로 기록될 만큼 많은 인원이 시위에 참여하고자 했다. 소방대가 물대포로 이들을 위협했다. 하지만 물대포 발사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물대포는 쏘아지지 않았다. 소방관들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직접 하시죠. 나는 물대포를 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임무는 불을 끄는 것이지, 사람을 끄는 게 아닙니다.” 시위대의 행진을 막았던 소방관과 경찰관이 갈라져 길을 터 주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따랐다.

프로젝트 C는 아이들에 의해 완성되었고, 이후 버밍햄에서 불길같이 시위가 번질 수 있게 해 주었다. 뒤늦게 화가 난 어른들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고, 반대로 테러를 당했다. 하지만 점점 더 시위대는 불어났다. 결국 6월 11일 케네디 대통령은 투표권 보장, 평등한 기회 보장, 공공시설과 학교에서의 인종 분리 폐지를 골자로 하는 인권 법안을 의회에 제출한다.

다 죽어 가던 자유의 불길을 아이들의 몸으로 살려냈다. 이 불길이 없었다면 버밍햄에서의 싸움은 해보지 못하고 졌을 것이다. 어른들은 잃을 것이 많지만 아이들은 얻을 것이 많다.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향해 행진한다. 하여 신동엽은 시 「아사녀」(1960)에서 다음과 같이 썼던 것일까?

 

길어도 길어도 다함없는 샘물처럼

정의와 울분의 행렬은

억겁을 두고 젊음쳐 뒤를 이을지어니

 

온갖 영광은 햇빛과 함께,

소리치다 쓰러져간 어린 전사의

아름다운 손등 위에 퍼부어지어라.

 

시인은 여기서 ‘젊음친다’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행진의 동력은 젊음이며 젊음의 연이음이야말로 숙명임을 논하고 있다. 모든 혁명은 틴에이지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젊음쳐 뒤이을 것이다.

Birmingham_campaign_dogs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Birmingham_campaig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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