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대 과학

이기와 이타를 넘어서 (2)

- 박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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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의 『지구의 정복자』를 꼬박 이틀에 걸쳐 읽었다. 대체로 짜증 나고 지루했다(그중 재미있었던 것은 역시나 그의 전공 분야인 사회성 곤충들의 생활사를 다룬 15, 16장이었다). 살다 보면 이런 책도 읽게 되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그의 책을 소재 삼아 뜨거운 문제들을 함께 생각해보자.

 

1. 혈연 선택론의 황당무계함

 

우선 이 책의 표적이기도 한 혈연 선택론 비판을 보자. 앞서 말했듯이 이건 다른 말로 해서 이기적 유전자론 혹은 포괄적 적합도론 비판과 같은 말이다.

이 이론이 등장하기 전 주류 생물학의 연구 대상은 오직 개체뿐이었다. 물론 여러 수준의 집단들도 광범위하게 대상이긴 했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핵심은 개체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으로 환원하는 데 도달하면 이해와 설명에 도달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홀데인, 해밀턴 등을 거치면서 이런 개체 적합도가 포괄적 적합도로 변경된다. “개체의 ‘포괄 적합도’는 개체의 적합도, 다시 말해 성장해서 각자 대를 이어 가는 자식의 수에, 자신의 행동이 형제자매, 고모, 삼촌, 사촌 등 방계 친족들의 적합도에 미치는 영향을 더한 것이다. 그 이론은 개체 자신의 포괄 적합도와 그 집단의 적합도가 어느 한 쪽이 줄어든다고 할지라도 총괄적으로 증가한다면 이타성의 유전자도 종 전체에서 증가할 것이라고 말한다.”(p. 207; 마지막 문장이 완벽히는 이해되지를 않는데, 혹시 번역에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이 이론을 이런저런 책에서 요약으로 접했을 때 좀 허구적이고 너무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이 이론을 바탕으로 동성애에 대한 통념적인 적대에 대해 생물학적으로 비판한다는 데 이르러서는 황당하기까지 했다(마치 진보적인 이론인 척하려는 사회 생물학자들 특유의 제스쳐. 『지구의 정복자』 말미에도 이런 대목이 넘쳐난다). 이 이론이 가장 많이 드는 예는 홀데인의 1964년 논문에 나오는 익사 상황이다. 당신이 “익사할 확률이 10분의 1인 불어난 강물”(p. 208)의 강둑에 있고 그 강물 속에서 아이가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 아이가 당신의 자식이거나 당신의 친척이면 어떻게 될까? 상식적으로 나와 혈연이 가까울수록 열렬히 구하려고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상황. 혈연 선택론은 이 상황을 수학의 확률론을 가지고 진술하고, 그걸 통해서 외관상 이타적으로 보이는 현상도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이기적인 행동임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이 상황을 극도로 단순화해서 말해보자. 내가 그 아이를 구하려 했을 때 열 번에 한 번은 죽을 것이다. 나머지 아홉 번은 아이를 구할 것이고. 나는 아홉 번 강물에 뛰어들어 아이를 구한다. 그럼으로써 내 유전자의 반을 갖고 있는 아이가 그 유전자를 더욱 번성시킬 것이다(즉, “대를 이어 가는 자식의 수”가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10회째에 실패해서 내가 익사해버린다면, 그 순간 내 유전자는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나는 10회 중 1회 익사한다는 것을 그와는 크게 다른 경우, 즉 10회 시도 중 마지막에 익사한다는 것으로 바꿨다. 내가 극도로 단순화했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뭐 뻔한 거지만 혹시나 있을 비상식적인 비판을 우려해서 뱀발(蛇足)을 달아보았다). 한마디로, 내가 강물에 뛰어들지 않고 내 유전자만 소중히 보존하는 경우보다, 뛰어들 경우 유전자의 보존 정도가 더 커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혈연이 가까울수록 더 자주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이론이 “처음부터 과학자와 일반 대중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으며, 단순해 보였고, 사회생활에서 이타성이 중요한 이유를 확인해 주는 듯했기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p. 207). 당신이 보기엔 어떤가? 어떤 매력을 느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어이없어 할 터인데, 그렇지만 딱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까야 할지 잘 모르겠는 그런 심사에 불편해질 것이다. 게다가 이타성을 수학적으로 해명했다고 하니… 또 게다가 수많은 과학자들이 칭송하고 또 그에 기반해서 수많은 논문들과 책들을 쏟아냈다고 하니…….

 

2. 나의 의문

 

내게 처음 떠올랐던 건 애완동물의 경우였다. 우리가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것도 그렇게 설명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요즘 도시에서 어떤 유용성 때문에(예컨대 집을 지켜 준다든가) 개를 기르는 경우는 극소수일 터이다. 그에 비해 애완동물을 기르는 비용은 무척 많이 든다. 매일 먹이고 재우는 것은 물론이요, 요즘은 개나 고양이의 의료 비용도 몇 백만 원씩 들고, 미용 비용 등도 만만치 않다. 그럼 우리는 왜 그들을 길러 주고 먹여 주고 운동도 시켜 주고 놀아 주는가? 우리는 왜 이토록 이타적인 것일까? 심지어 같은 인간도 아닌 금수들에게 말이다. 혈연선택 이론이 과학 이론이라면, 어떤 기이한 사례에만 꿰어 맞추는 게 아니라 이런 일반적인 현상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개, 고양이와 인간의 유전적 근친도도 상당히 높으니까 그걸 가지고 애완 상황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터이다. 그런데 내가 별 관심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연구를 들어본 적은 없다. 있다면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외국어로 된 거 말고 가능하면 좀 간단한 걸로……

 

생각해보면 더 황당한 문제가 있다. 내 유전자가 보존된다는 대목이다. 내 유전자라고? 내 유전자 전체 중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 유전자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남의 유전자란 말인가? 내 유전자란 말이 가능한가? 내 유전체 전부라면, 그거야 같은 종인 다른 인간들도 99%는 공유하고 있지 않나?1) 침팬지 등 소위 영장류2)는 우리와 유전적 근친도가 무지하게 높을 것이다. 그럼 침팬지가 강물에 빠졌을 때도 우리는 익사 확률 10%인 강물에 웃통을 벗어 부치고 뛰어들어야 마땅하다. 현실이 그런가?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유전자들 각각이 내 안에 있는 다른 유전자들을 모두 혈족 유전자라고 판단하나? 생물학 이론에 따르면 각 유전자는 자신의 복제, 확산에 의해서만 행동하지, 자기가 속해 있는 생물체의 다른 유전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다. 생물학 이론에 따르지 않더라도 유전자의 관심사가 그런 식일 리 있겠는가!

 

더 나아가 식물을 기르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신선한 공기 등을 들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관상용이 역시 제일 큰 이유가 아닌가? 식물들을 우리랑 유연관계가 멀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당신이나 과학자들이 어떻게 느끼든 간에 적어도 생물학적으로는 거의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슷하다.3)

1) 전쟁에서든 아니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걸 유전자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까?

2) 영장류라는 것, 이게 과연 생물학 개념인가? 인간과 많이 닮을 놈들을 이렇게 부를 터인데……

3) 이에 대해 길게 말할 상황은 아니니 박성관,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그린비) p. 820-824를 참조하시라. 요점은 우리가 동물과 식물을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 벌써 한참 전, 그러니까 생물을 동물, 식물, 균류, 원생생물, 원핵생물 등으로 나누던 시절의 감각이다. 그러나 벌써 몇 십 년 전부터 그건 폐기된 거나 마찬가지고 그 대신 앞의 책 p. 823에 실린 그림이 기본적으로 대체해버렸다. DNA에 기반한 이 분류 체계에서 동물과 식물은 다른 몇 십 가지 분류군보다 제일 가까운 관계다.

 

수석(壽石)이나 여러 가지 집 안을 장식하는 그림, 인형, 기념품들도 예로 들고 싶지만 그만두자. 그러다가 우리까지 이 사람들 닮아 갈라…!

 

헌데 여러분 중에는 내 반론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느낄 분도 계실 것이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한 가지다. 나는 진화론자고, 진화론은 이 세상 모든 생물을 공통 조상의 후손이라고 본다. 실은 생물들만이 아니라 모든 물질들이 공통 조상의 후손이다. 물질을 조상이라고 부른다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진화론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수염이 있건 없건, 우리가 그로부터 태어났으면 그는 우리의 조상이다. 이 얘기가 영 싫다면 수석이나 그림, 인형 같은 건 빼고 식물들, 박테리아들까지만 생각해 주시면 좋겠다. 나나 당신에게나.

 

아마도 이 비판은 기존에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너무 뻔한 거니까. 누구 혹시 알고 계시면 내게도 알려주시기 바란다.

 

3. 윌슨의 혈연 선택론 비판

 

윌슨이 혈연 선택론을 비판하는 내용은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기 곤란하다. 관심 있는 분들은 특히 18장 「사회성 진화의 힘」을 참조하시라. 간단히만 보자. 혈연 선택론의 내용을 학문적으로 요약하자면, “반수배수성과 진사회성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반수배수성은 복잡하니까 넘어가고 진사회성만 잠시 말해 두자. 진사회성(eusociality)이란 진정한 사회성이란 말이다. ^^; 이런 것도 생물학 개념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사회를 이루는 건 고등한 우리 인간뿐이고, 동물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배웠다. 그렇지만 누가 봐도 사회를 이루고 있는 생물들, 예컨대 개미 같은 게 있지 않은가! 그런 걸 선생님들과 과학책들은 본능에 의한 무리이며 군집 따위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다. 그런 유치하고 근거 없는 반론으로는 힘들었던지, 언젠가부터 동물 중에도 사회를 이루는 것들이 있다고 인정하게 되었다(물론 개미는 당근 포함). 그런데 생물학은 인간중심주의를 생명으로 하기 때문에, 새로운 구별선을 인간과 그들 사이에 긋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사회와 진정하지 않은 사회. 그렇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진사회성이라는 말부터가 너무 인간중심적이고 속 보이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미 등도 진사회성 곤충이라고 분류한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겠는가? 윌슨을 비롯한 생물학자들이 여기서 멈출 리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인간이 곤충과 동급이 되는데…… 적어도 윌슨은 인간과 이 사회성 곤충을 근본적으로 구별할 길을 찾아내야 했다. 그것이 사실 『지구의 정복자』의 핵심 내용이다. 이건 나중에 보자.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어쨌거나 윌슨에 따르면 1990년대 들어서 혈연선택의 가설이 몰락했다. 우선 “흰개미는 이 설명 모형에 결코 들어맞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반수배수체 성 결정 메커니즘보다 이배수체 성 결정 메커니즘을 따르는 것으로 밝혀진 진사회성 종 집단들이 더 많이 발견되었다…… 그 결과 반수배수체 성 결정 메커니즘과 진사회성의 관계는 통계적 유의성이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다.”(p. 210)

 

요컨대 진사회성을 보이는 다수의 생물들이 혈연 선택론이 가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보다 더욱 황당한 얘기가 있는데, 그건 윌슨이 직접 말씀드리겠다.

 

장대익: 당신의 이론이 맞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왜 그들은 포괄 적합도 이론을 패러다임처럼 고수하고 있을까?

윌슨: “한마디로 무지다! 그 많은 서명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참고문헌[West, S.A. (2009), Sex Alloca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이 하나 있는데 확신컨대 그것을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다. 포괄 적합도가 실제로 측정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혈연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4)

4) 앞서 인용한 장대익 교수와 에드워드 윌슨의 인터뷰 중에서

 

『지구의 정복자』에도 비슷한 구절이 실려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려면 혜택 b(아마도 benefit; 인용자)와 비용 c(아마도 cost; 인용자)를 측정하는 것을 포함하여 포괄 적합도를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또 그런 측정을 하려면 야외 조사지와 실험실에서 대단히 어려운 연구들을 수행해야 한다. 이런 측정값을 얻은 사례는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한 시도된 적도 없다. 더군다나 근친도인 r를 정의하는 데에도 수학적으로 어려운 점들이 있다.”(p. 212)

 

황우석도 아니고, 당연히 그렇다고 주장들만 할 뿐, 실제로 하는 놈은 하나도 없다는 것 아닌가. 더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나는 윌슨의 이러한 주장을 100% 믿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도킨스를 비롯한 몇 백 명의 과학자들이 윌슨의 새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고 하니, 조만간 우리도 그 얘기를 접하게 될 터이다. 천천히 기다려 보기로 하고… 게다가 윌슨에게는 중요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자신을 포함하여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렇게 잘못된 이론(윌슨의 판단에 따르면)을 거의 맹신했다는 것을 윌슨 자신은 어떻게 성찰하고 있는지가 없다. 그런 거대한 맹신(물론 윌슨이 맞다면)과 그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생물학 혹은 자연과학의 어떤 중요한 문제적 측면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하다 보니 글이 또 길어졌다. 감기에 걸려서 상태도 별로니까, 나머지 내용은 다음 주에 올리기로 하겠다. 아쉽다, 내 얘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려던 참인데…… 추워진 날씨에 건강들 유의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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