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끝나지 않은 싸움

그 1주일간의 안부 행렬에 부쳐

- 상빈

안녕하지 못함을 그렇게 절실히 느꼈던 그 1주일과 안녕하냐 물을 수조차 없었던 시간들을 거쳐 오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 있었던 걸까요. 갈가리 찢겨 이 커다란 세계 속에서 홀로 외로울 수밖에 없었어도, 그래도 살아 있었던가요.

 

안녕이란 말에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나 봅니다. 단순히 만남과 헤어짐의 인사를 위해서만 사용되던 그 단어가 서로가 서로의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용도로 약간 변하였네요. 지난 1주일간 참 많이 울었습니다. 또박또박 힘주어 읽었던 그 수많은 대자보들 속의 글자들이 모두 각자 살아 있었기에,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살아 있음’은 감동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대학생에서부터 폭행당한 성노동자 여성까지, 지난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던 밀양에서부터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사라진 그 8,000여 철도노동자들에게까지, 우리들의 형체 없는 민주주의에서부터 그 찢겨져 나가 처참히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대자보들에게까지, 삶의 울분은 그 모든 통로들을 관통하며 살아 있었던가 봅니다.

 

그래도 우리는 지난 1주일간 ‘함께’ 살아 있었습니다. 그 1주일 이전의 시간들을 거쳐 오며 우리는 철저히 홀로 내버려져 있었던 걸까요. 우리는 그 사무치는 외로움에 몸을 떨어 가며 철저히 쪼개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일말의 내색조차 할 수 없었기에, ‘추워서 그래’, ‘능력이 없어서 그래’, ‘미천한 지방 것들이라서 그래’, ‘정권에 반대하는 반동분자들이라서 그래’ 라는 말조차 될 수 없는 핑계의 옷들을 꾸역꾸역 껴입고 있었던가 봐요. 인정하기 싫지만 떨리는 몸을 보일 수 없어 억지로 입고 있었던 그 모든 핑계의 말들은 정말인지 싫었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그렇게 그 1주일간 우리는 해방을 느꼈던 것일까요. ‘함께’해서. ‘함께’라는 단어는 철저히 쪼개져 외로움에 떨고 있었던 우리를 포근하게 엮어 주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껴입고 있었던 그 구역질 나는 핑계의 옷들을 이젠 벗어버릴 수 있게 되었어요. ‘함께’라는 단어에 의해 우리는 적어도 그 이전의 시간들보다는 ‘안녕’하며 살아 있었던 1주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하게 될 때 이름을 잃어버립니다.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참 소중할 거예요. 그렇기에 우리는 겁냅니다. 이름을 잃는다는 건 내가 ‘나’이지 않다는 말의 다른 언어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함께’하게 될 때 우리의 이름은 어떻게 탈락되나요? 기실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용산에서 그 높은 허공에서 일어난 불길에 신너와 컨테이너 박스와 다를 바 없이 죄 불타 재가 된 그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밀양에서 겨울 하나를 사이에 두며 스스로 불 지르고 또 풀과 곤충 잡는 약에 스스로 잡히는 방법을 통해 세상을 등졌을 때에도, 그 보이지 않는 거리 곳곳에서 쌍용차 노동자들이 세상에 소외당하며 홀로 외로이 떠났을 때에도, 죽은 건 사실 ‘나’ 라는 희미한 자각에 이름을 버리고 우리는 ‘용산’이 되고, ‘밀양’이 되고, ‘쌍용’이 되었었지요.

 

그리고 이젠 또 다른 이름이 되려 하나 봅니다. 미친 공권력이 철도노조 간부 수십 명의 몸을 속박하려 하는 지금, 우리 모두의 발이어야 할 철도를 그 누군가 배타적으로 홀로 가질 수 있게 만들려 하는 지금, 그 사실에 분노하고 울화가 터지는 우리 모두는 이름을 과감히 버리고 모두 함께 ‘철도노조’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음’은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요.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안녕하게 잘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방식만으로 만족해야 할까요. ‘나’는 언제나 ‘나’로서만 살아 있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온 살덩이가 찬바람에 썰린다 하여도 우리의 입은 ‘함께’ 말하고 있으니까요. 우린 늘 ‘함께’ 그 모든 것들이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외롭지 않고 또 춥지도, 능력이 없지도, 미천하지도, 반동적이지도 않게 될 테니까요. 우리 삶의 울분은 우리가 잃은 이름의 숫자만큼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밀양’이 되어, ‘철도노조’가 되어, 또 다른 울화가 쌓여 있는 그 모든 존재들이 되어야 할 시간인가 봅니다. 지난 1주일간 ‘함께’라는 단어를 배워 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안녕을 물었던 그 경험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물음은 곧 그런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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