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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서 <풍경>까지
장률 감독의 첫 장편 <당시>(2004)를 제외한 그의 모든 영화들에는 디아스포라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망종>(2005)에서는 감옥에 갇힌 남편을 대신해 김치 행상으로 살아가는 조선족 최순희와 그의 아들 창호가 등장하고, <경계>(2007)에는 평양에서 출발해 두만강을 건너 몽골로 간 탈북자 최순희와 그의 아들 창호가 등장한다. <중경>(2007)에는 북경어 강습을 하는 쑤이와 매춘을 일삼는 그의 아버지가 등장하고, 이리역 폭발사건의 육체적 정신적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중경으로 이주한 한국인 김광철이 등장한다. <이리>(2008)에는 이리역 폭파 사건으로 부모를 잃고 지적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진서와 태웅 남매, 중국어 강사로 온 중국인 여성 쑤이와 동네 목공소에서 일하며 불법체류자로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가 등장한다(<중경>에서의 쑤이는 <이리>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 두 영화는 원래 하나의 영화로 기획되었다가 분리되어 연작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두만강>(2009)은 북한과 중국이 맞닿아 있는 국경 지역에서 현재까지 첨예한 문제로 드러나고 있는, 식량을 구하려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조선족이 사는 연변과 북한을 오가는 인물인 정진과 조선족 창호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이렇듯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물리적으로 이산과 이주의 경험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수전증이 있는 소매치기 남자와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따르며 그의 집을 드나드는 여자가 주인공인 <당시>의 경우에도, 장률 감독이 여러 번 반복해서 밝힌 바 있는 “<당시>는 나의 일상과 가장 닮아 있는 영화다.”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점에서 그의 다른 영화들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대학교수였고 현재 영화감독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이전에 장률은 조선족이자 재중동포3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의 이산성은 이러한 그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그의 새 영화이자 첫 다큐멘터리 <풍경>의 인물들이 한국에 사는 이주노동자들이라는 점에서도 어김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주로 조선족, 북한과 남한 사람이었다면 이번에 그가 대상으로 하는 이들이 아시아 각지에서 한국으로 온 이주노동자들인 것은 약간은 새로운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현재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곳이 한국이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풍경> 이전에 유일하게 한국을 배경으로 제작된 <이리>에는 중국인 강사 쑤이와 목공소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가 등장한다. 이처럼 장률이 보기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 이산성을 안은 채 살아가는 이들의 다수는 이주노동자들인 것이다.
<풍경>의 거리
<풍경>에는 그것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인물들과 카메라(감독) 사이의 독특한 거리가 존재한다. 14명의 이주노동자들의 인터뷰를 주된 재료로 그들의 일터, 도시의 여러 인서트들을 함께 편집한 이 영화는 그들이 하는 노동의 고됨, 비합리적인 처우 같은 이주 노동의 문제점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보라>(2011), <아무도 꾸지 않은 꿈>(2012) 역시 노동자들을 다루는 작품이었고, 여기에도 인물들과 카메라 혹은 감독 사이의 거리가 존재한다. 거리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이 두 다큐멘터리에는 과거 한국 노동 다큐멘터리의 흔적들, 즉 현장에서 함께 뛰고 노동자들 속으로 파고들며 그야말로 무기와 다름없었던 카메라 뒤에 남은 차가운 분노, 숨겨진 칼날의 기운, 환멸 등이 묻어난다. 그러나 <풍경>에서의 거리는 이와는 다른 감응을 가지고 있다. 14명의 이주노동자들로부터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그들이 한국에 와서 꾸었던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꿈에 관한 이야기다. 장률은 이러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연인의 감정”을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꿈’ 이라는 것이 간접적이긴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소망, 공포, 욕망 같은 것들을 드러내 주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를 그들로부터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꿈을 경유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의 이전 영화들에 자주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겁탈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 장면을 연출할 때 장률은 인물들을 외화면으로 보내거나 카메라를 물려 세워 겁탈의 순간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했다. 이러한 연출법은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죽음의 순간에도 적용된다. 관객은 그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은 알지만 주로는 사운드를 통하거나 부분적 시각으로 이를 전달받는다. 장률은 그의 영화에서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것,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을 다루지만 그것을 결코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을 택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연출은 삶에서 벌어지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 비극, 폐부를 다루면서도 이를 스펙터클화시키고 싶지는 않은, ‘존중’이라 할 만한 무언가, 즉 삶에 대한 그의 윤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를 고려해 볼 때, 연출이 불가능한 실제 인물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서 응용된 방식이 바로 ‘꿈’을 통한 인터뷰였던 것 같다. 그들이 들려주는 꿈 이야기는 사장님과 공장장님, 동료들을 고향인 스리랑카로 데려가 관광을 시켜 주는 타실라의 꿈에서부터, 한국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르는 제주도지만 아내와 함께 제주도로 관광을 다녀온 와리우야의 꿈, 고향인 우즈벡 시장에서 자신이 한국에서 만든 옷감을 고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뿌듯했다는 세르조도의 꿈, 고향에서 죽은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데려가려는 악몽을 꾼 네팔에서 온 강가의 이야기까지, TV속 이주노동자들이나 독립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이들에게서는 들어보지 못한 또 다른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꿈은 하나의 방법일 뿐 꼭 꿈일 필요는 없다. 이는 유일하게 다른 의미에서의 꿈, 장래희망을 경찰이라 밝힌 소녀, 송홍련이 나오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사진관에서 찍힌 이 장면에서 장률은 그녀에게 한국 와서 꾸었던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이 뭐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사진관 아저씨와의 대화에서 그녀의 삶과 내면은 그 내용과 목소리, 제스처를 통해 다른 인터뷰들에서 볼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충분히 드러난다. 때문에 굳이 그녀를 불러 세워 꿈을 물어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즉 장률의 진짜 관심은 인물들의 꿈이 아니라, 그들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삶의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잠시나마 꺼내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볼 때, 전체적인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아름답거나 추한 특정 지점들을 유심히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는 차 안과 밖의 거리를 통해, 또한 지나감을 통해 닿지 못한 채 놓쳐버리게 된다. 이럴 때 기억 속에는 그에 대한 상이 남게 되는데, 나에게 <풍경>에서 듣게 된 꿈 이야기와 그들의 표정과 제스처는 그러한 상처럼 남아 있었다.
불투명성
특이하게도 가장 많이 생각나는 상은 뿌옇고 흐린 이미지였다. 이것은 누구의 꿈이었을까. 두 번째로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 이 불투명성의 정체는 영화에 등장하는 14명의 꿈 이야기 중 그 누구의 이야기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신 내가 발견한 것은 영화의 첫 장면인 인천공항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보이는 안개 낀 도로의 모습, 인서트 장면 여기저기서 마주하게 되는 안개, 연기, 김, 비닐 같은 불투명성 들이었다. 이는 담배연기처럼 가늘게 피어올라 금방 흩어져 버리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영화의 마지막, 쓰러질 때까지 뛰다가 지쳐서 바라본 하늘마저 파란색 대신 도화지 같은 하얀색이었던 것과 같은, 어딘지 모르게 막막하게 느껴지는 불투명이었다.
이는 먼저, 이주노동자들의 노동 현장에서 발견되었다. 도시 외곽에 이르러 탁 트인 전경. 구름 낀 하늘에 번진 옅은 주황의 노을 혹은 황혼과 그 아래에 펼쳐진 비닐하우스들이 보인다. 비닐하우스들을 둘러친 비닐들의 불투명이 걷히고 나면 물기를 가득 머금은 비닐하우스 내부의 습도가 전해지고, 거기서 상추를 뜯는 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닌 젊은 이주노동자들이다. 마장동 축산시장 안을 걸어 들어간 카메라가 멈추는 곳은 소며 돼지 같은 도축된 가축을 해체하는 작업장인데, 중국에서 온 쉬첸밍과 그의 동료는 막 삶아 낸 소머리, 돼지머리에서 고기를 분리해 내고 있고, 작업장은 고기들에서 나온 김으로 가득 차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등장하는 색색의 옷감을 찍어 내는 천 공장에도, 염색된 옷감들을 헹구어 내는 공정에서 무럭무럭 김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불투명은 이주노동자들의 인터뷰와 작업장 외의 장면들에서도 발견된다. 앞서 언급한 첫 장면에 이어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안개 낀 도로를 달리는 장면, 와리우야의 꿈 뒤에 삽입된 제주도의 풍경에서 그가 꿈속에서 보았던 귤나무, 포도나무 대신 보이는 안개 낀 바다, 유일하게 화이트칼라 노동자로 등장하는 캐서린과 초웁이 나오기 전에 제시되는 안개 혹은 스모그로 덮인 서울, 이렇듯 영화 전반에 걸쳐 제시되는 불투명의 이미지들은 극장을 나설 때 떠오르는 상들의 채도와 분위기를 결정짓고, 나아가 ‘실은 그것이 영화의 주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 누구의 꿈에도 나오지 않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감싸며 영화를 하나의 꿈처럼 느끼게 만드는 이 불투명은 장률 감독의 꿈이자 내면의 풍경일 것이다. 이러한 불투명의 이미지는 그의 전 영화들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극영화들을 생각해보면, 등장인물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는 존재했지만 이는 확신에서 비롯된 분명한 것이었고, 이미지들 역시 뚜렷했으며, 그것으로 장률을 보여주는 데 충분했다. 이를 미루어 생각해 본다면 다큐멘터리에 이르러 등장하는 이 불투명의 이미지들은, 같은 디아스포라적 위치에 있긴 하지만 그가 만들어놓은 허구 속, 틀 지워진 인물들이 아닌 현실의 복합적 요소를 그대로 간직한 실제 인물들 앞에서 생경해질 수밖에 없는 그의 감정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 이는 기존에 극영화만 다뤄왔던 감독으로서 다큐멘터리라는 새로운 장르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느낄 법한 것이긴 하다. 이는 일면일 수는 있으나 이것이 영화 전체를 좌지우지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한 학회에 초대된 자리에서 장률 감독은 영화 첫 장면인 공항으로 향하는 안개 낀 도로의 장면을 촬영하며 고향인 동티모르로 돌아가는 아우구스티노의 감정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야 말로 영화 전체를 설명해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풍경>에서 14명 이주노동자들의 꿈 이야기와 그들의 노동 현장에서 마주한 불투명의 이미지들은 장률이 간직하고 있는 디아스포라적 정체성과 또한 그가 연변을 떠나 한국 땅에서 느끼고 있는 이주자로서의 낯섦의 감정과 뒤섞여 묘하고 느슨한 동질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온 호앙의 인터뷰 후에 도착한 그녀의 집에서 만난 동생 부부의 아이를 보며 장률은 만주에서 조선족으로 태어난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또한 동티모르로 돌아가는 아우구스티노와 법무부로부터 쫓기는 꿈을 꾼다는 쉬첸밍의 이야기에서는 예고 없는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해야 하는 이주자로서의 불안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영화들에서 보여 준 그의 윤리적 태도와 교수이자 감독으로서의 계급적 정체성은 이들에게 이 이상으로 다가가는 것을 막았을 테고, 대신에 그 감정들이 드러나는 것이 영화의 여기저기에 배치된 불투명의 이미지들인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이 불투명의 상들은 그간 그의 영화에서는 간접적으로만 전해졌던 장률 감독의 내면을 가시화하여 보여준, 그의 내면의 풍경이자 고백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이 장률 감독이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공통적 감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막막함이나 아득함만이 아닌, 온기를 머금은 불투명으로 다가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