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콜트콜텍 해고자의 연극, <구일만 햄릿>

- 이진경

<햄릿>, 아마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햄릿>만 그냥 공연하긴 뭣해서인지, 이런저런 변주들이 많은 듯하다. 보진 않았지만, <햄릿 머신>이란 인상적인 제목의 연극 포스터를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햄릿이 기계라면, 어떻게 작동하는 기계일까?

<구일만 햄릿>, 햄릿을 변주한 제목인데, 변주한 내용은 사실 아주 소박하다. 9월에 공연할 때, 9일만 공연한다고 하여 <구일만 햄릿>으로 했다고 하니. 하지만 이번에 12월 17일부터 22일까지 앵콜공연을 하니 6일을 더하여 <십오일간의 햄릿>이 된 셈이다. 제목과 실제의 이 간극은 공연이 성공할수록 커질 테니, 자기 스스로를 먹어치우는 제목인 셈이다.

내용은? 그냥 원작에 충실한 햄릿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연극과는 전혀 거리가 멀던 해고자들이, 부당해고에 항의하며 싸우는 와중에 만드는 연극이 어떻게 500년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그대로 연기할 수 있을까?

근심 어린 기대였던 것 같다. 사실 근심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해고자가 되어 7년간 거리를 떠돌던 분들이 하는 연극이니, 그렇지않아도 한국의 연극이나 드라마는 눈물나는 신파가 대세인데, 결코 쉽지 않았을 7년의 무게가 더해지면 정말 신파가 되는 건 아닌지 하는 근심을 어찌 안 가질 수 있을까.그래서 역으로 원작에 충실한 <햄릿>이라기에, 원래 대본이 있으니, 그렇게까진 않을 것 같다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도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 물론 아마추어였고, 특히 처음엔 숫기없는 어색함이 십여일 지나서도 빠지지 않았군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어느새 몰입하게 되었던 건지, 어느새 그런 느낌은 사라졌다. 발성이나 동작이나, 전문가 눈엔 어떨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익숙한 프로의 과숙한 연기가 신파와 결합할 때 나타나는 난감함과 반대로, 소박함이 역으로 절제되고 신선한 맛을 주는 듯 했다. 나는 이게 더 좋았다.

원작대로의 <햄릿>과 7년의 세월을 거리에서 싸우며 보낸 해고자들, 여기엔 사실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지금 <햄릿>을 한다는 것은 무얼까, 스스로도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그렇기에 이들의 햄릿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햄릿과 콜트콜텍의 해고자라는 처지가 어떻게 만날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단순히 햄릿이란 고전적 드라마를 그저 한 번 연기하는 것은, 정말 취미삼아 하는 아마추어의 단순한 놀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그걸 지금 그들의 처지를 재현하는데 원용한다면, 유치해지기 십상일 것이다.

연출자의 해법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원작대로의 햄릿과 영상으로 쏘는 ‘메이킹 필름’ 같은 영상을 병진시키는 것이었다. 영상은 때론 연기 연습을 하는 장면, 연극을 하게 된 이유, 혹은 콜밴이란 밴드로 노래하는 장면이나 부평 콜트공장을 자기식으로 바꿔버린 예술가와 해고자, 그리고 그 공장을 부수는 장면 등등 7년의 시간이 담긴 일종의 다큐멘터리였다. 허나 양자의 단순한 병진만은 아니었다.가령 배우들이 무대에 앉아서 스크린에 비추는 자신들의 기록을 보면서 말로 거들기도 하고, 서로 그걸 두고 대화를 하기도 했다. 재현적인 병행구조는 아니었으며, 사이사이 영상에서 무대로, 무대에서 영상으로 드나들고 엇갈리며, 혹은 나란히 겹치거나 웃기며 멀어지면서 무대와 영상의 ‘대위법적인’텍스처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오필리어나 어머니와 햄릿이 ‘대립’하는 장면에선 연기 연습하며 난감해하는 모습이 끼어들면서 지나치게 무거워지거나 신파조로 기우는 걸 막아주었다. 연극과 영상이 때론 보충적으로 가까워지고 때론 거리화되면서 리듬을 맞추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두 개의 상이한 시간, 오백년전 덴마크의 시간과 지금 이들의 시간이 교차하거나 이어지면서 새로운 ‘시간적 종합’을 하는 듯하다고 하면 좀 과하다고 할라나?^^;;

자기 부왕의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된 햄릿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는 대사는 아주 유명하다. “시간의 관절이 빠져버렸도다. 오, 저주받은 운명이여. 이 불의를 교정하러 태어난 몸이라니!” 첫 문장의 원문인 ‘Time is out of joint’는 사람마다 아주 다르게 번역하는데, 가령 앙드레 지드는 이를 “시대가 명예를 잃어버렸도다(Cette époque est deshonorée)”라고 번역했다고 한다.

빠져버린 시간의 관절을 제대로 끼워넣을 운명이란 실추한 시대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고, 그렇기에 불의를 교정하는 것일 게다. 돈 있는 자들 궁상을 떨며 열심히 일하던 노동자들을 쫓아내고 돈 없는 자들을 궁지로 모는 지금 이 시대는 시간 자체가 명예를 잃어버린 시대임이 틀림없다. 그것이야말로 부가 넘칠수록 궁핍 또한 넘쳐나는 이 시대의 비밀일 것이다. 그들에게 쫓겨나 이 궁핍한 시대의 비밀을 보게 된 저 해고자들은 햄릿처럼 시대의 불의를 교정할 운명을 타고난 존재는 아닐까?

이런 점에서 세익스피어가 500년전 창안한 햄릿의 시간과 7년간 콜트콜텍 해고자들이 살아온 시간을 대위적으로 종합하려는 저 ‘시간적 종합’은 확실히 관절에서 벗어난 시간을 창조하는 종합이다. 그 벗어난 관절을 두고 멀어지고 가까워지며 만나고 섞이는 낯선 시간의 종합니다. 이를 두고 관절에서 벗어난 시간, 그 불의의 시간을 맞추어야 했던 햄릿의 ‘저주받은 운명’과 콜트콜텍 해고자들의 ‘저주받은 시간’이 상반되는 색조와 방향에서 서로 섞여드는 것이었다고 하면 지나치다 할까?

분명한 건, 이 덕분에 신파와는 거리가 먼, 오히려 쿨하다고 해야 할 연극이 된 듯하여,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경계를 푼 걸 알았던 것일까, 관객과의 대화에서 어느 한 관객의 말이 연극에서 빼내어버린 눈물바람을 몰고 왔다. 연극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그 여성은, 자기 어머니 또한 이 해고자들처럼 몇년을 거리에서 투쟁해야 했다고 하면서, 당시 그런 어머니를 자신은 솔직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7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리에서 싸우는 분들이 공연하는 햄릿을 보니,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하여 부디 이분들의 투쟁이 승리하였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모두들 나처럼, 마치 울지 않고 있는 것인 양, 눈물도 닦지 못한 채 그저 마르기만을 기다리며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애기를 들으면서는 잘 참고 있던 사회자가 ‘조명의 열기 때문에’ 눈에서 흘러나오는 땀을 손으로 훔치는 걸 보면서, 관객 속에 앉아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거듭 생각했다.물론 끝내 울지 않는 척, 닦지 않고 버티진 못했지만.

거리에서의 7년의 방황은 햄릿의 미친 방황보다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주어진 운명을 한탄하기보다는 기꺼이 웃으며 받아들이려 한다는 점에서 햄릿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이 햄릿처럼 비극을 연기하지만, 그들의 삶이 햄릿처럼 비극으로 반복되진 않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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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 1개

  1. Yeonjin Pak말하길

    이 공연 정말 좋았습니다. 비록 이번 재판에서 패했지만 연극으로 뭉치셨던 그 힘으로 계속 전진하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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