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대 과학

이기와 이타를 넘어서 (3)

- 박성관

이기와

이타를 넘어 (2)-1 『지구의 정복자』(하)

 

 

윌슨의 『지구의 정복자』에 대해 말할 게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진화의 핵심 메커니즘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집단과 개체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에 대해 나는 윌슨과 생각이 크게 다르다. 그런데 첫째 문제만 썼는데도 글이 적잖이 길어졌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둘째 문제는 이후 『이기적 유전자』나 『적응과 자연선택』을 다룰 때에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늘은 첫째 문제만 건드리기로 한다.

 

1. 인간, 개체 선택과 집단 선택의 교차로

 

윌슨은 인간과 개미 등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진화 과정에서 진사회성(진정한 사회성)을 획득했다고 한다. 물론 인간은 개미 등과도 또 다르다(당근 더 탁월하다고 미리 상정되고 이렇게 상정된 전제는 어떤 관찰 결과가 나오더라도 요지부동이다). 개미 등은 진사회성을 이루되 선택 매커니즘은 개체 선택밖에 없다. 반면 인간은 집단 선택과 개체 선택이 섞여 있다. 그중 집단 선택 과정을 통해 도덕, 신뢰, 협동심을 비롯한 인간만의 핵심적인 속성을 획득했고, 그 결과 지구를 정복하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공감하고, 자제한다. … 사이코패스가 아닌 한, 남들의 고통을 자동적으로 느낀다는 의미다.(p. 300)

 

아주 간략하게 말하면 이것이 『지구의 정복자』의 내용이다. 사실 이 이상의 깊은 사유도, 풍성한 상상력도 이 책에는 없다. 물론 이런 간단한 내용에도 골치 아픈 문제는 있다. 인간에게는 집단 선택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개체 선택 또한 중요하게 작동한다. 나아가 집단이라는 게 여러 수준에서 다양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집단 선택 매커니즘 자체도 매우 복잡해진다. 윌슨 얘길 들어보자.

 

2. 어느 쪽이 내 집단인가?

 

우선 “인간은 본래 대단히 부족주의적”이다. “인간 본성의 한 가지 기본 요소는 사람들이 집단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며, 집단에 합류하면 그 집단이 경쟁 집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p. 355) 인간은 어떤 집단에 소속되고자 하는 열망을 진화시켜왔고 그렇게 소속된 자신의 집단에 충성하고자 한다. 거꾸로 자의든 아니든 일단 어떤 집단에 소속되면 그것을 마치 자신이 선택한 것인 양, 때로는 그보다 더 강렬하게 자기 집단이 우월하다고 느낀다. 만일 우월하지 못하다면 우월하게 만들고자 하는 충동에 내몰린다. 마치 국가주의자들이 자기 국가가 최고라 생각하고, 현실에서 그렇지 못할 경우(국가의 수가 절라 많기 때문에 대부분은 최고일 수가 없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고 싶어한다. 본래 우리 국가는, 본래 우리 민족은 최고라고 믿으면서, 그렇지 못한 현실에 비분강개하면서 말이다.

 

우리도 아다시피 집단의 종류는 매우 많다. 만일 이런 집단이 나에서 출발하여 가족, 지역, 국가, 인류 하는 식으로, 규모만 계속 커져간다면 복잡할 게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집단이란 게 여러 층위에서 대단히 복잡하게 교차된다는 사실이다. 한 국민 내에, 한 지역 내에, 한 회사 내에 얼마나 많은 갈등과 대립이 있는가? 칼부림도 불사하는 가족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더 나아가 생각할 수 있다면, 나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갈등과 대립과 화해로 점철되어 있는가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윌슨도 물론 이 점을 모를 리 없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인간 관계는 우리가 물려받은 구석기 시대의 마음을 당혹스럽게 할 만큼 복잡해졌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본능은 역사 시대에 들어서기 전 수십만 년 동안 우세했던, 작고 통일된 무리의 인간관계를 갈망한다. 우리 본능은 변화한 문명에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추세는 인간의 가장 강력한 충동 중 하나인 집단을 이루려는 성향에 혼란을 일으켰다. 우리는 초기 영장류 조상들에게서 시작된 한 가지 충동(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욕구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사람은 강박적인 집단 추구자이며, 따라서 지극히 부족주의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확대 가족, 조직 종교, 이데올로기 조직, 인종 집단, 운동 동호회, 혹은 그것들의 조합 속에서 다양하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온갖 가능성이 열려 있다. 각 집단에서는 지위 경쟁도 일어나지만, 집단 선택 특유의 결과물인 신뢰와 미덕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걱정도 든다. 무수히 겹치는 집단들로 가득한 이 변화하는 지구촌 세계에서 대체 누구에게 충성 맹세를 해야 하나?(p. 299-300; 삽입 구절은 인용자).

 

그거 참 문제긴 하다. 여기서는 일단 그의 견해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는 인간이 “대단히 부족주의적”이고 “강박적일 정도로 집단 추구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도 숱하게 경험하다시피, 인간에게는 그와 상반된 경향 또한 강력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집단 의식이 그토록 강렬한 본능이라면, 왜 집단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그렇게 많은 투자가 퍼부어진단 말인가? 민족의식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우리가 남이가, 하는 식의 반복 주입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단합대회의 종류는 왜 그리 많단 말인가? 더 심각한 점을 말하자면, 그 집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온갖 일탈적 흐름에 대해 왜 그토록 잔혹하게 징벌한단 말인가? 우리는 집단성이 너무 부족해지면 불안하고 외롭고 심심하지만, 집단성이 과도해지면 갑갑하고 짜증나고 그만 탈출하고 싶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가!

 

3. 집단 생활은 협동심을 고취시킨다?

 

게다가 집단 생활이 상호 “신뢰와 믿음”, 도덕 등을 산출한다고 하는 건 현실을 반쪽만 보고 나머지엔 눈을 감는 처사다. 어려울 것도 없다. 당신이 실제로 어떤지 생각해보면 명백하다. 집단 생활 속에서 당신은 상호 신뢰와 믿음, 도덕 등이 점점 더 증대된다고 느끼나? 아니면 갈등과 적대감이 더 심화되는가? 전자와 후자 중 어느 쪽이 더 강화되는가는 경우에 따라 다르지 않은가? 작은 마을에 살던 사람이 큰 도시에서 살게 되면 상호 신뢰와 믿음, 도덕 등이 더 증대되나? 오히려 반대로 대도시 생활이 사람들을 치열한 경쟁 관계로 내몬다는 게 상식적인 감각 아닌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집단의 크기 자체로는 상호 신뢰와 믿음, 도덕 등이 더 증대한다고 일반화할 수 없다는 거다. 이런 지극히 당연한 얘기에 대해 윌슨 등은 뭐라 답할까? 앞의 인용문에서도 잠시 언급되었듯이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 물론 집단 생활을 통해 여러 가지 특성들이 획득될 수 있고, 때로 그 특성들은 서로 상반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갈등과 적대는 모든 생물에게 공통된 것이고, 신뢰, 믿음, 도덕 등은 인간에게만 특유한 것이라고, 그 특유한 속성은 집단 생활 속에서 창발된 것이라고….

 

나는 이런 얘길 하다보면 100여년전 <19세기>라는 잡지에서 토마스 헉슬리와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벌인 논쟁이 떠오른다. 헉슬리는 “자연이란 생물들이 자기 이익을 걸고 무자비한 투쟁을 벌이는 전장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는 인간 또한 문화에 길들여지지 않으면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서로 연대하고 협동한다고 보았다. 인간이 연대하고 협동할 수 있는 것도 무리생활에서 토득한 상호부조의 습성을 아직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진화시켜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야말로 “덕과 자비로움을 갖고 태어나”1)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존재였다. 당신에게 묻는다면 뭐라 답하시겠는가? 사회는 인간을 동물보다 고상한 존재로 상승시키는가? 아니면 금수만도 못한 존재로 타락시키는가?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어떠한가?

 

4. 핵심은 집단이 아니라 집단 간 경쟁이란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집단 생활이 협동심을 고취시킨다는 건 윌슨의 핵심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집단 생활은 협동심 고취로 곧장 이어지지도 않는다. 집단 생활은 매우 중요한 조건이지만 그 다음의 결정적인 문턱이 있다. 그것을 개미 등은 넘지 못하고 있고, 인간은 넘어섰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협력자가 다른 유전적 협력자와 만날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식으로 가까운 친족끼리 함께 모일 때, 그 자체로는 협동의 출현을 촉진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협력자를 많이 포함한 집단이 협력자를 덜 포함한 집단과 맞서 경쟁하면서 일어나는 집단 선택만이 종 수준에서 더 크고 더 넓은 규모의 본능적인 협동을 빚어낼 것이다.(p. 303)

 

이 바로 앞 단락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집단 선택은 공감의 본능을 빚어냈을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더욱 중요한 형질인 협동도 적어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2002년 에른스트 페어와 시몬 게히터는 그 과학적 문제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립했다. “인간의 협동은 진화의 수수께끼다. 다른 생물들과 달리, 인간은 때로 큰 집단 속에서 유전적인 유연관계가 없는 낯선 이들과, 또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이들과 자주 협동을 하며, 번식상의 이익이 작거나 없을 때에도 그렇다. 이 협동 양상은 혈연 선택의 진화론과 신호 전달 이론이나 호혜적 이타성 이론과 관련된 이기적 동기로 설명할 수 없다.(p. 303)

 

그러니까 함께 모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개미 등이 이런 경우다). 인간처럼 종 수준의 본능적인 협동이 발생하려면 다른 집단과의 경쟁, 그것도 적대적 경쟁이 필수적이다. 왜 그런가? 진화의 원동력이 바로 생존경쟁이기 때문이다.

 

윌슨을 포함한 현대 생물학자들은 진화의 핵심 메커니즘을 생존 경쟁이라고 배웠고, 아마도 살아오는 과정에서 그것을 의심할 만한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경쟁도 없는 세상에서는 평화로울지 어떨지 몰라도 발전이나 진화는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당신도 그렇게 믿고있지 않은가?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렇지만, 사회 생물학처럼 너무 경쟁만을 강조하는 학자들이나 이론에 대해 반감을 가질 터이다. 그래서 결국 갖게 되는 입장은 이런 것다. 경쟁만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 물론 경쟁을 완전히 없앨 수도 없고, 또 그게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건 맞다. 그러니까 우리는 경쟁이라는 불가피한 요소를 선의의 경쟁 쪽으로 잘 유도하는 게 중요하다는 식으로 생각할 터이다(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은 대체로 이랬다).

 

5. 경쟁은 진화의 엔진인가?

 

나는 이 대목에서 기존 생물학과는 전혀 다른, 무척 상반되는 주장을 하려 한다. 아마도 당신의 견해와도 대립될 것이다. 내 주장은 경쟁이 진화의 핵심 메커니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의의 경쟁이든 악의의 경쟁이든, 경쟁이 진화를 추진한 원동력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이런 입장의 대표자는 바로 린 마굴리스다. 그녀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지호)라는 명저를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녀는 공생이야말로 진화의 원동력이요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했고, 세포 내 공생설을 그 근거로 들었다. 그런데 여러분, 상상이 되시는가? 뭔가 경쟁도 하고 협동도 하고 그러면서 변화도 생기고 발전도 될 거 같지 않은가? 기존에 있던 존재들이 같이 사는 것만으로 어떻게 거대한 변화, 진화가 발생한단 말인가? 기존 종의 멸종과 새로운 종의 진화가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저 같이 사는 것만으로….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의문은 지배 계급이나 주류 생물학자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대부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얘기하지 않았는가?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직접 읽어보시라고. 읽어보기도 전에 저런 책은 뭐 동물들의 협동 사례를 죽 늘어놓으면서 사랑, 공감 이런 거 강조하는 그런 책일 거라 지레 짐작하지 마시라. 흔히 사람들은 뭐가 진화되었다고 하면, 날카로운 이빨이나 단단한 껍질, 식물의 두툼한 털 같은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등을 떠올린다. 그런데 정말 커다란 진화, 매우 급격하고 중요한 진화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는가? 예컨대 동물이나 식물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로, 혹은 어떤 식물이 다른 식물로 진화하는 게 아니고, 아예 동물과 식물이 없었던 세상에서 어떻게 동물과 식물이 진화해 나왔을까 생각해보셨는가? 마굴리스의 이론은 바로 이런 중대한 질문에 대해 “공생!”이라고 답한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그녀의 논문은 1967년 『이론 생물학 저널』이라는 잡지에 실리기 전에 열다섯 번이나 거절당했다.”2)당시 학술 모임 같은 데 마굴리스가 나타나면 거의 ‘미친 X’ 나타났다는 식의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몇 십년 전에 그녀의 이론은 정설이 되었고, 동물과 식물의 진화, 나아가 세포의 탄생에 대해서 최고의 이론이 되었다. 그러니 어찌 읽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지호)를!

 

참고로 말해두자면, 나도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13장에서, 특히 「진화의 주된 동력과 메커니즘」에서 이 주제를, 자세히, 마굴리스와는 다른 지평에서 다룬 바 있다.

 

6. 지구는 진화하는가

 

진화에 대한 통념적 이미지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해보자. 좀 된 얘기지만 마굴리스와 함께 러블록이 주장했던 ‘가이아론’을 기억하시는가? 이 이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과학자들 간에 이런 논란이 일었다. 과연 가이아는 하나의 생명체인가? 가이아는 진화하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하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자. 지구라는 가이아는 진화할까? 여기에 대해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반대했을 것이다(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도킨스도, 굴드도 반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화하려면 그와 경쟁하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하긴 그렇다. 지구는 자기와 닮은 자식을 낳지도 않고, 자기와 다른 존재와 경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무슨 진화씩이나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어떤가? 그럼 지구는 오래도록 변화 없이 정지해왔는가? 변화한다고 해도 아무런 방향성 없이 그저 이리저리 부침(浮沈)을 계속했을 뿐인가? 명백히 아니지 않은가! 지난 46억년간의 역사를 진화가 아니라면 뭐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생물들의 진화보다 더욱 급격하고 다양한 변화를 실현해 왔다. 간단히만 생각해봐도 물질밖에 없던 지구에서 생명을 산출해버리지 않았는가? 물질들의 자연스러운 운동에 의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지구가 진화하느냐 의구심을 갖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그런데 학자들 말마따나 지구에게는 경쟁하는 존재가 없다. 자기 차이화에 의해 기존의 자신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마구 생산해버린 것이니 말이다. 상황을 요약해보자. 지구는 진화해왔고 앞으로도 진화해갈 것이다. 그런데 그 메커니즘은, 우리의 진화론에서 말하는 생존 경쟁 메커니즘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지구는 진화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진화의 핵심 메커니즘이 경쟁이라는 이론을 재고(再考)해야 하는가? 과학이란 무엇인가? 현실과 이론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이론이라도 현실에 꿰어맞추는 것, 그것이 과학 아닌가?

 

우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150억년 동안 우주는 이토록 다양한 세계들을 창조해왔는데 이에 대해 “우주의 진화”를 말해선 안된단 말인가? 우주가 스스로 진화하여 수많은 우주들을(현대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의 개수는 10⁵⁰⁰개라고 한다) 낳았고, 태양계, 지구, 나아가 지구 상에 수많은 생명들을 탄생시켰는데, 이런 우주에게 다른 우주가 없다고 해서 진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7. 물리학에서는 어떨까?

 

자! 이제 다시 묻자. 진화의 핵심 메커니즘이 경쟁, 생존경쟁인가? 대답하기 힘드시겠지만, 아마 이런 반론 혹은 반감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구와 우주에 대해 이야기한건 은유적인 얘기고 실제 생물들의 진화는 어떻게 설명하겠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다. 앞서 말했듯이 그건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와 내가 쓴 책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이미 책으로 쓴 내용을 반복하느니, 차라리 나는 이 문제를 좀 더 키워 심각화하고 싶다. 사실 내가 지적한 문제는 생물학자들이나 일반인들, 지배 계급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물리학자들도 그렇다. 그들은 엔트로피 법칙을 거의 최고의 범우주적 법칙으로 신성시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도 빅뱅 이래로 계속 커져왔다고 말한다. 이걸 쉽게, 다른 방식으로 무질서도가 커졌다고도 표현한다. 맹물에 각설탕을 예컨대 3 개 넣으면 처음에는 물과 각설탕이 질서 정연하게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한동안 시간이 흐르면 설탕과 물이 뒤섞인다. 아무리 눈을 부라려도 각설탕을 찾을 수 없고, 어디를 찍어 먹어봐도 맹물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없다. 이걸 처음 상태에 비해 무질서도가 높아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에 따르면 우주는 엔트로피가 점점 커진다고 한다. 점점 더 뒤섞여서 균질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우주상을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되는가? 우주는 진화하는 게 아니라 역진화하는 꼴이 된다. 변화한다 해도 다양성과 이질성을 향해 무한히 열려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균질해지는 방향으로, 차이와 이질성이 감쇠되어 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우주가 열적 죽음(heat death)을 향해 가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3)이렇게 보면 현대 물리학이 우주상은 빅뱅론이라는 창조론에서 시작해서 엔트로피라는 종말론으로 끝난다.4)^^;

 

요컨대 주류 생물학에 따르면 우주나 지구는 진화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물리학에 따르면 우주는 역진화하면서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어떤가? 이런 견해가 당신의 상식에 부합하는가? 만일 진화의 핵심 메커니즘이 경쟁이 아니라면, 윌슨의 주장, 생물학의 주장, 주류 진화론자들의 주장 전체는 어떻게 되는가? 당신도 같이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8. 보편 윤리

 

 다시 윌슨으로 돌아가 마무리하자. 윌슨은 현대 세계가 “종교적 신앙, 이데올로기, 호전적인 국가 사이의 경쟁 때문에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문제들”(p. 363)로 신음하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인간들끼리 편 갈라 대립하는 게 근본적인 문제라는 말이다(여기에는 인간들이 이전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소규모 부족주의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진단이 깔려 있다). 그의 해결책은 인간이 작은 차이를 넘어서 인류라는 집단 전체를 위해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지구인이 되자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 힘이 쪽 빠졌다. 시대 착오도 이런 시대착오가 없다. 인간에 의한 환경 파괴가 전 지구적인 근심사가 된지 오래인데, 지금 와서 새삼 깨달았다며 주장한다는 게 지구인이라는 집단으로서 단결하자는 것이라니…. 현대 인류의 과제는, 어떻게 나와 다른 타자들, 다른 인간을 넘어 다른 동물이나 식물들을 비롯한 온갖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공생”, “공존”할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단결”이라니! 인간중심주의도 이런 인간중심주의가 없다.

 

이론적으로도 파탄이다! 윌슨이 호소하는 대로 우리가 지구인이 되면 어떻게 될까? 인류는 더 이상 진화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또 경쟁이 필요할 터인데, 그럼 ‘지구인’은 누구와 경쟁해야 하는가? 시대 착오에 이론적 파탄까지 겹치게 된 것, 그것은 윌슨이, 현대 생물학이 경쟁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가 책의 말미에 털어놓은 얘기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지닌 맹목적인 믿음을 고백해야겠다. 우리가 몹시 원한다면, 22세기쯤이면 지구는 인류의 영원한 낙원이 되거나 적어도 그 초입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p. 363)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완전한 세계이므로 더 이상 진화도 없을 터이다. 그렇다면 ‘지구인’은 또 누구와 경쟁해야 하느냐는 나의 질문은 우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 세계를 전망하는 사람은 진화론자가 아니다. 윌슨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고 만 것일까, 창조론자이자 종말론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1) 이상 인용문은 박성관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그린비, 2010). p. 488, 489.

2) 박성관 『종의 기원….』. p. 826.

3) 우주의 역사와 엔트로피의 관계에 대한 이런 얘기를 나는 어느 책에서 딱 한 구절 보았고, 그에 대한 얘기를 조금 주워들은 거밖에 없다. 그래서 충분히 얘기를 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다행히도 승산에서 이와 관련된 책이 곧 번역 출간될 것이라 한다. 『퀀텀 유니버스』 책 뒤에 실린 광고에 보자면 로저 펜로즈의 『Cycles of Time』가 근간으로 되어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무질서도(엔트로피)’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통찰력있는 분석이 담겨있다”고 쓰여 있다. 잘 됐다! 이 책 번역 출간되면 그때 가서 이 얘기 함 더 하자.

4) 르네 톰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 과학이 과거에 종교가 했던 것과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오늘날의 과학은 인류의 종말론적 희망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죠. … 과학적 탐구의 거대한 발전을 지지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희망이었습니다.” 르네 톰, 이정우 역 『카트스트로프의 과학과 철학』(솔, 1995). p.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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